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6
교랑의경 16화
정교랑이 돌아오면서 벌어진 성가신 일들이 일단락되었다. 이노야는 과거 방탕하게 지내던 시절 가까이했던 여인들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을 며칠간 공을 들인 끝에 원만히 해결했고, 이부인은 이 까다로운 ‘딸’ 문제에 대해 잠시 손을 떼게 되었다.
정육랑과 정칠랑 역시 이름을 바꾸는 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그 바보는 갇힌 신세니 겁낼 일도 놀랄 일도 없다.
대부인은 이방 내외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을 걱정하지 않게 됐고, 가정이 화목하니 더 이상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됐다.
지난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조용하고 평온하던 일상으로.
반근과 정교랑도 잘 지냈다. 이리저리 떠돌며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고, 먹고 입는 것도 풍족했다. 게다가 자신들만 쓰는 작은 부엌까지 생겼으니 아씨의 까다로운 식성도 근심할 필요가 없었다.
“아씨, 아씨. 이럼 돼요?”
반근이 외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정교랑은 팔걸이 책상에 기대 눈을 감고 있어 자는 건지 깨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반근은 어느새 문 앞으로 와서 소리치고 있었다. 손에 밀가루 반죽을 들고 있는데 누르스름한 게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정교랑이 눈을 뜨고 쳐다봤다.
“벌꿀을 한 숟가락 더 넣고 꾹꾹 눌러 뭉치면 돼.”
반근은 신이 나서 네 하고 대답했다.
“아, 맞다.”
반근이 뛰어가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리며 물었다.
“아씨, 젓가락으로 펴 놓은 다음엔…….”
정교랑이 팔걸이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왼손과 오른손의 손가락 두 개를 뻗으며 허공에 대고 몇 가지 동작을 해 보였다. 느린 동작이었지만 반근은 꼼꼼하게 봤다.
“알겠어요.”
반근은 뒤돌아 얼른 부엌으로 뛰어갔다. 정교랑이 입을 약간 오므리며 웃음을 짓고, 계속해서 팔걸이 책상에 기댔다.
“아씨, 이건 뭐라고 불러요? 진짜 예쁘네요. 이걸 정말 제가 만들었다니.”
반근이 기뻐하며 놀라워했다. 반근은 날실 같은 황금색 튀김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어 낮은 탁자 위에 펼쳐 놓고는 신이 나서 감상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하나를 집더니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달콤하고 바삭바삭하여 입에 살살 녹았다.
“난, 모르겠어.”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이런 조리법을 생각해 내다니 아씨는 정말 대단하세요.”
반근도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잠시 침묵했다. 이건 생각해 낸 게 아니라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잔재주 가지고 뭘.”
정교랑이 몇 입 먹고는 더 이상 먹지 않자 반근이 물을 따라 건네며 물었다.
“그런데, 아씨. 정말 차는 안 드세요?”
“그런 차는 안 먹어.”
정교랑이 물을 들고 천천히 마시며 말했다. 반근이 혀를 내두르고 도리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아씨는 어떤 차를 드세요?”
천천히 물을 마시고 난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정교랑의 기억은 회복되지 않았다. 기억이 스스로 반응하지 않는 한 정교랑이 무엇인지 생각해 내려고 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예를 들어 밀가루 음식을 보면 머릿속에서 그 조리법이 떠오르는 때도 있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때도 있었다. 또 예를 들자면 차는 아무리 마시려 해도 입에 안 맞았다. 머릿속에서 먹기 싫다는 강한 거부 반응이 있을 뿐, 어떤 차를 마시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인 듯했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없었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모르겠어.”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반근은 이미 낮은 탁자를 옮기고 있었다. 반근에게는 항상 반 박자 느린 아씨의 답변이 익숙했다.
“아씨, 낮잠 주무실 시간이에요.”
정교랑은 반근의 말에 응 하고는 정교랑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서 대나무 문발을 넘어 침상으로 갔다. 방 안은 곧 조용해졌다.
밖에서 여종 하나가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쳐다봤다. 대나무 문발 너머로 침상 위에는 여인이, 침상 아래에는 그 몸종이 곤히 잠든 모습이 보였다. 다시 가운데 쪽을 보니 탁자 위에 고소한 냄새가 나는 간식이 놓여 있었다. 가느다란 것이 겹겹으로 얽혀 있는데 어떻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종은 저도 모르게 눈빛을 반짝이고는 까치발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손을 뻗어 작은 간식 하나를 집어 입에 넣자 감탄이 절로 나오며 정신이 확 들었다.
