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84
교랑의경 284화
다 똑같다고? 아무리 똑같다 해도, 왕씨 가문과 같을 수는 없지. 인품이 뛰어난 공자들도 그 쓸모없는 왕십칠과 같다는 말인가? 어떻게 같아?
“만약 나라면요?”
진십삼이 불쑥 물었다. 방문 앞에 앉아 있던 시녀와 반근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 공자가 벌써 두 번째 이러는 거지?
정교랑이 진십삼을 보며 웃음 지었다.
“내 세 번째 원칙을 미리 알았더라도, 내가 공자의 다리를 고치게 해 줬을 건가요?”
정교랑이 진십삼의 질문에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진십삼은 정교랑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찻잔을 쥐고 있던 그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한참인 것 같기도, 찰나인 것 같기도 한 시간이 지났다.
“아닌 척하던 옛날 모습이 또 나왔네요. 낭자한테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시녀가 다시 반근과 눈을 마주치더니 쿡 하고 웃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한 거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슬퍼할 필요 없어요. 이 세상에 만약이란 건 없고, 단지 일어난 일만 있을 뿐이에요. 굳이 열심히 생각하고, 물어볼 필요가 뭐 있나요. 자신만 난처해질 뿐이죠.”
정교랑은 입꼬리를 올리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가서 할 일이 조금 있어요. 이런 사소한 일 따위는 고민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지요. 진 공자의 좋은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해요.”
정교랑이 물이 담긴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물로 술을 대신하죠.”
진십삼이 정교랑을 보며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차로 술을 대신하겠습니다. 같이 술을 마실 날을 기다렸지만, 이루지 못하게 됐네요.”
“다음번에 볼 때는,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을 거예요.”
“다시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진십삼이 웃으면서 물었다.
“안 보겠다면, 어쩔 수 없고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는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 * *
“진 공자님, 조심히 가세요.”
시녀가 대문 앞에서 배웅했다. 진십삼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인 뒤, 시선을 돌려 회랑 아래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간에, 적어도 얻어가는 건 있다고 진십삼은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가 더는 없고, 지금은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을 배웅해 주고 있으니까.
“먼저 가겠습니다.”
진십삼이 싱긋 웃고는 정교랑에게 손을 저으며 인사하자, 정교랑은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진십삼은 말 위에 올라탄 뒤, 제자리에서 말굽을 몇 번 굴리고는 대문 앞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전하.”
걷고 있던 진안 군왕의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순간 짜증이 솟구쳤지만, 진안 군왕은 차분하게 걸음을 멈추고 여유 있는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진안 군왕을 불러 세운 이는 일고여덟 명의 내시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도지(都知) 장만성(張萬成)이었다.
“전하, 어딜 가시는 겝니까?”
장 도지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냥 좀 걷고 싶어서.”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하고 발길을 돌리려 했다.
장 도지는 짧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가 다른 내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장 도지는 황제와 태후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지라 진안 군왕을 윗전 받들 듯 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장 도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저기 거니는 거야 좋지요.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황궁의 사람으로서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해요. 전하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닌데, 철없이 굴면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일개 내시에게 이런 훈계를 듣자, 진안 군왕은 어쩐지 조금 거북했다.
“그래. 나도 알지.”
“알고 계신다니 다행이군요. 마마와 폐하께서는 전하를 이리도 아끼시는데, 전하께서는 허구한 날 밖으로만 나다니고 계시지요. 내년이면 전하께서도 출궁하실 테니, 가고 싶은 곳은 그때 마음껏 가셔도 될 텐데 말입니다. 출궁 이후에는 전하께서 궁 안에 들어오실 일이 얼마 없으니, 지금 궁에 계실 때 태후마마께 효를 다하고 오붓한 시간을 많이 보내심이 좋을 듯합니다.”
장 도지의 말에 진안 군왕은 헤헤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장 도지 일행이 자리를 뜨자, 진안 군왕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싹 걷혔다.
“저 재수 없는 놈이.”
내시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욕을 뱉었다.
진안 군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욱한 가을 안개 속에 보이는 황궁이 아득한 동시에 가깝게 느껴졌다.
