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2
교랑의경 42화
“불을 끄러 왔어요. 안에 계세요? 무사한 거예요?”
여인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문밖에서 전해졌다. 문 안에서는 불타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부님, 다 타 죽은 거 아닐까요?”
도롱이에 삿갓을 쓴 여도사들이 대야며 나무통, 빗자루 등을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관주는 산문에 이어 문 안쪽으로 보이는 화염과 연기를 차례로 바라봤다. 소현묘관 관주의 행실이 바르지 않다고는 하나 세상 만물엔 생명이 있는 법인데 어려움에 처한 걸 뻔히 알고도 돕지 않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문을 부숴라.”
관주의 말에 여도사들은 일제히 문 쪽으로 달려들었다.
“내가 구령을 붙일게.”
관주가 옆에 서서 말했다.
“하나, 둘, 셋.”
여도사들은 문에 몸을 부딪칠 태세를 취하고 얍 기합을 넣었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여도사들의 기합 소리가 놀라움으로 바뀌면서 여도사들은 문 안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인지 문을 연 아이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여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어! 그 여인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이제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그 여인이 죽어 버리다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이는 점점 더 큰 소리로 웃더니 급기야 배를 잡고 쪼그려 앉아 웃어댔다. 이리저리 포개진 채 비를 맞고 있던 여도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도관이 벼락을 맞아 불탔는데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너무 놀라서 정신이 나갔나?
몸종은 얇은 이불로 정교랑을 꽁꽁 싸매 주고 곧 뜨거운 생강탕을 내왔다. 두 사람 모두 천천히 몇 모금 마신 후에야 안색이 돌아왔다.
“아씨, 이따가 뜨거운 물을 끓여서 더 우릴게요.”
놀란 탓인지 추운 탓인지 알 수 없지만 몸종은 이를 덜덜 떨며 말했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몸종이 얼른 일어나 밖을 내다보자,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여도사가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시주님.”
관주가 예를 표하자 몸종도 얼른 답례를 했다.
“정 관주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불길은 잡혔고요. 저기, 그 정 관주 외에, 그러니까, 다른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여도사가 오밤중에 사내와 함께 죽어 있었다는 말은 도무지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 그럼, 어쩌면 좋을까요?”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서 이불을 싸매고 멍하니 있는 소녀와 넋이 나간 채 떨고 있는 이 어린 몸종을 보고 있노라니 관주는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럼 정씨 댁 노야께서 처리하게 하죠.”
몸종은 무언가를 퍼뜩 깨달은 듯 아, 아, 소리를 내더니 정교랑을 돌아봤다. 아씨는 너무 지치셨어. 돌아온 후 지금껏 한마디도 안 하셨잖아. 관주의 말대로 해도 될까?
정교랑이 관주를 보며 입을 열었다.
“도사님.”
문밖에 있던 관주는 내심 놀랐다. 이곳 소현묘관에 정씨 가문 바보가 산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바보가 말도 할 줄 알았다니. 게다가 목소리에서도 바보스러운 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관주가 얼른 예를 표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도사님께서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관주는 멈칫했다.
“네. 염려 마세요, 아씨. 제가 정씨 가문에 알려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벼락이 내리치는 걸 봤으면 정씨 가문에 알리는 게 인지상정이니까요.”
자신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소현묘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그 안에서 사내가 죽은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는 뜻이었다. 정씨 가문의 체면과 명성을 지켜 주겠다는 의도였다.
“아닙니다. 관주님께서는 본 대로 말씀하세요. 관주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잘 알지만 굳이 숨기실 것 없어요.”
관주는 정교랑을 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보? 바보랬는데?
“도사님, 소현묘관이 갑자기 벼락을 맞아 불에 탔으니 아무래도 대현묘관에서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이 낭자가 바보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관주 본인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그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자 관주는 흥분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관주는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아씨의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간밤에 산에서는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지만 성 안은 비가 그 정도로 오지는 않았다. 폭우가 내리긴 했지만 금세 물러갔고 강주성의 새벽은 여느 때처럼 활기찬 모습이었다. 말 몇 마리가 시장을 가로질러 질주하여 평화롭던 거리를 소란스럽게 만들면서 여기저기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말이다.
대노야는 객청에서 한참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집사가 문밖에서 허둥지둥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떠하더냐?”
대노야가 다급히 묻자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대노야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가문에 먹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가문의 불행이로다!”
대노야는 내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대부인은 몸종을 물린 후 직접 차를 올렸다.
“아무도 모르니 별일 없을 거예요.”
대부인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못 참겠는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랬대요?”
대노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봤더니 근방 마을에 사는 사내였소. 그 집 여인이 남편을 찾고 있다더군. 집사가 은자를 쥐여주면서 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했지. 아직 애도 없겠다, 싱글벙글하며 돈을 받고는 논밭을 팔아 개가했다고 하오.”
대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를 수 있으면 최대한 누르는 게 좋죠.”
대부인은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
“이번에 손 관주한테 큰 신세를 졌네요.”
대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가 아직 거기 있는데 이런 일이 났으니, 나 원. 데려와야 하나?”
대노야의 물음에 대부인은 침묵을 지켰다.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도리상 데려오는 게 마땅하지만…….
현묘관 여도사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집 안에 금세 퍼졌다. 정육랑도 사건의 경위를 알 정도였다.
“세상에, 잘 있다가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어?”
