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38
교랑의경 438화
“부름도 없이 어딜 들어간단 말입니까! 이는 불경죄입니다!”
고능준이 진안 군왕의 앞을 막으며 얼굴이 벌게진 채 소리를 질렀다.
“폐하 안전에서 어찌 소란을 피우십니까! 이는 불경죄입니다!”
어사중승은 도리어 고능준에게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은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라 이자문을 씹어먹을 듯 노려봤다.
“대인들은 뭘 하려는 거요?”
이자문은 고능준을 보지 않고 뒤에 있는 관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혼란을 틈타 구경하러 따라왔던 관료들은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얌전히 장지문 밖으로 나갔다.
이자문은 그제야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께서는 어전에서 실례를 보였으니, 신이 불경죄를 물을 것이옵니다.”
이자문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의 표정에서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다른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일어나 내시를 따라 나가는 정교랑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넌 원칙을 중시하는 자 아니더냐? 넌 왜 원칙을 지키지 않지? 오늘은 왜 원칙을 어기느냔 말이다. 내 너의 죄를 묻겠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분을 참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소녀는 원칙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교랑이 몸을 살짝 굽혀 예를 표하며 말했다.
“이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더냐? 원칙을 지킨다면 백성을 선동할 게 아니라 등문고를 두드렸어야지.”
진안 군왕이 냉소를 보였다.
“입 다물고, 썩 물러가십시오!”
어사중승이 소리쳤다.
“난······.”
진안 군왕은 계속해서 정교랑을 쳐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해가 안 간단 말이다!”
어사중승이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정씨, 이게 어찌 원칙을 지키는 것이란 말이냐?”
“소녀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오라버니들을 안장한 것은 주의를 끌기 위해서였습니다. 불공평한 일이 하늘에 닿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예상한 대로 소녀의 바람을 눈여겨본 관료가 있었습니다. 백성을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관료가 응당 해야 할 일이니, 원칙에 따른 게 아닙니까?”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거 봐, 이거 봐. 당치도 않은 이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게 뭔지 오늘 제대로 보는군.
고능준은 냉소를 지었지만,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그 불공평한 일은 원칙에 맞는 것이더냐? 전투를 치르려면 사상자가 나오는 건 피할 수 없다. 죽거나 다친 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어찌하여 너희만 불공평하다며 불복하는 거지?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뭐하러 군에 들어갔느냐?”
“맞아요. 저희는 돈이 있으니 경성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굳이 군에 들어갔을까요?”
정교랑의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네가 바라는 것이냐? 돈은 충분히 있으니, 명예를 원한다?”
황제가 자발적으로 입을 열다니!
아까는 진안 군왕을 도와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지만, 이번엔 황제 본인이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황제의 호기심까지 건드렸군. 궁금한 게 있으면 알아보기 마련이지.
이는 고능준이 원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못마땅해야 멀리하고, 멀리해야 더 못마땅해지는 법이니까.
간신히 황제가 괘씸히 여기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저 간사한 여인이 말을 많이 할수록, 듣는 이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다 가증스러운 진안 군왕 때문이었다. 저 여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다니!
그래. 애초에 진안 군왕한테 원망 따위는 없었어. 진소처럼 신세를 갚은 거지. 어사대에 찾아와 편을 들던 동 내한 같은 사람처럼 신세를 갚은 거야! 저 여인에게 잘 보이면 훗날 도움이 될 테니까!
아니면 진소랑 미리 짠 건가? 둘이 언제부터 한통속이었지?
진안 군왕이 감히 대신과 결탁하다니!
순간 고능준의 머릿속이 어수선해졌다. 뭔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듯했다. 귓가에 또다시 그 여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건 오라버니들의 바람이었어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쳐 탈영병이라는 치욕을 씻으려 했죠. 죽더라도 가치 있게 죽고자 했어요.”
“나라에 충성을 바쳐? 공을 탐하고 이익을 꾀하는 거겠지.”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공을 탐하고 이익을 꾀하는 게 어때서요? 오라버니들은 전선에 나가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그런 공을 탐하는 걸 조정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니, 그럼 조정에서 원하는 건 아무 바람도, 의욕도 없는 병사들인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저 여인에게 말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어!
고능준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렇다면 뭐가 그리 원통하단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불공평하지? 다른 이들은 안 죽었는데 너희만 전사한 게 불공평하다고?”
“아닙니다.”
