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79
교랑의경 279화
“아씨, 아씨.”
반근이 정교랑의 손을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밤에 거울을 보면 영혼이 비추어진다고 했어. 그래서 사람들은 밤에 거울을 보면 안 된다고 했는데. 아씨께서는 이제 막 깨어나셨는데…….
정교랑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뜨고 반근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 어서 가서 쉬어.”
정교랑이 반근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반근은 여전히 정교랑이 걱정되었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정말로 공자께서 아씨의 이름을 불러서 깨어나신 거예요?”
반근이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기묘했던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면, 반근은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와 닿지 않았다.
정교랑이 깨어난 것을 보자마자 반근과 시녀는 기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반근과 시녀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정교랑의 이름을 알려 주었던 그 소년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야밤에 갑작스럽게 와서는 말도 없이 떠나고, 말 한마디로 아씨를 깨우다니. 혹시 신선인가?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반근이 물었다.
“왜냐면, 이름(名)은 운명에서 왔거든. 운명(命)이란 글자엔 구(口)와 석(夕)이 들어가지. 저녁(夕)은 어둡잖아. 어두우면 서로를 알아볼 수 없으니, 사람들은 입(口)으로 자기 이름을 알린 거야.”
이름은 곧 운명이다. 이름을 입으로 불러내야만 운명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그 이름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하늘의 뜻일까, 사람의 계산일까?
정교랑은 고개를 숙여 탁상 위에 놓여있던 서찰을 가져왔다.
넌 누구지?
“넌 누구지?”
정교랑은 서신 위의 글자를 조용히 읊었다.
* 작가의 말: 해가 지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 상대에게 자신을 알리는 이야기의 출처는 입니다.
* * *
날이 밝아질 무렵, 금가아는 대문 앞을 빗자루로 깨끗이 청소한 뒤, 물을 뿌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이,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보네.”
근처의 다른 문지기 노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금가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노인을 향해 가볍게 예를 올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은 아직 조용했고, 부엌에서 밥 짓는 냄새가 향긋하게 퍼졌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금가아의 눈에는 오늘따라 하늘이 더욱 파랗게 보였고, 나무는 더욱 싱그러웠으며, 저택의 곳곳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금가아.”
대문 밖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금가아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던 금가아는 깜짝 놀랐다.
커다랗고 둥그런 얼굴을 한 사내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내가 웃으려고 입꼬리를 올리자, 눈이 살에 파묻혀 없어져 버렸다.
“누구세요?”
금가아가 외쳤다.
“나는 주, 주 노야다.”
주 노야? 금가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문 앞의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떻게 하루 만에 이렇게 뚱뚱해질 수가 있죠?”
금가아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 자식이, 이게 어딜 봐서 살이 찐 거야? 부은 거지!
주 노야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가아는 그게 무슨 표정인지 도통 알아볼 수 없었다.
“교교는 일어났느냐?”
“저희 아씨를 찾아서 뭐하시게요? 저희 아씨 것을 빼앗으려고…….”
주 노야는 달려들어 금가아가 말을 잇지 못하도록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헛소리하지 말아!”
주 노야는 놀란 얼굴로 연신 소리를 질렀다. 주 노야의 손에서 간신히 벗어난 금가아는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저게 누구야? 왜 꼭두새벽부터 남의 집에 와서 사람을 죽이려 들지?”
시녀가 회랑 아래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녀는 쉼 없이 기침을 해대는 금가아를 보고, 이어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사실 시녀도 주 노야를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다.
하늘이 보고 있는데! 여기서 살인을? 내 목숨이 열 개라도 그런 짓은 감히 못 하지!
주 노야가 속으로 외치면서 대청을 훔쳐보았다.
시녀의 어깨 저 너머로, 수수한 꽃무늬에 금테 두른 비단 가을옷을 입은 여인이 대문 쪽을 향해 시선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딱 한 번 눈길을 주었을 뿐인데도 주 노야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교교, 이건 다 오해다.”
주 노야는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꿇어앉았다.
반근은 정갈하게 놓인 밥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하얀 죽 위에 참깨를 조금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밥상을 안으로 옮겼다.
주 노야는 여전히 마당에 앉아 눈물 콧물을 쏟으며 하소연 중이었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네가 쓰러지니까 걱정이 돼서, 네 점포를 잘 지키려던 거라고.”
“난 정말 오직 너를 위해서 그런 거다. 이 사람들이 못 미더워서 그랬지.”
“네 외숙모도 너를 집으로 데려와서 보살펴 주려고 했던 거야. 다른 사람들 말만 믿고 우리를 미워하면 안 된다.”
반근은 가만히 꿇어앉으며 정교랑 앞으로 식사를 가져다 놓았다. 시녀가 정교랑에게 젓가락을 건넸다.
마당에서 울부짖던 주 노야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럼 좋은 거죠. 날 위해 그런 거라는데, 어떻게 외숙부님을 미워하겠어요.”
정교랑이 주 노야를 보며 말했다.
좋다고? 이건 반어법이야. 반대로 말하는 게 틀림없어!
“교교, 우린 정말 널 위해서 그랬어.”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잘 된 거잖아요.”
“교교, 부디 우리를 용서해다오. 이 외숙과 외숙모의 목숨만은 살려 줘.”
주 노야가 정교랑의 안색을 살피면서 애원했다.
“왜 제가 목숨을 빼앗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교교, 제발 우리를 용서해다오. 우리 병 좀 낫게 해줘. 네 외숙모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아.”
주 노야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날 주 부인은 층계에서 굴러떨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히고 의식을 잃었다. 집으로 돌아간 주 부인은 그때부터 고열이 가시지 않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헛소리를 했다.
