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44
교랑의경 444화
어린 소녀가 바닥에 꿇어앉아 예를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황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언뜻 분한 눈빛이 스쳤지만, 황제는 재빨리 감정을 숨겼다.
“소녀, 폐하의 혜안에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사대에서 이미 사정을 듣고 온 터였다.
“네 오라비들의 공로와 포상은 중서성에서 심사하여 정할 것이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감사의 절을 올렸다.
실내는 곧 침묵에 휩싸였고, 습관적인 위로의 말도 없었다. 빈말조차 건네기 싫을 정도로 황제가 이 일에 얼마나 염증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능준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남을 해치지도 못하고, 저에게도 득 될 게 없는 일이 아닌가. 허울뿐인 명예를 얻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화를 자초한 게지!
“물러가라.”
과연 황제는 별다른 말 없이 정교랑을 돌려보낼 눈치였다. 정교랑은 감사의 예를 올리고 일어섰다.
“정씨.”
황제가 정교랑을 불러세웠다. 정교랑이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냐?”
황제가 물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공이 없는 자도 공을 다툴 수 있는데, 공이 있는 자가 왜 공을 다툴 수 없단 말입니까. 소녀는 공을 다투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황제는 정교랑을 힐끔 쳐다보고 손을 내저었다. 내시가 얼른 정교랑에게 눈짓하자 정교랑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대신들이 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중서성과 어사대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시오. 단, 방중화 하나가 죽은 것으로 이 일을 매듭지을 생각은 접어야 할 거요. 강문원은? 주봉상은? 청죄 상소를 올리게 하고, 녹봉을 삭감하시오.”
황제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신들이 일제히 대답하려는데, 누군가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서북 감찰사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렸나이다.”
진소가 고개를 숙이고 상소를 올리며 말했다. 고능준은 멈칫했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이들보다 좀 빠르면 뭐? 그래 봤자 직무에 소홀했음이 입증되는 것뿐인데.
가뜩이나 폐하께서 임관보의 일로 심기가 불편하신 이때, 저런 잔꾀를 부려 봤자 화만 자초할 뿐이지.
예상대로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입을 열기도 귀찮은지 내시 쪽으로 손을 들었다. 내시가 얼른 손을 뻗어 상소를 받은 후 황제에게 올렸다.
상소를 열어 본 황제는 몇 줄 읽기도 전에 안색이 싹 바뀌었다.
방금 전 서북에서 온 상소를 읽을 때보다 표정 변화가 훨씬 컸다. 가까이에 서 있는 관료들 눈에는 상소를 든 황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무슨 일이지? 청죄 상소를 보고 어찌 저리 진노하신단 말인가.
고능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진소를 힐끔 쳐다봤다. 숙연한 진소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대전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황제는 서북에서 온 상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들여 청죄 상소를 읽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실내 분위기가 점점 굳어졌다. 내시와 관료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황제의 기분이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저건······ 분노야······.
분노?
임관보의 일을 알았을 때도 황제의 감정은 기껏해야 분하다는 정도였다. 주봉상이 잔꾀를 부리면서 청죄 상소를 올리고 빠져나가려 한 일로 부아가 치밀었다 한들 가소롭다고 냉소나 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런데 분노라니?
대체 무슨 일이지?
“괘씸한 놈들! 짐을 이토록 기만하다니!”
조용했던 대전에 갑자기 폭발하는 듯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도, 밖에서 층계를 내려가던 내시조차 그 소리에 걸음을 우뚝 멈추고 놀라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황제가 저토록 진노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여인의 가벼운 기침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내시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신의 시선이 여인의 몸으로 향했다. 여인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어서 길을 안내하라는 듯한 눈빛만 보일 뿐이었다.
천자를 알현할 때도 겁먹지 않더니, 천자께서 격노하시는 모습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군. 어린 낭자가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야.
내시는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힌 문과 창문 안에서 말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지만,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내시는 감히 귀 기울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공이 없는 자도 감히 공을 다투는데, 공이 있는 자가 왜 공을 다툴 수 없느냐고 한 거지.
정교랑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정교랑은 내시를 따라 크고 작은 전각이 겹겹으로 늘어선 황궁을 천천히 걸어갔다. 그 뒤로 내시들이 중서문하성 등 관청이 모인 곳으로 허둥지둥 달려가며 흩어졌다.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렸다고 하오!”
“무슨 죄목으로? 무원산 사건을 덮기로 한 죄?”
“아니, 서쪽 오랑캐의 주력군과 싸운 전투에서 군공(軍功)을 거짓으로 보고했다는군.”
“세상에, 어떻게 군공을 거짓 보고할 수 있어?”
황궁 대문이 아무리 굳게 닫혀 있다고 한들, 소문은 황제의 성난 호통 소리와 함께 중서문하성 등 수많은 관청으로 금세 퍼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것은 아주 중대한 사건이니, 이 사건에 비하면 무원산 형제들의 일이나 신의 낭자가 번개를 불러들인다는 등의 일은 그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는 군주를 기만한 대죄였다. 대주의 조정은 문인을 우대하여 문관을 죽이지 않지만, 무장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벌을 내렸다. 정당한 사유 없이도 대장군을 죽일 수 있는 조정이니, 감히 군공을 거짓 보고한 자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갑자기 이 얘기가 나온 거야?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하긴 했지만, 그건 임관보 전투에서 방중화가 한 짓이잖아.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서쪽 오랑캐의 주력군과 싸운 전투의 군공 얘기가 나오느냔 말이야!
대전 조당에 서 있던 고능준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당시 서쪽에 있던 척후병이 먼저 달려와 보고했습니다. 적군의 수가 오천이라고요. 하지만 용곡성에는 만 명이 넘는 병력이 있었기에 분명 용곡성 병사들이 이길 전투라고 판단하고, 다른 척후병들의 보고를 듣기도 전에 전투를 명했습니다.
