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33
교랑의경 333화
“안 되겠어요. 아직 짓기 전이니까, 당신이 빨리 가서 그 애를 말려요. 어르고 달래서 여기로 다시 데려오라고요.”
정 이부인의 말에 정 이노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되지도 않는 소리 그만하시오. 칠랑을 시켜 그 짓거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나까지 나서라고? 난 그 애 아버지란 말이오!”
정 이노야가 단칼에 거절했다.
“잘 생각해 봐요. 그 애를 달래는 건 곧 주씨 가문을 달래는 것과 같아요. 잘 달래서 좋은 집안이랑 혼례를 올리면······.”
말을 늘어놓던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외쳤다.
“세상에. 진씨 가문에서 왔다던 여인한테 답을 준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빨리, 빨리 가야겠네. 그쪽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가 버리면 어떡해!”
정 이부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몰라, 몰라.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절대로 교랑을 왕씨 가문에 시집보낼 수 없어요! 난 지금 당장 진씨 가문 사람을 만나러 갈게요.”
정 이노야가 머뭇거리며 정 이부인을 쳐다보았다.
“그, 그럼 지금 진씨 가문과 혼례를 올리겠다는 말이오?”
“안 될 게 뭐 있어요! 당신 딸이잖아요, 당신이 결정할 일이에요!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들을 필요 없다고요.”
정 이부인은 여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서둘러 단장을 하고 외출 준비를 마쳤다. 문을 나서면서도 그녀는 잊지 않고 정 이노야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도 빨리 교랑한테 가서 잘 얘기해 봐요!”
일만 관.
정 이노야가 헛웃음을 지었다.
“일만 관이 문제가 아니에요. 여보, 멀리 봐야 해요, 멀리!”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던 정 이노야의 표정이 차츰 바뀌어 갔다.
“고작 일만 관일 뿐이야!”
또 다른 탁자가 정 대노야의 거처 바닥에 엎어졌다. 정 대노야가 씩씩대며 탁자를 엎는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부엌에 쓸 땔감이 부족할 일은 없겠네.”
마당에 있던 여종 두 명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을 들은 다른 여종이 헛기침을 하며 경고하듯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여종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주씨 가문에서 그 돈을 어떻게 내다 버리든, 우리가 속 쓰릴 게 뭐 있어!”
정 대노야가 말했다.
무려 일만 관인데.
정 대부인은 가슴 언저리에 손을 얹고 읊조렸다.
속이 쓰리긴 하네.
“됐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요. 우리 같은 어른이 그런 철없는 애랑 똑같이 굴어서 되겠어요? 어차피 다음 달에 시집갈 테니, 기껏해야 며칠 저러고 말겠죠. 돈을 써 봤자, 그 짧은 기간에 얼마나 쓰겠어요.”
다 쓴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지. 고작해야 일만 관이잖아. 게다가 우리가 준 돈도 아니니까, 마음이 좀 쓰리긴 해도 아까울 건 없어. 돈과 관련된 일이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그리고 돈이 있다고 해도 우리 뜻대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 물론 돈이 없다면 이런 고민도 의미가 없는 거겠지만.
같은 시각, 돈 때문에 속이 쓰린 사람이 또 있었다. 귀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고 통사를 보며 물었다.
“그 정도로 심각하다고요? 고작 태창로 전운사일 뿐이잖습니까.”
손난로를 손에 쥐고 커다란 두봉을 두른 귀비가 고 통사와 함께 태후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근래 몇 년간 우리 집안에서 곡물상에 공을 들인 게 다 얼만데요. 이번에는 정말 손실이 막대합니다.”
고 통사가 미간을 좁힌 채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풍림이 그렇게 대단한 자였나요? 그럼 그 사람한테 언질이라도 하지 그랬습니까.”