신선거에서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죽을 뻔했던 주 노야는 집으로 돌아간 후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나마 거동을 할 수 있지만, 머지않은 시일 내에 자신의 처지도 부인과 똑같아질 것이라고 주 노야는 예상했다.
주 노야의 말을 들은 반근과 시녀는 잠시 놀라나 싶더니 곧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노야, 그건 다 놀라서 그러신 거잖아요. 주 부인은 아씨께서 막 깨어나셨을 때 오셨어요. 그러더니 아씨를 보자마자 뛰쳐나가셨죠. 더군다나 주 노야께서는 아씨를 뵙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 아씨 탓을 하세요.”
“탓하려는 게 아니다. 탓하려는 게 아니야. 교교, 우리는 너를 탓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다오.”
시녀의 말에 주 노야는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아휴, 어서 의원을 찾아가 병을 봐 달라고 하세요.”
시녀가 귀찮다는 말투로 말했다.
이게 어딜 봐서 병이야? 몸종 따위가 뭘 안다고!
주 노야는 고개를 들어 대청에 조용히 앉아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오장육부가 파랗게 질려오는 고통 속에서 주 노야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내가 왜 잊었을까? 저 여인한테 맞서면 어떤 꼴이 나는지 내가 왜 잊었을까?
여러 사람의 모습이 주 노야의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 강요에 못 이겨 죽은 사람, 분통 터져 죽은 사람, 벼락에 맞아 불에 타죽은 사람, 앞길을 망친 사람 등등.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정작 이 많은 사람을 망가뜨린 장본인은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도 묻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 여인의 성질을 긁거나, 앞길을 막은 자 중 좋은 결말을 맞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주 노야는 자신의 얼굴이 다시 붓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교교, 이건 온 세상 사람이 다 증명해 줄 수 있어. 난 정말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잘 생각해 보거라. 네가 이 지경이 됐는데, 누가 점포를 관리하겠느냐? 그걸 어떻게 아랫것 몇 명한테 다 맡기느냔 말이다. 교교, 우리 주씨 가문에 돈이 모자라서 그랬겠어? 당초 정씨 집안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모친의 혼수 덕분이었잖으냐. 난 정말 진심으로 너를 위한 거였다. 난 네 외숙이니, 네가 없으면 당연히 내가 도와줘야지. 나 말고 누가 널 도와주겠어?”
주 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 시녀를 향해 삿대질했다.
“네 이년,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거라. 네가 내게 했던 말들이 어디 가당키나 하더냐!”
시녀가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씨, 이제 막 깨어나셔서 제가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아씨께서 쓰러지신 동안 외숙부님과 넷째 도련님께서 가게를 봐 주셨어요. 정말이지…….”
시녀는 미소를 지으며 주 노야를 흘겨보았다.
“정말이지, 고생을 많이 하셨죠.”
뭐야? 아직 말도 안 했었어?
주 노야는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나와 부인은 어쩌다 이리 죽을 지경이 된 게야? 분명히 저 여인이 약을 썼을 텐데! 부인이 깨어난 정교랑을 봤던 그날, 내가 신선거에서 차를 마시던 그 순간! 암, 틀림없어. 분명 저 여인은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교교, 우리는 정말 널 위하는 마음이었어!”
주 노야가 가슴팍을 손으로 치면서 울부짖자, 정교랑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외숙부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뭐죠?”
“교교, 부디 우리의 목숨을 살려다오.”
주 노야가 눈물을 훔치면서 애원했다. 정교랑은 주 노야를 잠시 쳐다보았다.
“아무리 외숙부님이라 해도, 병을 고치는 원칙은 어길 수 없어요.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니,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주 노야는 속으로 더욱 확신했다.
이거 봐, 이거 봐! 유 교리 때와 똑같잖아!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그놈의 원칙을 들먹이면서 발뺌하는 거야. 원칙을 고수하는 한, 병을 고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 여인을 탓할 사람은 없을 테지!
“교교, 교교! 난 정말 너를 위해 그랬다니까. 제발 우리 목숨만은 살려다오.”
주 노야가 몸을 일으켜 앞으로 몇 걸음 다가오자 정교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 아씨. 이제 인상도 쓸 줄 아시네요?”
옆에 있던 시녀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인상을 써?
정교랑이 다시 두어 번 미간을 좁혀보았다.
“진짜네, 진짜야!”
반근도 가까이 와서는 정교랑을 자세히 보면서 웃었다.
사람들은 원치 않은 일을 마주했을 때 미간을 찌푸리곤 한다. 미간을 찌푸린다는 것이 썩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시녀와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는 아씨의 모습에 환호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주 노야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시녀와 반근의 모습에 머리가 점점 더 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일부러 저러는 거지? 날 우습게 만들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잖아!
“교교, 네가 그리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면, 차라리 우리가 먼저 알아서 사라져 주마. 하지만 제발, 우리 주씨 가문만은 살려다오.”
주 노야가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두 분한테 병이 난 게, 저 때문이라는 거예요?”
정교랑의 질문에 주 노야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너 때문이 아니다. 우리 때문이지.”
정교랑은 실소를 터트리고 말없이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잠시 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외숙부님께서 먼저 말을 꺼내셨으니 이 일은 여기서 덮을게요.”
시녀와 반근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정교랑을 쳐다보았고, 주 노야는 몹시 기뻐했다.
“교교, 역시 네가 우리를 나 몰라라 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어.”
주 노야는 눈물을 닦으면서 기대 섞인 눈빛으로 앞으로 몇 걸음 더 내디뎠다. 정교랑이 주 노야를 바라보았다.
“그럼, 우리는 무슨 약을 먹어야 할까?”
주 노야가 머뭇거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