방 안에 코 고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역시 바보는 바보네. 그저 먹고 자는 것만 알아.”
여종은 소리 죽여 중얼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괜히 먹을 것만 축내지.”
여종은 안을 몇 번 힐끔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간식을 쟁반째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쪽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허드렛일을 하는 어린 몸종이다. 어린 몸종은 날마다 놀러 나가기 바빠 이 시간엔 그림자도 안 비춘다.
여종은 음식을 들고 이리저리 좌우를 살피며 문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이라 연못에 있는 연꽃도 축 늘어져 있고, 숲에서 들리는 매미 울음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낮잠을 잘 시간이라 마당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쟁반을 들고 총총걸음으로 밖으로 나간 여종은 마당을 지나 측문으로 빠져나와 좁은 골목을 걸어 자기 집으로 향했다.
“이봐.”
갑자기 정수리 위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종은 순간 걸음을 멈추고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야.”
여자아이가 소리쳤다. 고개를 든 여종은 그제야 석가산(石假山. 뜰에 돌을 쌓아 올려서 만든 산) 위에 지은 작은 정자에 서 있는 세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여섯째 아씨, 일곱째 아씨, 다섯째 아씨.”
여종이 얼른 몸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나이는 정오랑이 가장 많은데도 맨 마지막에 부른 것은 여종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적서의 구분 때문이었다.
“늙은이가 뭘 그리 수상쩍게 움직여?”
정칠랑이 말했다. 정육랑은 여종의 손에 들린 쟁반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정칠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뭘 들고 있는 거야? 또 남의 거 훔쳐가는 거지!”
정육랑이 말했다. 정육랑은 이제 12살로 혼기가 찼다고 할 수 있는 나이였고, 어머니에게서 집안일을 배우기 시작하여 여종들의 손버릇이 나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절도죄가 씌워지면 가볍게는 매질을 당한 후 쫓겨나고, 무겁게는 관아로 넘겨진다. 여종은 놀라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여섯째 아씨, 소인이 어찌 감히요. 이건 교랑 아씨께서 먹고 남아 버리시는 건데, 소인이 보기에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것 같아 집에 있는 손자나 줄까 하고 챙긴 거예요. 훔쳐온 건 절대 아닙니다.”
여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칠랑은 그제야 그 노비가 정교랑의 처소에서 일하는 여종임을 알아챘다. 그 바보가 꼴 보기 싫다 보니 이 여종까지 덩달아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 바보 거구나. 내버려 둬.”
정칠랑이 정육랑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옆에 있던 정오랑이 입을 오므리며 웃더니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여간 여종들은 하나같이 약삭빠르다. 바보에게로 미루면 어차피 대질할 수도 없으니 자기한테 유리한 법이다.
정육랑은 바보의 사람이라는 말에 불쾌한 마음이 들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 금빛 찬란한 간식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창밖에서 그 바보의 방 안을 쳐다볼 때 맡았던 맛있는 냄새가 갑자기 떠올랐다.
“이봐, 그거 이리 가져와 봐.”
정육랑이 쟁반을 가리키며 말하자 여종은 잽싸게 움직였다. 음식을 집으로 가져가겠다는 생각은 접은 지 오래고, 더 이상 추궁만 당하지 않아도 감지덕지였기에 곧바로 공손하게 바쳤다.
“이걸 뭐 하게?”
정칠랑이 코를 가리며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러다 바보한테 병 옮아.”
정오랑은 여종이 내미는 쟁반을 받아 웃으며 정육랑 앞으로 가져오더니 물었다.
“동생, 이거로 뭐 하고 놀게?”
“우리 이거 물고기한테 주러 가자.”
정육랑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물고기도 바보 돼!”
정칠랑이 소리쳤다.
“바보가 되면 더 좋지. 낚시하기 쉬워지잖아.”
정육랑이 웃으며 말하고는 치마를 손으로 걷고 연못 쪽으로 갔다. 정칠랑이 뾰로통 입을 내밀며 일부러 협박하듯 소리쳤다.
“그럼 나 언니랑 안 놀아.”
