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76
교랑의경 376화
그 말에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눈앞에 있는 여인의 표정은 늘 한결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고, 재회했을 때도 놀랍거나 반가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며, 저렇게 된 아이를 보고도 혐오스러워하거나 동정하지 않았다.
하긴, 낭자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뒤로 두 걸음 물러난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바라봤다.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죽을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거.”
진안 군왕은 심호흡을 했다.
“그럼 진씨 가문의 십삼공자는요? 거기도 죽진 않았는데 고쳤잖습니까.”
“그 사람은 달라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네. 그렇겠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도 따지고 보면 죽을 사람이었죠. 낭자 때문에 분통이 터져 초주검이 됐었으니.”
진안 군왕이 웃으며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육가아도 그렇게 고쳐 주십시오. 놀라서 까무러치게 하든, 아니면 다른 수를 쓰든 해서 죽게 만들어 놓고······.”
진안 군왕의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정교랑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개 좀 그만 흔들어요!”
진안 군왕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그는 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진안 군왕의 고함에 마당 분위기는 다시 경직됐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정교랑이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은 그런 정교랑의 모습을 보며 분노하면서도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진 공자는 경왕 전하와 달라요.”
정교랑은 땅바닥에 누운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곧 잠이 들려는 것 같았다.
“경왕 전하는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 없다? 예전의 아씨처럼······.
반근은 놀라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진 공자에겐 마음이 있었어요. 자신에게 병이 있는 걸 알았죠. 간절히 바라는 게 있고, 두려움도 있고, 원한도 있었어요. 크게 슬퍼하기도 하고 크게 기뻐하기도 하며, 감정의 기복이 컸죠. 진 공자의 병은 다리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 있었어요. 마음의 병은 죽을병이니, 내가 고쳐 줄 수 있죠.”
정교랑은 아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우님은 지금 마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아우님은 자신한테 병이 있다는 것도 모르죠. 당신 말처럼, 이제는 당신의 육가아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아우님은 자신이 누군지 몰라요. 자신이 누구든 상관없죠. 그저 자신일 뿐이니까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알거나 느끼는 것도 없고, 욕망이나 바람도 없고, 기쁨이나 공포도 없어요. 그러니까 아우님한텐 병이 없는 거예요. 죽을병이란 건 더더욱 어불성설이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병에 걸린 겁니다, 병에. 어서 병이라고 말해요, 병이라고.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표했다.
“그러니까 전하, 아우님은 죽을병이 아니에요. 전 못 고쳐요.”
마당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이전의 침묵과는 다른 침묵이었다. 이번에는 분노도, 숨 막히는 압박도 없이,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한 침묵이었다.
“그렇군요. 오(吾), 잘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찰나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천천히 울려 퍼졌다.
오(吾)는 존귀한 황실 자제들이 스스로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었다.
반근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몸을 숙이고 손을 뻗어 바닥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육가아, 땅바닥에서 자면 안 돼. 차갑잖아.”
진안 군왕은 아이를 품에 안고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형이 데려다줄게. 마차에서 자.”
진안 군왕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여기 머물지 않고 떠나겠다는 뜻이었다. 반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정교랑을 힐끔 쳐다봤다.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대문 근처로 간 진안 군왕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정방.”
이 이름 역시 누군가가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반근은 미처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진안 군왕이 돌아섰다. 겨울날 밝고 환한 정오의 햇살 아래에 선 소년의 날카로운 얼굴에선 심연처럼 깊고 그윽한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못 고친다고 했죠? 정말 못 고치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 때문에 못 고치는 겁니까?”
못 고친다고 했죠? 정말 못 고치는 겁니까? 아니면 원칙 때문에 못 고치는 겁니까?
머리를 굴릴 줄 모르고 말뜻도 잘 못 알아듣는 반근조차 그 말의 의미는 대번에 이해했다. 반근은 전에도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소년은 아씨에게 늑대 떼를 유인한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사실 그때는 그 말이 어디가 이상한지 의식하지 못했다. 똑똑한 반근 언니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며 놀라고, 똑똑한 반근 언니가 그 별 뜻 없어 보이는 질문에 숨은 위험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이해했다.
이번에도, 저 소년은 아씨를 의심하는 걸까? 아씨께서 일부러 병을 고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화를 내려는 걸까?
반근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원칙은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에 따라 결정하는 거예요.”
정교랑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원칙은 다른 이를 위해 정하는 게 아니고,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 정하는 것도 아니에요. 자신을 위한 거죠. 자신에게 말하고 일깨워 주기 위한 거예요. 얼마나 큰 그릇에 얼마만큼의 밥을 먹어야 할지.”
반근은 다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믿을까? 지난번에 아씨의 말씀을 믿었던 것처럼.
“정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당신도 전에 바보였다면서요? 당신도 전에 이러지 않았어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무엇을 알거나 느끼는 것도 없고, 욕망이나 바람도 없고, 기쁨이나 공포도 없이 살았지만, 지금은 나았잖아요.”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도 이렇게 바보였다면서요? 이렇게 더럽고 추하고 아둔해서, 남들한테 미움을 받았지만 다 나았잖아요? 당신은 나았으면서, 왜 이 아이는 못 고친다는 거죠? 당신은 고쳤잖아요.”
반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놀랍고 두려운 눈빛이었다.
나았으면 나은 거지, 안 좋았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씨 본인조차도 잊은 과거인데, 그 얘기를 꺼내며 따져 묻다니.
