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90
교랑의경 490화
“정 낭자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남이 나서서 말할 게 있겠습니까. 신이 폐하께 정 낭자를 편드는 말을 하게 된다면, 아마 풍림과 똑같은 사람이 되겠지요.”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황제가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짐의 마음이 놓이는구나. 네가 출궁하여 왕부에서 지내는 것도 마음이 놓인다.”
진안 군왕이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들이켜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또 신의 마음을 짐작하신 거지요? 그렇다면 신은 말을 아끼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장난 섞인 말을 하며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황제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진안 군왕을 눈으로 배웅했다.
진안 군왕이 물러남과 동시에, 내시 하나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폐하, 반강현의 한창(韓昌)이 폐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기로 한 일은 중서문하성에서 미리 황제에게 귀띔했던 일이기도 하고, 관례에 따른 형식적인 자리였기에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강현의 한창?”
진안 군왕을 따라 나가던 어린 내시가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가 서둘러 옆에 있던 다른 내시에게 물었다.
“혹시 일식을 예측하셨다던 그 한 대인 말입니까?”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어린 내시는 몹시 기뻐하며 진안 군왕의 뒤를 쫓아가 물었다.
“전하, 전하, 그 한 대인이 맞는다고 하던데요? 경왕부의 꽃밭을 음양도로 꾸며도 될지 한번 물어보심이 어떠실지요?”
“그 사람한테 물어서 뭐해? 누가 뭐래도 그 여인의 말이 제일 믿을 만하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그 여인이라 하심은, 당연히 정 낭자겠지?
어린 내시는 헤헤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진안 군왕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대전 앞으로 돌아가 한창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게 뭘 묻는다고?”
한창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붙잡고 말을 묻는 어린 내시에게 놀라 반문했다.
한창이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진사 전시에 합격했을 때도 황제의 용안을 뵌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오늘처럼 혼자서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가 아니었기도 하고, 몇 년 만에 황제를 다시 보는 자리이기에, 한창은 흥분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신이 행여나 무슨 실수라도 저지를까 봐 불안해했다.
황제가 자신을 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에 대해 특별한 인상이 남은 것 같지는 않았다. 형식적인 말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한창은 금방 대전 밖으로 물러났다.
무탈히 황제를 뵙고 나왔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찰나, 한창은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 내시 하나에게 붙잡혔다.
“한 대인, 저희 전하께서 왕부의 꽃밭을 달리 꾸며 보시고자 하시는데, 한번 봐 주실 수 있습니까?”
어린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한창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다른 내시들에게도 들렸다. 내시들 중 하나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자리를 떴다.
근정전 안.
황제는 상소문을 내려놓은 후, 허리를 굽히고 있던 내시를 쳐다보았다.
“조정 대신과 사사로이 교분을 쌓는다?”
“예. 소인이 감히 거짓을 고할 리가 있겠습니까.”
황제는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폐하, 황성사(皇城司)에 조사를 명하심이······.”
내시가 말끝을 흐리며 조용히 말했다. 잠깐의 상상만으로도 그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황성사에서 이 일을 조사하게 된다면, 단순히 대신과 교분을 쌓는 것에 그치지 않겠지. 조사하다 보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일들이 생길 것이야. 그게 얼마나 사소한 일들인지는 중요치 않아. 아니, 조사 결과 아무 일이 없다 하더라도, 진안 군왕을 조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 한 번을 조사했으면, 두 번도 조사할 수 있고, 세 번, 네 번도.
조정 대신과 종친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황제의 신임을 잃는 일 아니던가. 황제의 신임을 잃는다는 말은, 조당에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조사는 무슨. 아직 황궁에 있을 테니, 불러와서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
황제의 말이 신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내시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이러니 황제의 신임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
내시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막 궁문을 나서려던 한창은 다시 황궁 안으로 불려갔다. 아직 궁 밖으로 나가지 않은 어린 내시도 한창과 함께였다.
“전하께서 꽃밭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으나, 사천대에서 동의하지 않을까 봐······.”
어린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왕부의 풍수와 구조는 모두 사천대에서 확인하고 결정한 것이었다. 왕부 내의 작은 변동이라면 모르겠으나, 꽃밭 전체를 바꾸는 것은 필히 사천대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한창과 무슨 상관이라는 것이냐?”
황제가 물었다.
“폐하, 오해가 있사옵니다.”
한창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는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경성에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지만, 상경하자마자 이런 일에 휘말리다니.
“소인은 한 대인께서 일식을 예측하셨다고 들어, 풍수지리에 대해서도 분명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대인을 모시고 꽃밭을 둘러본 뒤에, 다시 사천대에 말한다면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지리라 생각하고······.”
