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27
교랑의경 227화
다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왕십칠과 정사낭이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넷째 도련님, 이쪽으로 오세요.”
시녀가 말했다. 정사낭은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턱을 넘어섰다.
회랑 아래에 곧은 자세로 서 있던 여인이 손을 들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연꽃 연못 위의 바위에서 눈을 내리깔고 정사낭을 힐끗 쳐다보았던, 바로 그 미인이었다.
정교랑이 몸을 굽혀 예를 표했다. 잠시 넋이 나갔던 정사낭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답례를 하려고 했지만, 뒤에 있던 왕십칠이 그를 밀치는 바람에 엉거주춤 비틀거렸다.
“소생 왕십칠이 낭자를 처음 뵙겠습니다.”
왕십칠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며 공수의 예를 올렸다. 익숙한 동작이었지만 다소 과장되어 귓가에 꽂아둔 꽃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왕십칠이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역시 미인이네. 움직이지 않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인이야.”
왕십칠이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상 모든 여인의 아름다움은 가지각색이다. 생기발랄하고 화려한 미인들이 있는 반면, 어떤 미인은 아무런 표정 없이, 말하지도, 웃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화폭 속에 조용히 서 있는 천고 미인과 같다는 뜻으로 그림 같은 미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던가.
정사낭이 왕십칠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누이, 이쪽은 내 외숙부님 댁의 십칠낭이야.”
정사낭이 어색하게 왕십칠을 소개했다.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어서 오세요.”
정교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왕십칠이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거슬려?”
왕십칠의 말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거 아쉽네.”
왕십칠이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정교랑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뭐, 상관없지. 그림 같은 미인은 보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낭자는 앞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왕십칠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나지막이 읊조렸다.
“저 사람, 설마 바보인가?”
한쪽에 서 있던 반근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주육낭은 도리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정교랑을 쳐다봤다. 저 여인의 입이 얼마나 악독한데.
“그 입 다물지 못해!”
정사낭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왕십칠에게 소리치고 불안한 눈빛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 저, 저놈이 장난을 친 거야.”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좋다고? 뭐가 좋아?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어리둥절했다. 왕십칠만 빼고.
“나쁘지 않네. 아주 좋아. 말만 잘 들으면 됐지. 앞으로 낭자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내가 편안하게 살게 해 줄게.”
정교랑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층계를 내려와 왕십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진지하게 왕십칠을 위아래, 좌우로 꼼꼼히 훑어보았다.
저 못생긴 놈한테 뭐 볼 게 있다고! 주육낭도 굳은 얼굴로 함께 왕십칠을 쳐다봤다.
열여섯 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나이에, 키도 나보다 작고 몸이 호리호리한 걸 보아서는 영 튼실하지도 못하겠군. 눈도 코도 조그마해서 나만큼 영리해 보이지도 않아. 얼굴은 꼭 귀신같이 허옇게 칠해서는! 연지분까지 처바르다니!
경성의 귀공자들이 이 정도 화장을 하는 것을 익히 보아 왔던 주육낭이지만, 하필 왕십칠이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영 메스꺼워 보였다.
저 면상에 볼 게 뭐 있다고, 몇 번 더 봤다가는 토 나올 지경이야!
왕십칠에게는 여인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고, 내심 즐기는 일이기도 했다. 왕십칠은 내친 김에 두 팔을 활짝 벌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어떻습니까?”
왕십칠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물었다. 주육낭은 속으로 침을 뱉고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나쁘지 않네요. 다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봐, 이제 시작이야. 주육낭이 꼴 좋다는 눈빛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실컷 욕먹고 울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낭자, 편하게 물어보십시오.”
왕십칠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올해 몇 살이죠? 어디 사람이고요? 집엔 누가 있어요? 가업은요?”
마당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어리둥절했다. 창피해하던 정사낭조차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지금 진지하게 집안을 알아보는 건가?
왕십칠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 우리 앉아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 장인어른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 일들이지만, 낭자가 알고 싶다니 내 친히 말해 줄게.”
왕십칠이 손을 뻗어 안쪽으로 가자는 손짓을 하며 정교랑을 향해 눈썹을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 집안의 일인데, 낭자가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당연히 알려 줘야지.”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가벼운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려 안쪽을 가리켰다.
“공자, 안쪽으로 드세요.”
두 사람이 정말로 대청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자,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더욱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이지? 지금, 진심으로 저러는 건가? 시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근을 보며 물었다.
“아씨께서는 정말 이 혼사를 수락하려고 저러시는 거야?”
시녀의 말을 들은 반근은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난 차를 우리러 가야겠어.”
반근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차를 우린다고…….
“그럼 내가 찻잎을 볶을게.”
시녀가 반근의 뒤를 따라갔다.
정사낭이 뒤늦게 왕십칠을 따라 대청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는 주육낭만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됐다. 주육낭은 대청 안에 세 사람이 나란히 자리한 것을 보았다.
저 생기다 만 놈이 저리 무례하고 노골적으로 쳐다보는데, 저 여인은 왜 아직도 똑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거지? 어서 욕이라도 해! 비웃으라고! 얼른 벽에 걸린 활을 들어서 저놈에게 겨누라고!
