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37
교랑의경 437화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무심코 진소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을 때부터 연을 맺은 건가? 뭔가 캐낼 수만 있다면, 도조 이 진인의 제자로 알려진 신의 낭자만으로도 진소를 경성에서 내보낼 수 있을 텐데.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만······.
저 낭자는 그런 소문에 대해 시종일관 인정하지 않았고, 명성을 더 날릴 수 있는데도 과감하게 물러났다. 신의 낭자라는 이름만 남겼을 뿐 여기저기 연을 맺은 건 아니어서 꼬투리 잡힐 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수를 더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더더욱 이번 기회를 놓쳐선 안 되지.
고능준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일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일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승기를 잡은 건 확실했다.
조당 앞에 당도했을 무렵, 여인은 관료들의 시선에서 사라져 회랑 아래 한쪽에 서 있었다. 내시가 측문으로 들어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안 군왕은 조당에 서서 전각의 문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에는 문 위쪽의 꽃문양 투조 장식이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 구멍이 뚫린 투조 장식 때문에 겨울엔 더 춥고 여름엔 더 더우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장식이 작은 게 못내 아쉬웠다. 더 많고 더 컸다면, 그 뒤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텐데.
두려울까? 두렵진 않을 거야.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처음 황궁에 왔던 때도 그랬으니까. 으리으리한 황궁에 호위는 또 어찌나 많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던지. 부모가 자신을 황궁 여관(女官)의 품에 맡기고 뒤도 안 돌아보며 떠난 후로,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가장 큰 두려움을 맛보고 나니, 더는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저쪽에서 안으로 들라는 황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여인이 측문을 통해 후당으로 들어가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섰다. 조당에서는 여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말소리는 잘 들렸다. 몇몇 관료들은 무심결에 장지문 쪽으로 몇 걸음 다가서다가 잡아먹을 듯 쏘아보는 어사들의 눈빛을 보고서야 걸음을 멈췄다.
“도조 이 진인을 본 일이 참이냐, 거짓이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관료들은 그 말에 깜짝 놀랐고, 어사중승조차도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그런 농담을 가장 먼저 꺼낼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답하기 까다로운 농담이었다.
대황자만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흥분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긴장했다.
참이라고 한다면 황제의 안전에서 괴력난신의 헛소리를 늘어놓는 꼴이 되니, 황제가 입을 열지 않아도 관료들이 나서서 끌어내 참형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소문이 도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반박하지 않고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한 셈이니까.
뭐라고 하려나?
시간을 오래 끌 순 없었다. 황제의 안전에서 말씀을 올릴 때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음이 올곧지 못하다는 증거니까.
잠깐 숨 한 번 쉬는 사이, 저쪽에서 벌써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녀는 자신에 대해 알 뿐 다른 이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정교랑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후,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진안 군왕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감췄다.
황제가 고개를 들고 앞에 꿇어앉은 여인을 쳐다보았다. 황제 역시 조정 대신들처럼 탄식을 내뱉었다.
이리 어렸다니.
이어 황제는 정교랑의 자태를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고는 하나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꿇어앉아 있었다.
조정 중신과 고관대작의 위엄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반인도 그 앞에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천자를 뵙는 자리는 어떻겠는가. 전시를 치르고 급제한 공생들조차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는 겁에 질리는 탓에 해마다 망신을 당하는 이가 나오곤 했다.
그런데 저 어린 낭자는 법도에 따라 단정하게 꿇어앉아 있다고는 하나 자리를 어려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자태는 마음에서 나온다 했으니 과연 대단한 여인이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제는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너 자신의 생각은 어떠하고?”
황제가 물었다.
“소녀가 만난 건 사람이지 신선이 아닙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역시 스승이 있었군!
장지문 밖의 관료들이 수군거리자, 이번에도 어사가 나서서 호통을 쳤다.
황제는 그 대답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황성사(皇城司)를 통해 경성에 떠도는 풍문을 들은지라 과거 진소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정교랑의 스승을 찾은 일은 황제도 알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이 모르는 것은 진소가 숨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일에 대해선 신경을 안 썼기 때문이었다. 요 며칠을 제외하고는 그 어린 낭자에게 관심을 두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네 스승은 어떤 사람이더냐?”
황제가 물었다.
“당시 소녀는 의식이 온전치 않았습니다. 진 대인께서 찾아 주지 않으셨다면, 세상에 그런 분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겁니다. 소식을 알았을 무렵 스승님은 이미 돌아가신 후인지라 존함조차 모릅니다. 따끔한 충고 한마디로 소녀에게 경고를 남기셨을 뿐이죠.”
“무슨 말을 남겼는데?”
황제가 궁금한 듯 물었다. 조당에 있는 대신들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또다시 장지문 쪽으로 다가서자 이번엔 어사들도 호통하지 않고 함께 귀를 기울였다.
“‘넌 누구지?’”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녀를 의식불명에 이르게 하고 다시는 못 깨어나게 만들 뻔한 그 서찰이 지금 이 순간 그녀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그런 서찰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서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일 터였다.
회복을 기억한 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억제하려 애썼다. 한 번에 딱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양씨 가문을 찾는 일. 양씨 가문을 찾는 일에 매달리는 동안 다른 일이나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혼란에 빠질 것 같았다.