“살아남은 이는 공을 인정받았으니, 너희도 공을 다퉈야겠다?”
“아닙니다.”
“정씨, 네 오라비들이 받은 위로금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많다는 걸 아느냐?”
“압니다.”
“그럼 대체 뭐가 불공평하단 것이냐? 또 무슨 공을 다투겠다는 거지?”
“공이 없는 자도 공을 얻었으니, 공이 있는 자는 당연히 공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있는지 없는지 관부에서 정하는 건 인정할 수 없고, 너희가 정해야만 인정할 수 있단 말이냐?”
“저는 관부를 믿지 않습니다.”
“관부는 널 어찌 믿지?”
“관부와 조정에서 절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믿어야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더냐?”
“그 일을 겪은 사람입니다.”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누군데? 의식을 잃은 덕에 요행히 목숨을 건진 그 오라비 말이냐?”
“네.”
“그자는 너와 가까운 사이이니 모두를 설득할 수 없다. 가까운 사이끼리는 서로 허물을 덮어 주고 숨겨 주는 법인데, 다른 이들이 납득하겠느냐?”
“그렇다면 저와 가깝지 않은 사람을 찾아야겠지요. 서북에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라면 조정에서도 믿을 수 있겠지요.”
여인의 말이 끝나자 전각 안이 일순 조용해졌다. 장지문 저편의 관료들 역시 숨을 죽였다.
어린 낭자가 담력이 대단하네. 폐하의 안전에서 조금도 겁먹지 않는 것 좀 봐. 도리어 폐하께서 격노하신 것 같네. 그러니 저리 묻고 답하고 했겠지.
“서북에도 맛좋은 술이 있는 것이냐?”
황제가 말했다.
비꼬는 말이잖아!
“없습니다.”
정교랑의 표정과 목소리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도 믿으실 수 있겠지요?”
협박을 하다니!
황제가 눈앞의 여인을 빤히 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장지문 너머의 진소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황제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짐은 믿을 수 있다. 한데, 너는 서북에서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
“소녀도 믿습니다. 서북의 병사들을 조사한 결과, 제 오라비들이 받아 충분한 위로금을 받았고 그 죽음에 전혀 억울한 게 없다고 밝혀지면, 만백성을 부추겨 하소연한 만큼 이번에도 소녀가 만백성에게 알리겠습니다.”
“뭘 어찌 알리겠단 것이냐?”
황제가 냉랭하게 물었다.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는 벌을 받겠습니다.”
정교랑의 대답에 모두가 멈칫했다. 고능준조차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번개를 불러 죽어? 벼락을 맞겠다고?
그것도 벌이긴 벌이지. 자고로 극악무도한 자만이 벼락에 맞아 죽는 법이니까. 벼락에 맞아 죽는다면 만백성이 납득할 것이다.
그런데, 번개를 불러들인다는 게······.
“언제 번개가 칠지 누가 알고 네가 벼락에 맞게 한단 말이냐? 번개가 치지 않고, 네가 벼락에 맞아 죽지 않으면, 그건 하늘의 잘못이지 너와 무관하다는 뜻 아니냐?”
고능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 말하니 정 낭자가 정말 도교 이 진인의 제자 같군. 자결하는 방법조차 저리 심오하다니.”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말없이 있었다.
“대인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소녀는 천문을 익혀 언제 번개가 치는지, 어떻게 해야 벼락에 맞는지 알고 있으니 준비할 수 있습니다.”
고능준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교묘한 술수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도 모자라 이제는 비바람까지 부를 수 있다니.
보통 미친 여인이 아니야!
서북 쪽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황제 앞에서 저리 오만방자하게 굴었으니 이젠 죽은 목숨이리라.
고능준은 눈앞의 여인을 다시 봤다. 전각 밖에서 걸어오는 모습을 힐끔 본 후, 이렇게 정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꽃다운 미모의 십 대 소녀가 단정하게 서 있었다. 자신의 집에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능준의 시선이 소녀의 두 눈으로 향했다. 처음 봤을 땐 아름다워 보이더니 다시 보자 어두워 보이고 세 번째 봤을 땐 심오하여 속을 알 수 없어 보였다.
저건 결코 어린 낭자의 눈이 아닌데. 정말 신선이라도 만났나?
그게 아니라면 어디서 저렇게 건방진 배짱이 나오지? 진소를 믿고 저러나?