정육랑은 겁날 거 없다는 듯 정오랑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정오랑이 웃으며 정칠랑을 잡아끌었다.
“바보의 음식을 먹어도 바보가 되진 않아. 어차피 걔 것도 아니잖아. 우리 집 것이지.”
정오랑이 웃으며 말하자 정칠랑은 그제야 응 하고 대꾸하고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여종은 기회를 틈타 후다닥 도망쳤다.
바삭바삭한 간식을 조금 떼어 물 위로 흩뿌리자 곧 연못 아래에 있던 비대한 물고기가 와서는 먹어치웠다.
“이게 뭐지? 평소에 못 보던 건데?”
정육랑은 물고기에게 간식을 던져 주면서 손에 묻은 냄새를 맡아 보았다.
“모르겠어, 나도 처음 봐.”
정오랑이 말했다.
“그 바보한테 주는 거니까 우리가 먹는 거랑 당연히 다르겠지.”
정칠랑은 몇 걸음 멀찍이 떨어진 채 코를 가리고 서 있었다. 정육랑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간식을 조금 떼어 자신의 입에 넣자 정칠랑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
정육랑도 곧 소리를 질렀다.
정오랑으로서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 바보는 부엌을 단독으로 쓰는데 숙수를 딸려 주지 않고 허드렛일 하는 늙은 여종 하나와 어린 몸종 하나만 붙여 줬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나이 든 여종과 몸종이 무슨 요리를 하랴 싶지만 바보한테 맛있는 음식이 필요하겠는가. 먹고 배만 채우면 그만이지.
처음 보는 음식이고 이 집에서 자주 해 먹는 음식도 아닌 것으로 보아 아마 그 바보의 부엌에서 만든 것일 터였다. 맛이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그런데 웩웩거리며 토할 줄 알았던 정육랑이 예상 밖으로 또 하나를 집어 입에 넣는 게 아닌가.
“맛있다!”
정육랑이 음식을 입에 물고 말했다. 정칠랑과 정오랑은 대갓집 규수의 자태를 잃은 정육랑의 모습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육랑이 바보가 됐어!”
정칠랑이 소리치며 치마를 들고 뛰어갔다.
대부인의 귓가에 사흘 만에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막내딸은 몇 년 더 데리고 있다가 시집보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빨리 보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어머니, 어머니. 이거 먹고 싶어요. 나도 이거 먹을래요.”
정육랑이 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모친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 앞에 놓인 작은 탁자에는 쟁반에 간식이 놓여 있었는데 끄트머리가 조금 부서져 있었다.
“육랑, 넌 이제 12살이야. 어디서 이렇게 식탐을 부려.”
대부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왜 편애를 하시냐고요. 바보한테만 맛있는 거 주고 저한텐 안 주셨잖아요.”
정육랑이 뾰로통 입을 내밀며 덧붙였다.
“걔한테 육랑을 시키고 절 칠랑으로 만들려고 그러시죠!”
대부인은 머리가 아팠다.
“뭔데 그렇게 맛있단 거야?”
대부인이 간식을 조금 떼어내 입에 넣더니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훌륭하구나.”
모친이 칭찬하는 걸 본 정육랑은 더욱 골을 냈다. 대부인은 시끄러워 못 견디겠는 듯 말했다.
“가서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봐라.”
정교랑 처소의 여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전전긍긍하게 됐다. 이런 허드렛일을 하는 나이 많은 여종에게는 방 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어린 낭자들을 속일 순 있어도 주인마님까지 속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끝장이구나, 곧 쫓겨나겠어. 이게 다 그 바보 때문이다. 괜히 음식 하나 잘못 먹어서 이게 웬 고생이야.
여종은 원망스럽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해서 바닥에 바짝 부복해 있었다.
“이걸 네가 만들었느냐?”
대부인이 물었다. 여종은 두 번을 듣고서야 무슨 질문인지 알아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반근 그 애가 만든 거예요.”
여종이 얼른 손을 내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반근?
한참을 생각한 대부인은 누군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주씨 집안 노부인께서 그 바보의 시중을 들라고 붙여 준 아이면 정성 들여 고르고 고르셨겠지. 바보가 원하는 거라곤 그저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는 것뿐일 테니, 몸종의 음식 솜씨가 훌륭한 것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었다.
“어머니, 그 아이를 갖고 싶어요.”
정육랑이 단정히 앉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