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77
교랑의경 377화
이건 꿈일 거야. 눈을 뜨고 날이 밝을 때면, 난 아직 그 작은 도관에 있겠지. 몸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고 문을 열어 주면, 그 여인이 들어와서 육가아에게 약을 먹일 거야. 아, 아니면 육가아에게 침을 놓거나 뜸을 떠 줄 수도 있고. 육가아는 치료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고 떼를 쓸 거야. 듣자니 그 여인은 병을 치료할 때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던데, 그럼 어쩌지?
진안 군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좀 곤란한데. 그 여인은 단정하고 현숙해 보이지만, 일 처리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잖아. 아예 육가아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켜 버릴지도 모르지.
진안 군왕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마차가 흔들리자 품속에 있던 아이가 옹알이하듯 중얼거렸다. 그 바람에 진안 군왕은 현실로 돌아왔다.
고급 마차라고는 하나 밤바람이 새어드는 건 막을 수 없었다. 화로에 숯을 피워 놨지만, 겨울밤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차 밖에서는 말과 마차 소리, 시종들의 숨소리, 이따금 나지막이 떠드는 소리, 허공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차갑고 절망적인 현실.
육가아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의 육가아는 이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품속에 안겨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못 돌아오는구나. 이젠 없어, 없다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백종, 너무 괴로워하지 마.
진안 군왕은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며, 가만히 스스로를 위로했다.
새벽빛이 어슴푸레 밝아올 무렵, 손 관주가 태평관의 문을 두드렸다.
“관주님, 이렇게 일찍 또 오셨어요?”
도동이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또는 뭐가 또야.”
“내려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으면서.”
도동이 중얼거렸다. 손 관주는 도동을 내버려 둔 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침은 준비했고? 아씨는 음식에 까다로운 분이니 정성 들여 준비해라. 조심조심 움직이고. 시끄럽게 굴다가 아씨 깨실라.”
손 관주는 웃으며 안쪽을 쳐다봤다.
“아씨는 벌써 일어나서 방금 나가셨어요.”
도동의 말에 손 관주는 멈칫했다.
“벌써?”
겨울인지라 산의 분위기는 더욱 어둡고 쓸쓸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교랑은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손에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산길에 떨어져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수시로 치우며 걸었다. 반근은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추워서인지 걷는 게 힘들어서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아씨, 그때도 반근 언니랑 이렇게 산을 오르셨어요?”
“응.”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장 노태야를 만난 게 어디쯤이에요?”
반근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이었어.”
정교랑이 손에 든 나뭇가지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고개를 든 반근은 까치발을 들고 올려다보며 당시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좋았겠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각자 좋은 게 있는 거고, 가는 길에 따라 보이는 풍경도 다른 법이야. 아쉬워할 것 없어.”
정교랑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뒤따라갔다. 그러자 정교랑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반근을 돌아봤다.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정교랑의 물음에 도리어 반근이 멈칫했다.
“아씨, 무엇을요?”
정교랑이 웃었다.
“예전의 저 작은 도관에서 말이야.”
정교랑이 방금 전에 나온 태평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한테 쫓겨난 아이가 둘 있었어. 반근은 가엾어하는 눈치였는데······.”
“아씨.”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자르며 억울한 듯 말했다.
“가엾은 건 아씨인데, 뭐하러 남을 가엾어해요? 왜 남들은 아씨를 가엾어하지 않고요? 아씨께서 그 사람들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어요? 남들이 슬프고 괴로워한다고, 아씨도 같이 슬퍼하고 괴로워해야 해요? 그렇게 안 하면 아씨는 매정하고 모진 사람이고요? 남들한테 병이 있다고 아씨가 무조건 고쳐 줘야 해요? 고쳐 주지 않거나 못 고치면 아씨의 죄가 되고요? 남들은 아씨를 가엾어하지 않는데, 왜 아씨만 남들을 가엾어해야 해요? 아씨가 말씀을 하지 않아서요? 아씨가 눈물을 흘리지 않아서요? 그럼 그래야 하는 거예요?”
반근은 얼굴을 가리고 대성통곡을 했다. 정교랑은 멈칫하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난 그냥 해 본 말인데······.”
정교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반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반근은 숨을 헐떡이며 흐느껴 울었다.
“아씨, 전 괜찮아요. 그냥 눈물이 좀 나와서요. 우리 얼른 걸어요. 이러다 늦겠어요”
반근이 울며 말했다. 정교랑은 반근을 보며 피식 웃고는, 더 말하지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마 걷기도 전에 앞쪽에서 갑자기 호령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반근이 놀라 걸음을 멈추고, 긴장하며 바라봤다.
정교랑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했지만, 조 집사 등은 그래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교랑이 산책을 나올 때면, 한발 앞서가며 사방으로 흩어져 정교랑을 지켰다.
갑자기 경고 신호가 들리다니, 무슨 위험이라도 있나?
하지만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돌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자님이었군요!”
반근이 놀라 소리쳤다. 자욱한 새벽 안개 속에 앉아 있던 이가 두모를 벗자 소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나다, 이런 우연이.”
우연이라고? 왜 또 돌아온 거야? 여전히 포기를 못 한 건가?
반근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보러 내려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올라올 줄은 몰랐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소년 쪽으로 다가가자 시종들이 눈치 빠르게 물러났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봐요.”