“윤허하노라.”
황제가 입을 열었다. 천자의 말이 갖는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정교랑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삼고구배(三叩九拜: 머리를 세 번 땅에 찧고 아홉 번 절함)의 예를 올렸다. 그 행동이 어찌나 침착하고 올바른지 깐깐한 어사중승조차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구중궁궐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 내시의 시선은 몇 번이나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정말 기이한 일이네. 어린 낭자의 발걸음이 저리 안정적일 수가. 입궁할 때도 흐트러짐이 없더니, 출궁할 때도 마찬가지야.
내시들은 벌써 전각 안에서 일어난 일을 훤히 알고 있었다.
저 낭자가 감히 폐하 앞에서 도박을 걸었단 말이지? 그것도 목숨을 건 도박을.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군. 아니 할 말로 이 세상 만물의 목숨은 전부 천자의 손아귀에 있지 않던가. 애초에 도박이라고 할 것도 없지.
“낭자,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요?”
내시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정교랑은 내시를 힐끔 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얼씨구, 어린 낭자가 웃기까지 하네.
“정의를 믿거든요.”
“정의?”
내시가 고개를 숙였다.
정의라······. 천하에 자신만 정의고, 다른 정의는 없다는 건가?
황제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문을 탁자로 집어 던졌다.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난 듯 황제가 불쑥 물었다. 내시 하나가 앞으로 나와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말해라.”
황제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군왕께서는······ 산에 앉아 계십니다.”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왕에게 일이 생긴 후, 황궁에서 매산은 금기어가 되어 함부로 언급할 수 없었다. 경왕이 매화를 꺾으려다가 사고를 당했기에, 다들 매화의 매 자도 입에 올리지 못했고, 각 궁에서도 감히 매화를 놓아두는 이는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손을 내젓자,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겹겹의 휘장이 아래로 내려졌다.
“어린 낭자의 배포가 대단한 건 알았지만, 폐하를 압박할 정도로 큰 줄은 몰랐습니다. 큰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일 정도입니다.”
진소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살길을 조금도 남겨 두지 않으니 말이죠.”
“그 낭자는 언제나 살길을 열고자 싸워 오지 않았느냐. 번개를 불러들여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남의 살길을 빼앗고 자신의 살길을 쟁취하며 기사회생했지. 태평거에선 대낮에 사람 다섯을 죽이기까지 했어.”
노태야는 고개를 돌려 뒤쪽의 병풍을 바라보았다.
“유 교리를 죽음으로 내몰고 장강주를 설득했으며, 역참에서는 탐관오리를 활로 쏴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부친의 가문을 무너뜨렸다. 일거수일투족, 언행 하나하나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어. 강경하고 인정사정없으며 늘 필사의 각오로 덤비는 성격이야. 근래 들어 두 해 동안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은둔하고 있었다 해서 벌써 잊은 것이냐?”
진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잊고 싶어 잊은 게 아니라, 그 낭자의 모습을 보자 다 잊고 말았다. 아니, 믿을 수 없다고 해야 하나.
어리고 단정하며 말수까지 적은, 우아한 여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규방 여인의 모습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그녀는 입으로 말하지 않고 그저 손을 쓸 뿐이었다.
2년간 은둔하며 지낸 후 문을 나서자마자 대사로 추앙받는 승려를 참살하더니, 경성에 당도하자마자 풍파를 일으켰다. 단정하고 예의 바른 낭자였다. 원칙을 중시한다고 하지만, 누구든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게 맹수든 힘없는 벌레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때려죽이고 박살을 내는 게 그녀의 일관된 원칙이었다.
독한 사람이었다. 남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이번엔 자신의 살길을 끊어 버렸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살길이 끊어질지 모르겠네요.”
진소의 말에 진 노태야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들어 서북 방향을 쳐다봤다.
“서북 쪽엔 얼마나 자신 있느냐? 정 낭자는 서북에 있지 않으니 경성과는 또 다를 거야. 정 낭자의 손이 거기까지 닿진 않을 테고, 거기서 세력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거짓으로 누군가와 손을 잡기엔 변수가 너무 많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자신은 없는데, 제 생각엔 정 낭자가 승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
진소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는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 없잖습니까.”
그렇다면 이번에는?
두 부자가 서북쪽을 쳐다보던 시각, 경성에선 여러 사람이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바라봤다.
이번 일의 성패는 서북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