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03
교랑의경 403화
정교랑은 웃고 있는 정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평이 손을 들어 정교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가 강해진다 해도, 그건 내 일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내 후손들과는 더욱 관련이 없지요. 내 후손들이 나중에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일이고, 그들이 넘어야 할 산이에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당신과 관련이 없는데요, 어떻게! 수수방관하겠다는 뜻인가요? 후손들을 외면하겠다고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멸족을 당하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우리들의 운명이라는 거예요? 이대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거냐고요!
“우리는 이대로 단념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그녀는 정평이 했던 말을 떠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럼 더 강해져야죠. 아직은 결론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되지 않은 거죠. 자꾸 남한테 강해지라고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아니라고? 아직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요? 아니라면 내가 강해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죠?”
정교랑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물었다.
“이젠 그들이 없는데.”
정교랑은 정평의 옷자락을 쥔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읊조렸다.
“낭자가 있잖아요.”
정평이 정교랑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내가? 내가 아직 있다고?
“하지만, 나, 나는, 나는 내가 아닌걸요.”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어째서 자신이 아니라는 거예요?”
정평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영원히 자기 자신인 거예요. 영원히 존재하는 거죠. 낭자가 살아있고, 마지막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끝이 아닌 겁니다. 아직 기회가 있으니, 어서 가요. 어서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어! 아직 기회가 있어! 모든 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정교랑은 경악하며 깨달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귓가에서는 거대한 진동 소리가 울렸다.
난 아직 정방이야. 난 아직 정방이라고. 양씨 가문과의 일은 끝나지 않았어.
난 아직 죽지 않았고, 아직 기회가 남아 있어. 우리 일족을 위해 복수할 기회가 남아 있어.
정교랑이 갑자기 말을 잃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평은 그 틈을 타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역시 어린애라 그런지 달래기가 쉽네. 듣고 싶은 대로 말해 주기만 하면 되니까.
“저놈이!”
조 집사가 정평의 뒤를 몇 걸음 쫓아갔지만, 날쌔게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 조 집사는 고개를 돌리고 제자리에 서서, 넋이 나간 채로 서 있는 정교랑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또 뭐에 홀린 건가?
갑자기 골목 안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 일행을 발견한 사환이 더욱 빠르게 뛰어와 정교랑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아씨, 서북에서 온 서신입니다.”
반근이 서신을 받아와 봉투를 뜯어 정교랑에게 건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한 정교랑은 서신을 읽으며 서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된 일이었다니.”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아씨, 무슨 일이예요?”
반근이 물었다. 정교랑은 대답 대신 서신을 접은 뒤 잠시 앞쪽을 응시했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니! 역시 강해져야만 해.
“떠날 채비를 해. 경성으로 가야겠다.”
경성?
놀란 반근이 고개를 돌려 조 집사를 쳐다보자, 조 집사도 똑같이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네.
“지금요?”
반근이 물었다.
“지금.”
정교랑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저택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6월, 서북의 새벽은 서늘했다.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용곡성 남쪽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치열했던 이번 전투가 끝나고, 많은 사람이 진급하고 포상을 받았다. 특히, 관리 신분이 아니었던 사람 중에서 이번 기회에 품계를 얻은 경우가 많았다. 품계를 처음 얻은 자들은 족보를 호부에 올려 조사를 받아야 하므로 서북을 떠나 경성에 다녀와야 했다.
진급한 자 중에서는 문관도 있고 무관도 있었으며, 나이가 어린 이도 있고 연로한 이도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품계를 얻는다는 건 과거 시험에 급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예의상 배웅하러 나온 관리들 외에도, 가족과 사돈의 팔촌까지 다 남쪽 성문 앞으로 나와 이들의 경성행을 배웅했다.
경성으로 가는 대열에는 주육낭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전투 덕분에 주육낭도 두 단계 진급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품계가 없던 이가 아니므로 호부에 족보를 제출하러 경성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관청에서 문서 전달을 핑계로 주육낭을 잠시 경성으로 보낸 것이다.
“밖에 나온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집이 그립지?”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주육낭을 둘러싸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주육낭이 대답했다.
“그래. 과연 우리 주씨 가문의 사내대장부야.”
웃어른들이 커다란 손으로 주육낭의 머리와 어깨를 탁탁 쳤다.
“어이. 그러다가 젊은이 어깨가 남아나질 않겠어. 아무리 젊고 튼튼한 몸이 부럽다고 해도, 그렇게 막 치면 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웃어른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대인,”
자색 장포를 입고 있던 주 감찰사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애지중지한다는 그 육낭이 바로 이 아이요?”
주 감찰이 신체 건장하고 탄탄한 체격을 가진 소년을 쳐다보며 물었다.
“자네는 올해 몇 살이지?”
“열여덟입니다.”
주육낭이 턱을 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주 소처럼 힘이 불끈불끈하구먼.”
주 감찰이 웃으면서 주육낭의 어깨를 세게 두어 번 쳤다.
“대인, 저희한테 뭐라고 하시기 전에, 대인께서도 살살 치셔야겠습니다.”
주씨 가문의 웃어른들이 농담을 건넸다. 주 감찰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주 감찰 옆에 서 있던 조성이 주육낭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그 일은, 정말 미안하게 됐네.”