귀비가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태창로 쪽에 알아서 방법을 생각하라고 했더니, 생각해 냈다는 게 살인과 방화였지 뭡니까. 뭐,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는 거야 큰 문제는 아니죠. 그런데 불만 지르고 사람을 못 죽여 도리어 일만 키웠으니 문제가 되는 거고요. 지금 풍림은 누구 하나 크게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릴 겁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앞으로 나설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풍림의 충의와 청렴을 본 백성들은 그를 청백리라며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태창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황궁에서 그에 상응한 포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얼마나 난리를 치겠습니까? 이런 시국에 제가 가서 뭐라고 한들, 풍림에게 약점을 잡히는 꼴밖에 더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정말 손해 막심이겠네요.”
귀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내년에 크게 돈을 버실 생각으로, 조부께서 가산의 반을 내어 곡식을 사 두셨다면서요. 겨울쯤에 태창로에서 곡식 가격을 올리면, 백성들이 조정에 항의하게끔 해서 국고를 풀게 하려고 벼르셨을 텐데,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귀비의 말에 고 통사가 한숨을 쉬었다.
“어쩌겠습니까. 몸을 사리고 기회를 기다려야죠. 지금 태창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는 눈들이 많습니다. 뭐 하나라도 건지겠다는 심보겠지요. 게다가 우리 가문이 여러 사람의 눈엣가시이지 않습니까. 진소 같은 자들은 분명 잠도 안 자며 제가 나서길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괜히 나서지 마세요. 이번 일에 휘말리면 분명 난리가 날 거예요. 돈을 잃는 건 괜찮아도, 대황자한테 불똥이 튀어선 안 됩니다. 안 그래도 요즘 폐하께서 이황자를 점점 더 총애하시는데, 우리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고 통사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황자가 중요하다는 건 물론 알지만, 고 통사에게는 돈도 중요했다.
겨울에 태창로의 곡식이 다 떨어지면, 내년 봄이나 여름쯤에는 큰돈을 만질 수 있었는데. 족히 세 배는 불려 바꿔 올 수 있었는데! 다 헛수고가 되어 버렸군.
소식을 들은 조부께서는 이미 화병으로 앓아누우신 터였다.
“운도 지지리 없지. 도대체 누가 그런 쓸모없는 놈들한테 돌덩이를 쥐여 준 거야! 불의를 참지 못하는 행인은 무슨! 그런 우연이 세상에 어디 있나!”
고 통사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태후궁 앞에 도착했다. 태후궁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황자가 맨 앞에서 걷고, 그 뒤로 진안 군왕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대황자가 굳은 얼굴로 둘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형님, 나랑 같이 갈래요?”
이황자가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에게 물었다.
“다 전하 때문입니다. 어제 갑자기 폐하께 제 공부를 확인하게 하셨잖습니까. 당장 폐하 앞에서 암송할 책부터 외워야 하니 지금은 못 가죠.”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이황자가 헤헤 웃으면서 진안 군왕의 팔을 토닥였다.
“무서워할 거 없어요, 형님.”
“난 그 책은 벌써 외웠는데. 누가 그렇게 게으름 피우랬나.”
대황자가 끼어들었다.
“전하는 외우는 게 빠르잖습니까. 감히 전하에 비할 수는 없지요. 전하가 하루면 외우는 것을, 저는 사흘씩이나 걸리니까요.”
진안 군왕이 쓴웃음을 지으면서 머쓱한 듯 코끝을 만졌다. 진안 군왕의 말에 대황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마, 고 대인.”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을 보고 예를 올렸다. 대황자와 이황자도 진안 군왕을 따라 멈춰 섰다.
“육가아, 어디 가니?”
귀비가 웃으면서 물었다.
“어마마마께 겨울 매화를 따다 드리려고요. 마마께도 따다 드릴까요?”
이황자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귀비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고는 이황자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육가아는 참 효심도 지극하지. 항시 황후마마를 생각하다니 말이야. 내게도 따다 준다면 정말 고맙겠구나.”
이황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난 걸음으로 다시 앞장서서 걸어갔다. 진안 군왕도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이황자의 뒤를 따라갔다.
대황자도 예를 올리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귀비가 그를 불러세웠다.
“넌 어디 가느냐?”
귀비가 얼굴에 있던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대황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겁에 질린 대황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저, 저는 공부를 하러······.”
귀비가 곧바로 그의 말을 끊었다.
“공부는 무슨 공부! 넌 할 줄 아는 게 공부 말고는 없지?”
