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39
교랑의경 439화
강주.
추적추적 가을비가 며칠째 그치지 않고 내렸다. 정사낭은 골목 어귀를 서성이며 머뭇거렸다. 바람이나 쐴까 하고 산책을 나와 걷다 보면 늘 누이가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됐다.
이제 누이는 이곳에 없지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에 젖은 청석판에 말발굽이 닿자 다그닥다그닥 하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만 듣고도 누가 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요즘 경성에서는 말편자가 유행한다고 했다. 말발굽에 못질을 하거나 굽쇠를 박아 말발굽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누가 생각해 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강주에서는 돈을 물 쓰듯 쓰는 조 대집사가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하여, 지금은 자기 말의 발굽에 그런 편자를 박으려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만 대장장이가 편자를 제대로 박지 못한 탓에 조 집사가 타는 말과는 달리 편자가 거칠고 조악하게 박혀서, 결국엔 경성에서 말편자 박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을 두엇 불러오기까지 했다.
“사공자님!”
조 집사가 외치는 소리에 정사낭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조 집사, 예는 됐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방수포로 된 우의를 입고 삿갓을 쓴 조 집사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한치의 소홀함도 찾아볼 수 없는 깍듯한 예였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좋은 차를 새로 구했는데, 비도 오고 하니 같이 드시지요.”
예를 마친 조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낙했다.
“누이는 경성에서 잘 지내지?”
“염려 마십시오. 아씨께서는 어디서든 잘 지내실 분이지요.”
“누이가 서찰을 보내오던가?”
“공자님, 저희 아씨는 말수가 적으시잖습니까. 서찰을 쓰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하긴 그렇지.”
두 사람은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대문으로 들어서자 두 여종이 우산을 쓰고 웃으며 나와 맞이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돈은 안 된다니까. 우리 아씨의 윤허가 있어야 한다고.”
조 집사의 말에 두 여종은 쭈뼛거리며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물러났다.
“무슨······.”
정사낭이 물었다.
“이부인께서 돈을 달라십니다. 이노야께서 쓰신다고 하더군요.”
조 집사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느덧 3년이 흘러 이노야의 임기가 다 되었기에 돈을 융통하려는 것이었다.
“공자님, 들어가시지요.”
조 집사는 정사낭의 생각을 끊으려는 듯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못 주겠다고?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
정 이부인이 여종들을 보며 묻자, 여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퉤, 이번엔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고? 기분 좋게 돈 펑펑 쓸 때는 자기네 아씨의 윤허를 받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자기네 아씨는 무슨! 우리 집 아씨지!”
정 이부인은 분을 참지 못하며 탁자에 있는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다가 풉 하고 내뿜었다.
“무슨 차 맛이 이래! 이런 걸 사람 먹으라고 준단 말이냐?”
여종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가세가 예전만 못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을······.
“분가할 수도 없는데 이리 설움만 당하고 있으니, 원.”
정 이부인은 대청을 왔다 갔다 하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가서 대부인께 전하거라. 이노야께 보낼 돈을 융통해 달라고. 이노야의 앞길이 막히면 저들이 감당할 수 있다더냐?”
여종들이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정 이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세가 기울었으니 믿을 건 우리 이노야뿐인데, 눈치껏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우리 이노야의 앞길까지 막아 놔야 속이 시원하다더냐.”
여종들은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알았다.”
정 대부인이 응낙하는데도 여종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대부인, 서두르시랍니다.”
여종들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전에는 여종들의 그런 태도가 어이없고 황당했지만, 이제는 정 대부인도 습관이 된 터였다.
정 대부인은 고방 열쇠를 꺼내 옆에 있던 집사 부인에게 건넸다.
“가 보게. 이노야께 보낼 돈을 꺼내 줘.”
집사 부인이 머뭇거렸다.
“하오나······.”
집사 부인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정 대부인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말은 맞는 말이지. 앞길이 중요하지 않느냐. 앞길이 막히면 다 잃는 거야. 그럼 정말 끝이야.”
집사 부인은 알았다고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이제 집에 있던 여종과 몸종도 많이 팔아치운지라 집사 부인이 여종과 함께 나가자 안팎이 조용해졌다.
정 대부인은 탁자 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실은 팔아서 돈이 될 만한 게 뭐가 더 있나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터였다.
정 대부인의 시선이 장부에 닿았다. 아주 오래전에 기록한 목록에서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주과랑(周戈娘).
정 대부인은 손을 뻗어 그 이름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 전 형님 말씀만 따를게요.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제가 할게요.
귓가에 여인의 밝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규방 교육을 받고 자란 규수라고는 하나 무장 집안 출신인지라 거칠고 투박한 면이 있는 여인이었다.
당시 정 대부인은 말재주가 변변치 않고 시키는 일이나 할 줄 아는 주과랑을 깔보며 은근히 무시했다. 그러다가 이노야가 상처하고 재취를 맞이했다. 새로 들어온 후처는 학자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현숙하고 우아하며 품위가 있었다. 말솜씨도 유창하여 볼수록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 보니 말만 번드르르해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네! 자기 식구한테 횡포나 부릴 줄 알지. 과랑은 남에겐 으르렁거려도 자기 식구는 끔찍이 위할 줄 알았는데.
정 대부인은 주과랑의 이름을 쓸어 보며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 형님, 저 죽기 싫어요. 죽을 수 없어요. 제가 죽으면 우리 교교는 어떡해요.
– 형님, 전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정 대부인이 탁자 위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과랑이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꼬.