주육낭이 서둘러 조성을 향해 예를 표했다.
“대인, 당치 않으십니다. 대인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소인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주 대인께도 말씀은 드렸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조성이 말끝을 흐리면서 다른 한쪽을 쳐다보았다. 주육낭이 조성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강문원의 모습이 보였다.
“일단은 경성으로 돌아가게. 잠시 피해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
조성이 주육낭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을 덧붙였다.
“자네는 아직 어리지 않나. 급할 거 없네.”
간결하게 인사치레를 끝낸 장수와 관리들은 성안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강 부총관, 강 부총관.”
사람들 사이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몇 관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강문원의 눈치를 살폈다.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강문원은 억지 미소를 쥐어 짜냈다.
서북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강문원을 강 총관이라고 불렀지만, 유독 몇 사람만은 끈질기게 그를 강 부총관이라고 불렀다. 주 감찰사가 그중 한 명이었다.
“주 대인.”
강문원이 손을 들며 인사했다.
“강 부총관, 같이 가시지요.”
주 감찰은 웃으면서 강문원의 팔을 자기 쪽으로 끌었다.
어찌 저렇게 주둥이를 열 때마다 부총관, 부총관 거리는 건지 원. 내가 부총관이라는 걸 잊을까 봐 일부러 저러는 거야 뭐야?
강문원은 주 감찰이 몹시 아니꼬웠지만,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다른 관리들을 거느리면서 함께 성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관리와 장수들이 자리를 뜨자, 경성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도 하나둘 대열에 합류하며 가족들과 고별했다. 가족들은 눈물을 훔치며 배웅하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남쪽 성문 앞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직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던 주육낭은 성안을 두어 번 돌아보았다.
“육낭, 아직 기다려야 할 사람이라도 있느냐?”
누군가가 물었다. 주육낭이 고개를 저으면서 시선을 거두었다.
“아닙니다, 형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주육낭이 몸을 휙 날려 말에 올라타자, 사환과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말에 올라타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사람이 타지 않은 말에는 서북 특산물이 잔뜩 실려 있었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성안을 힐끗 돌아보고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움직였다.
정오가 다 되어갈 때쯤, 남쪽 성문 앞은 새벽녘부터 배웅하러 나왔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평소처럼 시끌벅적해졌다.
마차 두 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성문 밖으로 나왔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시종 네다섯 명이 조촐하게 이끄는 마차 두 대는 특별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마차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탄 채 그들을 배웅했다.
“형님, 나도 같이 가게 해 주시오.”
서사근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야. 이쪽에 사람이 없으면 안 돼. 집에도 사람이 없으면 안 되고. 나중에 누가 올지도 모르니까 잘 지키고 있어.”
범강림이 마차 안에서 말했다. 누구보다도 범강림의 마음을 잘 알고 있던 서사근은 더 이상 토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서사근은 시종들을 한 번 둘러보고, 짐이 실려 있는 마차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범강림의 아내가 마차 안에서 아이를 안은 채 말했다.
“관구 어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꼭 경성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시종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범강림을 호위하는 시종들은 서사근이 직접 엄선한 병졸들이었다. 충성심이 있고, 믿음직스러운 자들만 골라 품삯을 넉넉히 주고 범강림의 호위를 맡겼다.
“그래. 수고들 하거라.”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넷째야, 그만 돌아가. 우린 이제 가 볼게.”
범강림이 말했다.
서사근은 돌아가라는 범강림의 말을 한사코 무시한 채 십 리 밖까지 그를 배웅했다. 끝내 멈춰선 서사근은 범강림이 탄 마차가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그들 일행을 눈으로 배웅했다.
“범강림은 뭐 하러 가는 거래?”
방 지채는 이번이 첫 진급이 아니라서 경성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는 곧장 자신의 새로운 임지로 가서 지채직에 부임했다.
그는 용곡성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거기에 남아 있는 몇 사람들을 예의주시했다. 그중 한 명이 범강림이다. 그런데 자신이 새로운 임지로 떠나자마자 범강림이 온 가족을 데리고 용곡성을 떠났다는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뭐라고?”
방 지채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놈도 참 웃기는 놈이야. 사람이 죽은 지 두 달이나 지났는데, 이제야 고향으로 데려갈 생각을 하다니.”
아무렴 상관없어. 그놈이 떠난다면 더 좋고, 이참에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더더욱 좋지. 그렇게 된다면 내 지채직이 위협받을 일도 없으니까.
6월의 날씨는 천덕꾸러기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티끌 하나 없이 맑던 하늘에 돌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시끌벅적한 저잣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비를 피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오 관리인이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다. 그는 거세게 내리는 굵은 빗방울을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고. 아씨께서 비를 맞지는 않으시려나?”
한 손으로 쉴 틈 없이 산가지로 셈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장부를 넘기던 시녀가 고개도 들지 않고 피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아씨께서는 앞날만 잘 내다보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랑도 무척 가까우시잖아요. 하느님이 비를 내리기 전에 분명히 아씨께 귀띔하셨을 거예요.”
시녀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오 관리인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오랜만에 보는 시녀의 생기발랄한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