하긴 무슨 소용이랴.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정교랑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움찔거리다가 가슴에 갖다 대지는 않고 자제했다.
그래. 자신이 누군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난 누구지?
대답을 들은 조정 대신들은 멈칫했다.
“무슨 충고가 저래?”
대황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충고가 분명합니다.”
진소가 엄숙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성현이 일생을 바쳐 수많은 경서를 탐독하는 목적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건 바로 깨닫기 위해서죠.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이 누군지 기억하는 것, 말은 쉬워 보여도 답하긴 어렵고, 행하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대황자는 속으로 입을 삐죽거렸지만, 진소는 한때 대황자의 스승이었다. 스승께 불경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는지라 대황자는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공손히 수긍했다.
관료들이 다시 귀를 기울이는데, 장지문 너머 저쪽은 한동안 조용하기만 했다.
“물러가라.”
황제가 말했다. 그 말에 대황자가 멈칫했다.
“말씀도 안 하시고?”
대황자가 중얼거렸다.
소문에 대해 더 말씀하셔야지. 관료들이 싸워대는 소리보다 훨씬 재미있는걸. 이제 시작인데 왜 끝내시는 거야?
이번엔 진소도 대꾸하지 않았다.
“정씨 여인이 괘씸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것만 해도 충분하지요.”
고능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천하 만백성에게 보여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황제가 어찌 백성을 선동해 자신을 협박하는 여인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단 말인가.
“전하,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악(五惡)의 무리는 도적보다 더 흉악하다 하였습니다. 정씨는 속으로 뻔히 알면서도 음험하고, 행동은 경박하고 치우쳐 있으면서도 완고하니, 저런 자는 절대 쓸 수 없으며 용인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고능준이 간곡하게 말했다.
공자님 말씀!
대황자는 자신이 잘 아는 화제가 나오자 눈빛을 반짝거렸다.
“첫째로 속으로 뻔히 알면서도 음험한 것(心達而險), 둘째로 행동은 경박하고 치우쳐 있으면서도 완고한 것(行僻而堅), 셋째로 당치도 않은 이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言僞而辯), 넷째로 온갖 추악한 일만 기억하면서도 박학다식한 체하는 것(記醜而博), 다섯째로 잘못된 언행을 옹호하고 거기에 분칠까지 하는 것(順非而澤)을 이르지요.”
대황자의 말에 고능준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경사자집(經史子集: 동양의 도서 분류법 중 하나. 경서經書ㆍ사서史書ㆍ제자諸子ㆍ문집文集)에 능통하시지요. 출처며 풀이를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니 참으로 명석하십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대황자는 뿌듯해하며 도도한 웃음을 지었다.
“상대를 불의로 이끄는 자가 바로 악인이지요.”
고능준이 이어 말했다.
조당에 있던 대신들은 둘의 대화를 아까 전처럼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대신들이 궁금해하던 건 그저 정 낭자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진소는 서북의 주봉상이 몰락하고 나면 또 누굴 보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왕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좌천된 장수들과 관리들을 불러들일 때가 되기도 했고.
고능준의 생각은 벌써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애초에 여인이 황제 앞에서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나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랬으면 오죽 좋았을까. 황제 면전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일개 평민이 그런 짓을 한다면 곧장 위병들에게 끌려나가 목숨을 잃을 테니까.
죽으면 더 좋긴 하지. 그럼 그 여인을 노정과 진소에게 속은 자로 몰아가며 백성을 선동한 죄를 그들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굳이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아도 진소가 사직을 청할 텐데.
고능준은 진소를 힐끔 쳐다봤지만, 진소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그때 저쪽에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능준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장지문 너머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보였다.
저 자식이!
고능준은 열불이 치솟았다.
“무엄하오! 부름도 없이 어딜 들어가는 겁니까!”
고능준이 분노를 숨길 수 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조당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고능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씨, 너는 그 충고를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찌 그런 황당한 일을 벌인 것이냐? 국법이 지엄하거늘, 불공평한 일을 당해 억울하다면 법도를 지켜 발고해야 하지 않느냐. 너 자신은 세 가지 원칙을 세워 황자조차 고치지 않겠다 했으면서, 조정에서 세운 원칙을 무시하고, 천하의 원칙을 무시한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정씨를 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당초 의원을 찾아가겠다며 경왕을 데리고 출궁했을 때, 가장 먼저 찾아간 이가 바로 저 신의 낭자였으니까. 결과 또한 모두가 알았다. 경왕은 여전히 바보였으므로.
듣자니 신의 낭자는 세 가지 원칙을 들어 경왕의 치료를 거절했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후 관료들은 신의 낭자가 원칙 때문에 고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고칠 수 없었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생각할수록 답을 알 수 없었다. 원칙 때문에 안 고쳤다고 하자니, 상대는 무려 황자였다. 황자의 병을 고친다면 평생의 부귀영화를 보장받고 근심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대체 무슨 원칙이기에 그만한 유혹을 뿌리친단 말인가.
고칠 수 없었다고 하자니······ 과연 믿어도 될까?
아마도 답은 저 낭자의 마음속에만 있겠지.
지금 보니 진안 군왕은 못 믿는 눈치로군. 치료를 거절당한 울분이 떠올라 저리 나서서 호통을 치는 거겠지.
자연히 어사중승도 따라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