방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정 대부인은 얼른 울음을 그치고 후다닥 눈물을 닦은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노야, 일어나셨어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침상에 누운 정 대노야는 진작 일어났는지, 손에 서책까지 한 권 들려 있었다.
“안 잤소.”
잔 게 아니라면, 방금 전 일을 다 들었겠구나.
정 대부인이 자리에 앉으며 눈물을 한 번 더 닦았다. 정 대노야는 별다른 말 없이 계속해서 서책만 들여다봤다. 정 대부인은 몇 번 더 훌쩍이더니 눈물을 거두고 정 대노야에게 뭘 보느냐고 물었다.
“족보요.”
“그걸 뭐하러 봐요?”
정 대노야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아버지께서 그 애한테 왜 이 이름을 지어 주셨는지 기억하시오?”
정 대부인이 멈칫하며 족보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정방. 정방이 누구야?
정 대부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위에 쓰인 정 이노야의 이름을 보자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노야, 그만 보세요. 생각도 하지 말고요.”
정 대부인이 또다시 눈물을 흘리자, 정 대노야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왜 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요? 명백히 존재했던 일이고 존재하는 사람이잖소. 마음이 편치 않고 괴롭다고 해서 보지도 않고 생각도 안 한다 한들 그게 없었던 일이 되고 그냥 넘어갈 일이 된단 말이오? 그럴수록 진지하게 마주해야지.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말고.”
정 대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닦았다.
“의원이 그랬잖아요. 노야는 화를 내서는 안 되는 병에 걸렸다고.”
정 대부인이 간곡하게 말했다.
볼수록 화만 날 텐데, 화병으로 죽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려나.
정 대노야는 정 대부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족보의 이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방, 본디 남자아이에게 지어 주려던 이름이오. 밝게 빛나란 뜻이지. 아버지께서는 내 재주가 평범하단 걸 알아보셨소. 둘째 아우도 조금 영리한 정도였지. 그래서 우리 정씨 가문의 앞날은 그다음 세대에 달렸다고 보신 거요.”
정 대노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 대부인은 들을수록 울화가 치미는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우리 집안의 앞길을 그 애가 망쳐 버렸죠.”
“아니오.”
정 대노야가 말했다.
아니라고?
정 대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정 대노야를 쳐다보았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병색이 짙어진 정 대노야는 근래 들어 한동안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정 대부인은 의원을 불러 다시 진찰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정신까지······ 이상해졌나?
“생각해 보시오. 우리 집안을 무너뜨릴 능력이 있다면, 자연히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능력도 있지 않겠소.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지.”
거기까지 말한 정 대노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같은 이치란 거야. 정말 정신이 이상해지셨나?
정 대부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한편 같은 시각 낙주부 관청.
정 이노야는 공손한 태도로 중년 사내를 배웅했다.
“염려 마시오. 이 일은 저희 대인께서 생각해 두신 게 있소이다.”
사내가 말했다.
“여기 수고비입니다. 차나 한잔 사 드십시오.”
정 이노야가 봉투 하나를 건네자, 사내는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넙죽 받았다. 그러자 정 이노야는 더욱 기뻐했다.
“그럼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사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참, 위쪽에 인사 전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
무언가 생각난 듯 사내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자, 정 이노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귀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보냈습니다.”
사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정 이노야는 사내가 대문 밖으로 사라진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돌아섰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경하드립니다, 노야. 이번 내양 자사 자리는 틀림없겠습니다.”
두 문객이 웃으며 예를 표했다. 정 이노야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확정되진 않았네. 아직은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확신에 차 보였다.
“틀림없습니다. 유옥곤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숙부님 쪽에 얘기가 잘 됐다고요. 위고 아래고 할 것 없이 틀림없습니다.”
문객이 웃으며 말하자 정 이노야는 미소를 지었다.
당초 장순의 도움을 얻진 못했지만, 장씨 저택 앞에서 만났던 유옥곤과는 최근 3년간 연락을 지속해 왔다. 유옥곤의 벼슬길은 순조로웠다. 무엇보다도 유옥곤의 숙부인 유평(劉平)의 벼슬길은 탄탄대로였다.
이번엔 유씨 가문에 연줄을 댔으니 문제없으리라.
“내양 자사 자리는 이미 따놓은 당상입니다.”
문객이 탄식하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3년 늦긴 했지만요.”
그 말에 정 이노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3년!
정 이노야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본디 3년 전에 얻었어야 할 자리인데, 누구 때문에 앞길이 막힌 건지 3년을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3년이라니! 인생에 3년이 몇 번이나 된다고!
“네, 대인. 어쨌거나 이제 바라던 바대로 되었잖습니까.”
문객들이 얼른 위로의 말을 전했다. 정 이노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라던 바대로 됐으니 잘된 일이야.
정 이노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경성. 황궁 내에 위치한 유내전(流內銓: 이부 소속 관청)은 조용했다. 관료들이 정사당으로 향하는 작은 길 위에서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뒤에서 무거운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엄숙한 표정의 관료가 보였다.
“유 정언(正言: 관직명).”
관료들이 얼른 예를 표했다.
한림원 학사이자 지제고(知制誥: 황제의 조서 초안을 작성하는 관직) 겸 우정언(右正言)을 맡고 있는 유평이었다.
“체통들을 지키시오.”
유 정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무라자, 관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흩어졌다.
관료 하나가 유평을 관청 안으로 안내한 후 책자 하나를 올렸다.
“대인, 이번 관직 이동 계획이니 살펴보시지요.”
유평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책자를 받아 넘겨 봤다. 책장을 쓱쓱 넘기던 유평이 갑자기 손을 멈추고 무언가를 가리켰다.
“이자는 안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