진안 군왕이 물러나는 시종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말도 필요 없네요. 다들 낭자를 믿고 따르는 게 보여요.”
정교랑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봤다.
“하지만 낭자가 그렇게 많이 말했는데도, 난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이거랑 그걸 어떻게 비교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보며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낭자한테 화를 내면 안 됐습니다. 그 애한테 일이 생긴 건 낭자 때문이 아니잖아요. 그 애를 못 고치는 것도 낭자 때문이 아니고요. 전부 낭자와 무관한 일인데, 낭자를 원망했습니다. 원망해야 할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낭자를 원망했어요. 힘 앞에 굴복하고 애먼 사람에게 화풀이했죠.”
세상에.
반근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또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화 안 났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알아요.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에요. 낭자한테 사과한다기보다는 내 맘 편하자고 하는 말이죠.”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의 팔을 가볍게 두어 번 토닥여 주었다.
괴로워하지 마요.
진안 군왕도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괴로워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그녀는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안 군왕이 목함 하나를 내밀었다.
“낭자를 위해 준비한 새해 선물이에요.”
진안 군왕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인편에 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생겨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러다 마침 직접 나오게 됐죠. 어제 깜빡해서······ 오늘 가져왔어요. 이걸 줬으니 헛걸음한 건 아닌 셈이네요.”
선물이라고?
반근은 저도 모르게 정교랑의 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묶어 올린 머리에는 은빗 하나만이 꽂혀 있었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받았다. 반근이 한 발 앞으로 나갔지만, 정교랑은 반근에게 건네지 않고 직접 열어 보았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빼며 무슨 선물인지 들여다봤다. 목함 안에는 비녀가 하나 들어 있었다. 금이나 은으로 된 건 아니었고, 보석 장식도 없었다. 놀랍게도 꽃과 나무를 조각한 나무 비녀만이 하나 들어 있었다. 게다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주신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어머니께서 주신 게 아니라, 내가 어머니 머리에서 멋대로 빼낸 거예요.”
어머니, 어머니.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화려하게 단장한 여인의 옷자락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졌다.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저만 두고 가지 마세요.
백종, 착하지.
여인은 몸을 낮춰 어린아이를 토닥여 준 다음 안아 올리더니 옆에 있던 아낙의 품으로 넘겨주었다.
어머니, 어머니.
조금 아쉬운 기색이긴 했지만, 여인은 결국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떼어냈다.
어머니, 어머니.
아이는 여인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이가 여인의 머리에서 비녀를 빼냈다. 여인의 머리가 풀어졌지만, 여인의 발걸음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이는 비녀를 손에 꼭 쥔 채, 점점 멀어지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진 여인을 쳐다보았다.
“선물을 줄 땐, 가장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걸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반근의 시선이 다시 정교랑의 머리로 향했다. 정교랑은 손을 들어 비녀를 머리에 꽂은 다음, 목함을 반근에게 건넸다.
“별로 예쁘진 않네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여인의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머리칼은 칠흑처럼 새까매 장신구를 꽂지 않아도 아름다웠다.
“쓰기에 편하면 그만이죠.”
정교랑이 다시금 몸을 낮춰 예를 표하자, 진안 군왕이 답례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안 군왕이 작별을 고하려는데,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좀 걸으려고요. 같이 걸을래요?”
좀 걷자고?
멈칫했던 진안 군왕은 뭐가 할 이야기가 있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먼저 걸음을 옮기자 진안 군왕이 따라갔다.
조용한 산길에 발걸음 소리가 더해졌다. 진안 군왕은 앞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은 두봉을 휘날리며 빠르고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수시로 길을 치워 가면서.
진안 군왕의 예상과 달리 한참을 걸었는데도 말이 없었다. 정말 걷기만 했다. 침묵 속에서 걷기만.
“자주 걸어요?”
진안 군왕이 침묵을 깨고 물었다.
“예전엔 몸이 안 좋았거든요. 많이 걷는 게 회복에 좋아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전에는 바보였으니 말도, 행동도 불편했겠지. 스스로 부단히 노력한 끝에 이렇게 호전된 거구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에는······.”
정교랑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기분이 안 좋아서 이렇게 걸어요. 마음이 좀 편해지거든요.”
기분이 안 좋을 때 걸으면 마음이 편해진다고? 그래서 나한테 같이 걷자고 한 건가? 이 여인이 남을 위로할 때도 있네?
진안 군왕은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는, 얼른 뒤따라갔다.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발걸음 소리만이 산길에 울려 퍼졌다. 이따금 숲속에서 새나 짐승의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육가아를 고칠 수 없다는 건, 사실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고, 그 지푸라기가 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정신 차려, 정신.
진안 군왕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반근은 손을 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 사람은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반근이 일부러 뒤처진 건 아니었다. 둘의 걸음이 너무 빨라 따라갈 수 없었을 뿐이었다.
진안 군왕은 점점 빨리 걸었다. 원래는 정교랑이 앞서 걷고 있었지만, 진안 군왕은 양보도 잊은 채 정교랑을 앞질러 갔다. 정교랑도 이에 뒤질세라 속도를 높이다 보니 좁은 산길에서 나란히 걷는 경우가 수시로 생겼다.
반근은 위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종들이 앞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씨께서 누군가와 함께 있으니 혼자만 낙오될 수 없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쫓아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