어린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감히 한창을 방패막이로 쓰려 했다는 것이냐!”
황제가 격노했다. 어린 내시가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황제에게 사죄했다.
“진안을 불러오거라. 어찌 출궁하자마자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는 게야!”
황제가 노여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신이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대전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곧이어 진안 군왕이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무슨 구조를 바꾸겠다고? 누가 너더러 구조를 바꾸라고 했느냐? 이번에 왕부의 구조를 바꾸고 나면, 다음에는 왕부 안에서 판을 깔고 놀기라도 하겠다는 게야?”
황제가 굳은 표정으로 호통쳤다.
한쪽에 서 있던 한창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 유명한 송자동자 진안 군왕을 힐끗 쳐다보고는 서둘러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창의 귓가에 소년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자리는 원래 연못이었는데, 혹시나 경왕이 다칠까 걱정되어 메운 곳입니다. 맨땅만 두기에는 허전해서 꽃을 심었지요. 그런데 꽃과 풀만 듬성듬성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꽃으로 도안을 만들고자 했을 뿐입니다.”
진안 군왕의 말에 황제가 다소 누그러진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도안을 만들려고 그리 몰래몰래 묻고 다니는 것이냐?”
“정 낭자의 말로는, 그 자리에 음양도를 만드는 게 좋겠다고 해서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정 낭자!
황제가 멈칫했다. 한창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가 소문대로 종친과 친분이 있었군.
“정 낭자가 하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따른단 말이냐?”
황제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네, 신은 정 낭자를 믿습니다. 낭자는 절대로 거짓말이나 헛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정 낭자의 모든 말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무슨 근거? 이젠 풍수지리까지 본다더냐!”
황제는 그날 태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도가의 제자가 아니라고 할 땐 언제고. 액막이도 했으니, 이젠 풍수를 봐 주려나?
“풍수를 이미 봐 주고 있었군.”
황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한창은 제자리에 머쓱하게 서 있었다. 어쨌든 황실의 일인지라 자신이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황제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했다.
“가서 정 낭자를 불러오거라.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짐이 직접 물어봐야겠다!”
황제가 고함쳤다. 한창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드디어 나도 말로만 듣던 정 낭자를 볼 수 있는 건가? 아니지, 아무래도 난 이만 물러나는 게 낫겠어.
한창이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던 찰나, 황제는 진안 군왕의 말에서 한창과 관련된 일을 떠올렸다.
“그때, 그대가 일식 시간을 직접 예측했소?”
황제가 더는 진안 군왕을 신경 쓰지 않고 한창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신은 천문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것만 알 뿐, 일식을 예측할 정도로 통달하지는 못합니다.”
한창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그가 곁눈질로 옆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황제가 일부러 자신에게 무안을 줬다는 것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된 일이지? 듣기로는 지나가던 여인이 그대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하던데.”
황제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예. 맞습니다.”
한창이 그날 있었던 일을 황제에게 소상히 아뢰었다.
여인이 홀로 제단 위로 올라가 다들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요승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통쾌하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흘겨보자, 진안 군왕은 여전히 해맑게 웃는 얼굴로 조용히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인네가 서슴없이 살인을 저지르다니.”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폐하, 당시의 상황에서는 요승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창이 대답했다.
“반강현 전체가 그 여인에게 몹시 고마워하는 모양이군.”
황제가 한창을 쳐다보며 말했다. 한창은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사옵니다. 소신은 그 여인이 위신봉상(危身奉上: 일신의 위험을 감수하며 천자를 받들다)을 행했다고 생각하옵니다.”
위신봉상은 가히 충이라 할 수 있지.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요승은 죽여 마땅하지만, 핵심은 누가 어떻게 죽이느냐지. 또 그를 죽였다는 이유로 불러올 후환과 뒷감당 등 수많은 변수를 모두 고려해야 해.
그러니 반강현 관리들은 요승이 아무리 날뛰어도 가만히 앉아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게지.
어떤 일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수가 있어. 그 일로 인해 다칠 수도 있고,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지만, 이를 무릅쓰고 조정과 백성을 위해 화를 없앤 것이니 가히 충이라 할 수 있으리라.
황제가 입을 열려던 찰나, 문 앞에 서 있던 내시가 말을 전했다.
“폐하, 정 낭자가 당도했다고 합니다.”
“들라 하라.”
한창은 무의식적으로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 진안 군왕이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자신과 함께 문 쪽을 쳐다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역광 때문에 여인의 나이를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호리호리하면서도 마냥 가녀리지만은 않은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인은 몹시 안정적인 자태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던 여인은 황제와 열댓 보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황제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정씨, 폐하를 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