“전하, 지난번 정 낭자의 일로 너무 늦은 시간에 돌아오시는 바람에, 마마와 폐하께서 의심하시진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번 배웅은 자제하심이 어떠신지요? 선물 하나면 마음을 전하시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보지 못해도 괜찮아. 보고 싶다면,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니까.”
말을 마친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황궁을 쳐다보고는, 황궁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 낭자, 주 낭자!”
덕승루 안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자, 별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소리의 정체는 주 낭자가 회랑 다리를 지나갈 때마다 덕승루에서 벌어지는 소란이었다. 회랑 다리 위의 소녀는 화려하고 진한 화장을 한 밤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화장기가 거의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단아함이 풍겼고, 햇빛에 비친 그녀의 용모는 더없이 청아하고 수려해 보였다.
“주 낭자, 주 낭자. 나 왕십칠이오! 왕십칠!”
왕십칠이 두 팔을 높이 들며 외쳤다. 다리 위의 소녀는 왕십칠의 외침을 무시한 채, 어린 사슴처럼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르긴 뭘 불러! 꼭 주 낭자가 자네를 알고 있는 것처럼.”
서로 밀쳐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왕십칠에게 옷깃을 밟힌 사내 하나가 눈을 부릅뜨면서 외쳤다.
“주 낭자는 당연히 날 알지! 얼마 전에는 주 낭자가 직접 칠현금도 연주해 줬다니까? 나를 사내대장부라며 칭찬하기도 했다고.”
주위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왕십칠에게 몰려들었다.
“정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 가서 주 낭자를 만나 보시오. 댁을 아직 기억하는지 물어보라고.”
도발을 못 이긴 왕십칠은 지나가던 점원 하나를 붙잡아 주 낭자에게 이를 통보하라 말했다. 점원은 왕십칠에게 비싼 심부름 값을 받아 챙기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왕십칠에게 돌아왔다.
“주 낭자가 뭐라고 하던가?”
왕십칠이 다급하게 묻자 점원은 웃으면서 일부러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주 낭자께서는, 모른다고 하던데요?”
덕승루 안은 일순간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 자식, 허풍이 하늘을 찌르는군!”
“상상이랑 현실을 구분을 못 하는 거 아니야?”
“썩 꺼져, 남방 촌뜨기야!”
주위의 조롱과 비웃음에 왕십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좀 전의 점원을 붙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냉큼 가서 주 낭자의 몸종인 춘령, 춘령을 찾아와라. 그 애가 다 알고 있어!”
이때 소란스러운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젊은 시종 두 명이 왕십칠을 좌우로 붙들었다.
“공자님, 내일 출발인데,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작별인사를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시종 하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하자, 왕십칠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지금 하고 있잖아.”
“서둘러 가야 합니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벌써 와 있어요.”
시종들은 왕십칠의 말을 무시한 채, 그를 양쪽에서 꽉 붙잡고 덕승루 밖으로 끌고 나갔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끌려나가는 왕십칠을 본 주위 사람들은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뉘 집 바보 녀석이 여기까지 들어온 거야!”
웃음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한쪽에 모여 있던 잡부 한 명이 대청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웃으면서 춘령에게 물었다.
“춘령, 저 사람이 널 찾나 본데?”
춘령이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잡부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오라버니들, 어서 얘기해 주세요. 그 무뢰배들이 태평거에 가서 난리를 치고는 어떻게 됐어요?”
4월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매일매일 새롭고 신기한 일이 벌어지는 경성에서는 벌써 옛날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벌건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살인이 벌어진 자극적인 이야기인지라, 흥분한 사내들은 더욱 열을 올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또 화살 한 발이 날아갔지. 태평거 사람들이 무뢰배들을 하나씩 하나씩 화살로 쏴서 죽여버린 거야.”
마치 눈앞에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잡부의 말솜씨에 춘령은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잡부들은 그런 춘령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활을 잘 쏘던지, 화살 한 발 한 발이 다 머리를 관통했다니까. 뇌수까지 흘러나오더라고.”
뒷걸음질 치는 춘령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 드리워졌다.
“너무 끔찍하네요.”
춘령의 말에 잡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주씨 가문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거지.”
춘령은 여전히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저었다.