정칠랑은 고개를 돌려 밖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중을 드는 유모를 부채로 가리키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멈이 그랬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요괴 같은 놈들이 벼락을 맞는 거라고. 세상에, 그럼 그 관주가 산에 사는 불여우고 요괴인가?”
하여간 아직 애라니까. 방에 있는 자매들은 할 말을 잃은 눈빛으로 정칠랑을 쳐다봤다.
“산에선 원래 뇌우가 자주 내려. 그래서 산불도 자주 나잖아. 흔한 일이야.”
정육랑이 말했다.
“그럼 왜 예전엔 벼락도 안 맞고 잘 지내다가, 바보가 가니까 벼락을 맞아?”
정칠랑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더니 돌연 자세를 고쳐 앉으며 뭔가 알아낸 듯 부채를 마구 흔들었다.
“아, 아, 아, 바보네. 그 바보야. 틀림없이 그 바보가 화를 불러들인 거야!”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도 의론이 분분했다.
“그 바보 때문이야.”
“하여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다 운수가 사나웠어. 걔가 집에 들어온 후부터 따져 봐. 재수 없는 일을 당한 사람이 몇이나 되나.”
“대부인과 이부인께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했고, 당씨네 일가와 소국네 가족이 모조리 쫓겨난 것도 바보 때문이었어. 셈해 보니 벌써 10명은 족히 되네.”
“그 도관으로 간 지 며칠 만에 멀쩡히 잘 지내던 관주가 벼락에 맞아 죽다니, 쯧쯧쯧.”
조잘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문 뒤에서 들려오자 길을 안내하던 여종은 정색하고 발을 구르며 헛기침을 하여 웃음소리를 쫓았다.
“도사님, 이쪽이에요.”
여종은 뒤에 있는 여도사를 향해 웃음을 짜내며 말했다.
손 관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방금 들은 여종들의 수다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 바보 때문에 벌써 몇 사람이나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단 말이지. 한두 사람도 아니고, 집안의 안주인과 시중을 들던 여종과 몸종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하진 않았을 텐데. 그 바보의 심기를 건드렸겠지.
순간 손 관주는 오싹했다. 그 바보의 심기를 건드려? 그래서 그 여인이, 재수 없게 벼락을 맞아 죽었다?
“도사님.”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손 관주는 자신을 부르는 여종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손 관주는 자신이 벌써 대부인의 방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얼른 예를 표했다.
“관주한테 큰 신세를 졌네요.”
대부인은 일어나라는 손짓과 함께 웃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손 관주는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우리 집 도관이라고는 하나 그곳을 관리하는 문제는 수행하는 분들이 더 잘 알겠지요. 노야와 나는 그 도관을 손 관주에게 맡기고자 합니다.”
대부인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며 계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 짐작은 했지만 직접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확인하니 손 관주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두 분의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손 관주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 세상엔 생각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고 여겼는데 그 요원해 보이던 일이 눈 깜짝할 새에 눈앞에 펼쳐졌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손 관주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산에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여기까진 흔한 일이다. 매년 이맘때면 늘 그랬으니까. 그런데 올해는 하룻밤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현묘관이 벼락을 맞았다. 그래서 제자들과 함께 사람을 구하고 불을 끄러 갔다. 그러다가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빗속에서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여인을 봤고. 그 여인은 자신에게 이제 소현묘관은 대현묘관에서 맡아 줘야겠다고 했다.
그 여인! 손 관주는 오싹한 듯 또다시 몸을 떨었다.
“부인께 말씀드릴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하시지요.”
“소현묘관에서 지내던 아씨께서 많이 놀라신 듯한데 제가 의술을 좀 압니다. 제가 보살펴 드리면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행을 도우면 건강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은데 부인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건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보살이 아닌가. 대부인은 환하게 웃었다. 나무아미타불, 그 바보가 집에 없으니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구나.
대부인은 곧장 대노야한테 알리는 한편 이노야 내외를 불러 관주의 제안을 전했다.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손 관주는 진정한 수도자군. 진중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니 손 관주에게 맡기도록 하자.”
대노야의 말에 이노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도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도관에서 지내면 좋죠.”
“소현묘관의 화재 피해가 심각하다고 하니 수리하도록 돈을 내주시오.”
대노야는 대부인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일을 누구한테 맡길지, 어떻게 수리할지는 전부 손 관주 재량으로 맡기고.”
인부를 부르고 수리를 하다 보면 떡고물도 생기는 법이다. 이번에 손 관주에게 크게 신세를 지기도 했고, 사정을 알고 그 바보를 자발적으로 맡아 주겠다고 나섰으니 대노야로서도 보답을 해야 했다. 그 점엔 다들 이견이 없었다. 대부인은 손 관주에게 알리러 가고 대노야 역시 집사를 시켜 돈을 준비하게 했다. 이노야 내외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네요.”
이부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긴 뭐가?”
이노야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요즘 이노야는 임명을 못 받고 있는 상태였다. 물어보면 윤허한다고 했지만 직첩을 받기 전까지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병주의 그 도관도 벼락을 맞더니 이번에 간 도관이 또 벼락을 맞았잖아요. 정말 뭔가 있는…….”
이부인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있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소!”
이노야가 언짢은 듯 말을 끊었다.
“멀쩡하던 당신까지 무지한 아랫것들이 떠드는 말을 믿다니!”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먼저 가 버리자 이부인은 입을 삐죽거리며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