하지만 임관보의 봉화와 전령병의 급보를 확인한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병사가 오랑캐를 포위한 게 아니라, 반대로 오랑캐들이 뒤에서부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것을요.
전방에 있는 오랑캐 병력은 이천 남짓이었으나, 후방에도 오랑캐의 주력 정예군 팔천이 있어 협공을 당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오랑캐들은 두 성보를 도륙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 병사 천여 명을 잃었습니다.
다행히도 용곡성을 사수한 덕에 서쪽 오랑캐의 주력 정예군은 결국 퇴각했습니다. 사실상 오랑캐가 패배하여 퇴각했다기보다는, 쌍방의 대치가 오래 이어지다 보니 명확한 승패를 가를 수 없게 되어 퇴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신이 이번 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철저하게 준비했더라면, 오랑캐들의 함정에 빠져 수많은 군사를 잃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감찰사임에도 공을 세우기 급급하여, 폐하의 은덕에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청죄 상소를 읽는 내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헛소리야! 모두 다 헛소리야! 이건 음모라고! 사람을 현혹하는 말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야!
어떻게 됐든 간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긴 했잖아. 용곡성 함락도 막아냈고, 결과적으로는 오랑캐가 물러났으니,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것도 아니야!
“거짓 보고가 아니라면, 왜 임관보의 일을 위아래로 꼭꼭 숨겼지? 조사도 안 하고, 보고도 안 했어. 어째서 그 무원산 형제가 경성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우도록 만들었느냐는 말이오.”
황제가 천천히 말하면서 고능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능준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던 생각들이 하나둘씩 정리가 됐다.
“짐은 이번 급각체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로 급했던 모양이로군. 이 사건을 조사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리 급하게 움직였던 거였어.”
황제의 목소리가 고능준의 머리 위에 돌덩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쾅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고능준의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그렇게 된 거였군!
고능준이 진소를 노려보았다.
진소! 내가 속았구나!
황제가 진소와 정 낭자의 관계를 알아챌 수 있도록 귀띔해 왔는데, 진소가 자연스레 이를 이용하다니! 내가 속았어!
진소가 정 낭자를 보호하려고 나선다면, 그 오라비인 무원산 형제들의 임관보 일에 진소를 엮어 끌어내리려 했다. 진소라고 그런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가!
정 낭자를 위하긴 개뿔, 무원산 형제들을 위하긴 개뿔! 서북 관청에서 임관보의 일을 시인하게 만들려던 거였어!
그게 사실이 되면, 황제의 의심이 사실로 입증되니까.
임관보의 일이 참이라면, 또 무슨 일이 참이려나? 임관보의 일도 숨겼는데, 또 무슨 일을 못 숨기겠어?
군공을 거짓으로 보고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딱히 대수로운 일도, 겁낼 일도 아니니까. 주봉상 혼자 죄를 시인하는 게 아니라, 서북 관청 사람 전체가 죄를 시인한다 해도, 무서울 건 없지.
그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폐하의 의심이 아니던가!
이번 서북 관청의 일로 황제의 의심을 사게 된다면, 이후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언사 또한 의심받을 터. 빌어먹을, 이건 서북 관청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드는 일이라고!
고능준은 일순간 살인 충동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진소를 한입에 집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저놈, 어떻게 한 거지? 분명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봤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고!
모든 게 내 계산 속에 있었어. 그래서 경계심을 푼 건데, 그 틈을 파고들 줄이야!
고능준의 시선이 진소에게로 향했다. 무원산 형제들의 일이 어떻게 매듭지어지든 간에, 황제는 진소와 정 낭자에 대해 염증을 느낀 건 분명했다. 그래서 고능준은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앞의 매미를 잡느라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참새를 보지 못하는 사마귀 꼴이 되어 버렸다.
진소!
고능준은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황궁 대문이 굳게 닫혀 있다 해도, 조당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봉상이 청죄 상소를 올려 서북 관청의 군공 거짓 보고 사건을 밝힌 일은 온 경성에 바람처럼 퍼졌다. 이미 풍랑이 일기 시작한 조정에 더욱 무시무시한 파도가 덮쳤다.
“이야, 주봉상이 목숨까지 내놓고 그런 일을 벌이다니. 자신의 앞길을 내건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진 상공이 마지막에 둔 한 수가 정말 독하고 정확했어. 서북 관청에서 반격할 틈도 주지 않고 한 방에 골로 보내 버린 셈이니까.
“주봉상을 내어주고, 강문원을 쳐낸다? 아니지, 아니지. 강문원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야. 강문원에게 줄을 댄 사람들이 모조리 흔들리겠어. 꽤 해 볼 만한 도박인걸.”
“그리고 군공을 거짓 보고한 게 어디 이번 한 번뿐이겠어? 전부터 그런 짓을 얼마나 많이 해 왔겠느냐고.”
“맞아. 폐하께서도 신의 낭자와 무원산 형제들 일로 망신을 당해 분을 삭이고 계셨을 텐데, 서북 관청에서 제 발로 찾아와 때려 달라고 얼굴을 내민 거잖아. 폐하께서 때리시지 않으셨다면 오히려 저들이 무안했을 정도야.”
“그럼 끝났네. 이번에 조정에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겠지?”
“옥사가 벌어질지도 몰라.”
“자네 생각엔 몇 명이 들어갈 거 같아?”
“드디어 끝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니!”
관청 관리들의 입을 타고 오르내리던 여러 가지 말이 급기야는 경성 저잣거리의 술집과 찻집까지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