주씨 가문이 대단한 게 아니야. 주씨 가문이 대단한 게 아니라고.
그 여인이지. 그 여인이란 말이야.
춘령은 귓가에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앞에서 번개가 두 번 내리치고 불길에 휩싸인 두 사람의 형체가 아른거렸다.
왕십칠, 저 쓸모없는 놈을 손에 쥐어서 뭐에다 써? 그 여인의 눈엔 저놈이 뭣도 아닐 텐데!
“춘령!”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춘령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의 시녀가 춘령의 앞에 서 있었다.
“춘령, 여기서 뭐 해? 몇 번을 불렀는데도 못 듣고.”
시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얘 겁먹어서 그래. 사람 죽이는 이야기를 해줬거든.”
잡부들이 너스레를 떨면서 말했다.
“으이그, 도대체 요즘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자꾸 그런 이상한 이야기만 주워듣고.”
시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춘령을 나무라자, 춘령은 무안해했다.
“됐어. 어서 가자. 아씨께서 오늘 밤에 나가시잖아.”
시녀가 별말 하지 않고 재촉하자 춘령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오, 주 낭자를 초대한 거야? 어느 가문이길래?”
잡부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공주부 진(秦)씨 가문.”
“와, 진씨 가문이구나. 그 집에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주 낭자밖에 없겠지? 아주 중요한 연회인가 봐?”
잡부들은 일부러 주 낭자를 치켜세우며 아부를 떨었다. 주인의 영광은 곧 시녀들의 영광이다. 춘령과 시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이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지고 하늘색이 짙어지자, 진씨 가문 저택 앞에 마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춘령이 마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저택 앞에 빼곡히 세워진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비록 공주는 별세했지만, 조정에서는 공주의 관저를 거둬들이지 않고 진씨 가문에 공주부를 하사하였다. 이에 대해 어사가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당시 선황이 공주에게 각별했기에 눈 감고 귀 막으며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이전에도 주 낭자를 따라 유명한 가문 두 곳이 주최한 연회를 가 본 적 있는 춘령이었지만, 진씨 가문 저택 앞을 가득 메운 마차 행렬에는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춘령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마차가 진짜 많네. 이번 연회는 엄청 큰가 봐.”
춘령이 옆에 앉아 있던 시녀에게 속삭였다.
진씨 저택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시종과 하인들은 측문을 통해 바삐 드나들었다.
춘령이 타고 있던 마차는 측문을 통과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더 구석에 있는 쪽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마차가 쪽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옆문을 지나가려는 찰나, 진씨 저택의 하인이 마차를 제지하여 멈춰 세웠다.
춘령이 마차 휘장을 조금 들어 올려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여종 네다섯 명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존귀한 옷차림의 여자아이도 함께했다. 진씨 가문 하인들과 여종들이 마차 옆으로 우르르 몰려가 여인과 어린아이를 살갑게 맞이했다.
저 여인은 많아 봤자 열일곱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데, 나는 평생 꿈도 못 꿀 삶을 살고 있구나. 저 어린아이 또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거겠지.
“빨리 지나가시오. 어서요.”
좀 전에 마차를 제지했던 하인이 마부에게 재촉했다. 춘령이 타고 있던 마차가 흔들거리면서 측문을 지나쳤다.
“춘령, 바깥은 그만 보고, 아씨의 물건은 다 챙겼나 잘 확인해. 괜히 나중에 뭐 잃어버리거나 하면 골치 아파져.”
서둘러 시선을 거둔 춘령이 알겠다고 답하고는 주변에 놓인 크고 작은 상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관기가 다른 가문의 저택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모든 물건을 알아서 챙겨가야 한다. 좋게 말하면 준비성이 철저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남들이 관기가 쓰는 물건을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쪽문에 다다랐을 때 즈음, 춘령은 다시 한번 뒤를 힐끗 내다보았다. 또 다른 마차 한 대가 측문 앞에 서자, 진씨 가문의 사람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여인들을 에워싸면서 대우해주는 모습이 보였다.
작가의 말:
당나라 황궁의 태감 기구는 내시성(內寺省)이라고 불렸습니다. 품계로는 도지(都知), 부도지(副都知), 압반(押班)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