“공자, 차 한잔해요.”
그래, 차! 차를 마시라고 해! 그리고 분통 터트려서 죽이라고!
흥분한 얼굴의 주육낭이 두 주먹을 꽉 쥔 채 대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방 안의 웃음소리가 마당을 지나 대문 밖까지 전해졌다. 대문 앞에 도착한 진십삼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택 앞에 세워진 마차는 주씨 집안의 것이었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주 노야나 주육낭의 것이 아니었다.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아하니 남자 손님이 온 게 분명했다.
진십삼은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거리에서 본 사람이 너랑 되게 닮았다고 생각했어. 내가 헛것을 본 줄로만 알았는데 네가 맞았구나.”
“경성에 온 지 그리 오래됐는데, 왜 이제야 아씨를 보러 온 거야?”
대문 앞에 걸터앉은 두 사환이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으로 처음 보는 사환 두 명도 함께 앉아 있었다.
사환들은 강주 말씨를 썼고, 말하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호기심이 많아 각지 사투리를 두루 익힌 진십삼은 사환들의 대화를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집이 좋네. 주씨 가문에서 아씨께 주신 거야?”
“이 집은 아씨 거야.”
“아씨 거라고?”
사환이 더 물으려는데, 금가아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진 공자님.”
금가아가 서둘러 진십삼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사환들도 얼른 몸을 일으켜서 진십삼을 쳐다봤다.
“다 있나 봐?”
진십삼이 안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금가아는 진십삼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뭔가를 알고 물었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삼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대청 안에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두 사람이 여긴 왜 온 거야?”
진십삼이 놀란 얼굴로 묻자 주육낭이 언짢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정교랑이 불렀어.”
주육낭이 인상을 팍 쓰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네까지 어쩐 일이야?”
“지나가는 길이야. 지나는 길에 낭자한테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세상에서 거짓말을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은 절대 거짓말을 안 한다고 믿는지.”
주육낭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자 진십삼이 웃음을 터트렸다.
“스스로도 못 믿는데 어떻게 남을 믿게 하겠나?”
마당에 소년이 하나 더 늘어나자, 대청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았다. 정사낭이 주씨 저택에서 봤던 소년이었다.
주씨 집안의 아들들이군. 보아하니 주씨 집안에서도 바보 누이를 그냥 내버려 두거나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닌가 보네. 우리 집에 있었을 때처럼 거처를 따로 두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저택은 도관보다는 훨씬 나아. 가구들도 주씨 집안에서 쓰는 것만큼 좋아 보이고.
“내가 궁금했던 것들은 다 해결됐어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정사낭이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니는 날 보려고 일부러 온 거예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사낭이 서둘러 고개를 내젓고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아, 아니 그건 아니야. 난 장강주 선생의 서원에서 공부하러 왔어.”
“나는 낭자를 보려고 일부러 왔지.”
왕십칠이 말했다. 정교랑이 싱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정사낭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옷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누이는 뭐 필요한 거 없어? 많지는 않지만, 이거 가져가서 써.”
얼마 되지 않는 액수에 손이 부끄러웠는지 정사낭의 얼굴이 붉어졌다.
“며칠만 더 지나면 집에서 다시 돈을 부쳐 주니까, 그때 더 보태 줄게.”
왕십칠이 끼어들었다.
“걱정하지 마. 우리 집에 남아도는 게 돈이니까. 낭자를 우리 집에 데리고 가기만 하면, 돈은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쓸 수 있어.”
역시 둘 다 바보였어. 문 옆에 앉아 있던 시녀와 반근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반근.”
정교랑이 부르자 시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한 시녀는 정사낭에게서 돈주머니를 건네받았다. 그러고는 정사낭을 보고 미소 지으며 나긋이 말했다.
“도련님은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내가 복이 많다고? 오라비가 누이를 챙겨 주면 누이가 복이 많은 거 아닌가? 정사낭은 이해가 되지 않는 눈길로, 돈주머니를 받아 물러가는 시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럼 오라버니의 글공부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요.”
“방해는 무슨, 아니야.”
왕십칠이 웃으면서 정사낭을 대신해 대답하자, 정사낭이 그를 흘겨보고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난 성 밖에 있는 서원에서 묵고 있어. 장강주 선생의 서원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어딘지 알 거야.”
“나는 취운각에서 묵는…….”
정사낭이 왕십칠의 말을 끊었다.
“이자는 곧 집으로 돌아갈 거야.”
왕십칠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정사낭을 올려다보았다.
“급할 게 뭐 있다고? 혼자서는 못 가. 가더라도 정 낭자와 함께 갈 거야.”
정사낭은 아예 왕십칠을 잡아끌어 일으키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어서 집에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하든가!”
아, 참. 내가 정 낭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집으로 서신을 보내야 이 혼사에 진척이 있겠지. 왕십칠은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두르기 시작했다.
“교랑 누이, 조금만 기다려. 누이네 집에서 금방 데리러 올 거야.”
정교랑은 말없이 웃으며 일어서서 두 사람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