정교랑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정교랑은 낫지 않았다. 병이 나은 건 정교랑이 아니라 정방이었다. 바보 정교랑은 이미 죽었으니까.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힐끔 보고, 말없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결국 안 믿는 거구나.
반근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차츰 멀어지는 소년의 모습을, 문을 나가 시야에서 사라진 소년의 모습을 바라봤다.
“관주님, 관주님.”
도동들이 달려오며 손 관주를 불렀다.
손 관주는 제자들에게 사야 할 가구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정 낭자의 거처를 손님에게 내주었으니, 정 낭자는 당분간 산 아래의 현묘관에서 지낼 것이다. 양쪽 다 조금도 소홀히 대할 수 없기에 제대로 준비해야 했다.
말이 끊긴 손 관주가 언짢아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한참 바쁜데.”
“관주님, 정 아씨의 손님이 가셨어요.”
도동들이 말했다.
갔다고? 묵지도 않고 가 버리다니?
손 관주가 놀라 일어섰다.
“관주님, 저기 보세요.”
얼른 밖으로 나가 산문 아래에 서서 도동들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벌써 산길을 내려가는 무리가 있었다. 이어 마차가 보이고, 말에 탄 호위들이 주변을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 두봉을 걸친 소년 공자는 아이를 끌어안고 마차에 탔다. 이어 호령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세밑이 다가오긴 했지만, 산기슭에는 여전히 광주리를 들고 나와 노점 장사를 하는 촌민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공자의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어디서 향불을 피우러 온 이들이더냐?”
촌민 하나가 현묘관 문 앞에 있는 도동을 붙잡고 물었다.
“향불 피우러 온 거 아니에요.”
도동이 대답했다.
“그럼 뭐 하러 왔는데?”
촌민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저도 몰라요.”
도동이 고개를 돌려 다른 도동에게 물었다.
“여기서 묵는다지 않았어? 왜 그냥 가지?”
다른 도동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알겠어.”
도동은 고개를 돌려 아직 옆에 서 있던 촌민을 보며 놀라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어느 댁 분이세요? 왜 처음 보는 거 같죠?”
촌민은 하하 웃더니 뒤쪽을 가리키고는 걸음을 옮겼다.
“곽(郭)씨 가문이요? 곽씨 집성촌은 여기서 엄청 먼데, 여기까지 장사하러 나오셨어요?”
도동이 고개를 내저었다.
“곧 새해인데······.”
촌민은 어느새 광주리를 메고 자리를 떴다. 산길을 돌자 멀지 않은 곳에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촌민이 휘장을 들고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산길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인근 마을에서 이따금 폭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때 산길 옆에 있는 숲에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길을 지나는 이가 있었다면 분명 소스라치게 놀랐을 터였다.
숲에서 튀어나온 이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옷을 털고 말없이 고개를 돌려 마차가 떠나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산길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근처 산비탈에서 누군가가 일어섰다. 그는 뒤돌아 현묘관 방향으로 달려갔다.
“여럿은 아니고 일고여덟 명 정도였어.”
조 집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반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우릴 감시하는 사람이 있단 거예요? 무슨 생각일까요? 대체 누군데요?”
반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 집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됐든, 내 생각에 우리 사람은 아닐 것 같다.”
조 집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조금 늦게 출발하시지요.”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우리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심하는 걸 보면 원칙을 지키는 자들이야. 원칙만 지킨다면, 아무 일 없어.”
아씨는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야. 아씨께서 아무 일 없다고 하셨으니 아무 일 없겠지.
조 집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씨, 점포 두 곳은 이미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농토 두 곳도 곧 인수를 마칠 거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을 예정이었던 손님이 가 버렸으니, 정교랑은 자연히 태평관에 묵게 됐다. 손 관주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정교랑 옆에서 웃고 떠들었다. 물론 떠드는 쪽은 대부분 손 관주였지만.
어둠이 내리자 도동 둘이 태평관의 등롱에 불을 밝혔다. 안에서 손 관주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이라니까요. 글쎄 그 시주님이 정말 믿으시더라고요.”
“도사님, 정말요?”
밖에 있던 도동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혀를 내둘렀다.
“관주님께서 저리 말이 많으셨다니.”
도동 하나가 웃으며 소곤거렸다.
“다들 우리 관주님은 선인이라 말을 아끼신다지 않았어? 관주님께 한마디 듣고 싶어 돈도 척척 내던데.”
다른 도동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둘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밤의 어둠도 마차의 움직임을 막지는 못했다. 세밑이 다가오면서 큰길에서도 희미하게 폭죽 소리가 들렸다. 폭죽 소리는 쓸쓸한 겨울밤에 따스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품에 안긴 아이는 아아 하는 소리를 내며 양팔을 휘젓고,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치우려 했다.
진안 군왕은 이불을 끌어당기고 한쪽 옆에 놓아둔 수건을 들어 아이의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준 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고는 다시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봤다.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져 버렸다.
이황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충격에서부터 태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의 공포와 절망, 어쩌다가 일어난 일인지 떠올렸을 때의 분노와 애타는 심정까지.
이황자를 데리고 의원을 찾아가기로 했을 때의 흥분에서부터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릴 때의 기대, 이황자가 나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을 때의 기쁨과 환희, 그 여인을 봤을 때의 안도감까지.
그리고 오늘 못 고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온몸의 피가 식는 느낌까지.
불과 달포 만에 진안 군왕은 한평생 겪을 심정을 다 겪고 난 기분이 들었다. 평생을 다 산 느낌이었다.
진안 군왕은 천천히 한숨을 토하고, 눈을 감으며 마차에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