귀비가 낮은 목소리로 호통치자, 대황자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옆에 있던 고 통사가 서둘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하, 오늘 날씨가 이리 좋은데, 이황자와 함께 꽃을 따러 가는 건 어떻습니까? 폐하께도 좀 가져다드리고요.”
고 통사가 웃음 띤 얼굴로 대황자에게 눈치를 주자, 대황자는 두려움이 서린 얼굴로 귀비를 올려다보았다.
“어서 가지 않고 뭐해!”
귀비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손가락으로 대황자의 이마를 찌르면서 말했다.
“눈치가 어린아이만도 못해서는. 멍청한 것,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살지!”
당황한 대황자는 울고 싶었지만 귀비가 무서워 울지도 못하고 서둘러 이황자의 뒤를 쫓아갔다.
귀비가 한숨을 푹 쉬면서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하시지요. 아직 어리니 천천히 가르치면 됩니다. 다 우리 대황자가 착하고 올곧아 그런 거잖습니까.”
고 통사가 말했다.
귀비는 콧방귀를 뀌고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태후궁에서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을 보고 말을 아꼈다. 두 사람은 궁녀들과 함께 태후궁 안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멈춰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전하, 오늘은 나가실 겁니까? 폐하 앞에서 그 부분을 외워 심기를 풀어 드린 다음, 저희도 나가서 바람을 좀 쐬는 건 어떨까요?”
내시가 웃으면서 물었다.
“나가면 뭐 해. 재미도 없는데.”
진안 군왕은 별 감흥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출궁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답답하기는 무슨. 딱 좋은데 뭘.”
내시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 소리를 내었다.
“웃긴 뭘 웃어.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아.”
진안 군왕이 내시를 흘겨보고는 뒷짐을 지고 말했다.
“그래, 맞아.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궁에 있는 게 답답해서 항상 바깥으로 나돌았지. 그 사람을 알고 나서는 더욱 궁 밖으로 나가고 싶었고. 그런데 그 사람이 떠난 뒤로는 어딜 가도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궁 안에 있든 궁 밖에 있든 나한테는 매한가지인 게야.”
내시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도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내시를 한 번 더 흘겨보고는 손을 내저었다.
“넌 모른다.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아 늘 변함이 없지. 그 사람을 볼 수 있든 볼 수 없든, 내 마음은 항상 같아. 그러니 나가든 안 나가든 나에겐 똑같은 거야.”
진안 군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어가며 내시를 따돌렸다. 뒤에 있던 내시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저 말씀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지?”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낭자는 요즘 어떻게 지내려나 모르겠군. 전하와 같은 마음이려나?”
* * *
“아씨, 이건 혼수 목록이고, 이건 점포와 농토 문서입니다.”
조 집사가 문서 몇 개를 정교랑 앞으로 내밀었다.
“노야께서 이것들이 쓰임새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셔서, 여기 올 때 한꺼번에 가져왔습니다.”
정교랑은 고개만 끄덕이고 문서들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곧 내가 시집을 가게 될 테니, 다 거둬들이게.”
정교랑이 말했다.
역시, 대놓고 깔끔하게 빼앗아 오시려는 거였어. 아씨께서 이렇게 빨리 혼수에 손을 뻗으실 줄은 몰랐네. 아씨의 지난 행보를 보면, 돈에 연연하시는 분도 아닌 것 같은데. 정씨 가문이 아씨의 화를 돋워서 그런 건가.
반근 말로는 아씨의 기분이 좋지 않다던데, 왜 안 좋으신 거지?
조 집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여인의 마음이란 본디 알기 힘든 것인데, 아씨의 마음은 오죽할까. 정씨 가문은 하필 아씨가 기분이 안 좋으실 때 그 난리를 피우다니, 아주 제대로 당하겠군.
찾아가서 대놓고 달라고 한들 곱게 내어 줄 리는 없겠지. 뭐, 크게 걱정되지는 않아. 아씨가 무기를 쥐어 드셨으니, 절대 빈손으로 물러나진 않을 터.
“예, 알겠습니다.”
조 집사가 몸을 낮춰 예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