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99
교랑의경 499화
정교랑을 따라 대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반근이 멈칫했다. 진십팔랑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졸 몇 명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여기가 정 낭자 댁입니까? 저희는 대리시에서 나왔습니다.”
대문 앞에 선 관졸들이 공손하고 상냥한 태도로 물었다. 진십팔랑은 다시 홱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씨.”
반근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팔을 붙잡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러니까, 아씨께서 기다리시던 게 저들이었어?
“조사하러 온 거예요? 하옥하러 온 거예요?”
진십팔랑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건, 조사를 해 봐야 알지요.”
관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족이 같이 가도 되나요?”
황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가능합니다. 공당에 함께 나가지만 않으면 돼요.”
관졸은 사근사근 웃으며 대답하다가 얼른 웃음기를 거두었다. 웃음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에 좋지만, 대리시 관졸이란 자가 웃음을 지으면 오히려 상대가 불쾌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올케. 반근이랑 나만 가면 돼요.”
황씨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앞으로 모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올케는 오라버니한테 가서 말을 전해 줘요.”
정교랑이 덧붙였다. 황씨는 얼른 알겠다고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너, 너무 겁내지 마요.”
누가 더 겁을 내는 건지 모르겠네.
옆에 있던 관졸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더욱 공손한 태도로 정 낭자라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역시 신선의 제자라 다르구나. 보통 사람들과 달라.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담한 저 표정 좀 봐.
“난 겁나지 않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짓고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디뎠다.
“정교랑!”
진십팔랑이 쫓아오며 소리쳤다. 정교랑은 고개를 돌려 진십팔랑을 힐끔 보고, 별다른 말 없이 뒤돌아 대문을 나섰다.
마차 한 대가 관졸들에게 둘러싸인 채 거리를 지나갔다. 눈이 내리고 난 거리에는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쳤다.
두봉으로 몸을 단단히 감쌌는데도, 날이 밝자마자 문 앞으로 나와 서 있던 한원조는 손발이 얼어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지나가는 마차를 보고 앞으로 다가서려던 한원조가 비틀거렸다.
“공자님.”
사환이 잽싸게 부축했다. 한원조가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섰을 무렵, 마차는 벌써 저만치 간 후였다. 찬바람이 불자 한원조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옷소매 속에 있는 두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나는 마음을 바꾸어 속세를 따를 수 없으니, 진실로 근심 속에 평생 고생하리라(吾不能變心而從俗兮, 固將愁苦而終窮).”
천천히 시를 읊고 난 한원조가 쓴웃음을 지었다.
굴원의 이 시구를 여인을 위해 읊을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군.
같은 시각 경왕부에서는 이따금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후원의 공터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경왕은 눈밭을 뛰어다니며 웃고 장난을 쳤다.
“전하, 전하.”
내시 하나가 급히 달려와 솜옷 하나만 입은 진안 군왕을 보고 소리쳤다. 진안 군왕은 한겨울에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탄탄한 팔뚝을 드러낸 채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진안 군왕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정 낭자가 대리시로 갔습니다.”
내시의 말에 진안 군왕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아주 재미있는 구경을 하겠구나.”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진안 군왕은 다시 몸을 돌려 경왕을 쳐다봤다. 내시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내시의 눈에는 허리를 곧추세운 군왕의 뒷모습만 보이고, 한바탕 웃고 난 후 표정이 굳어진 진안 군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끝이 없군, 끝이 없어. 달리 무슨 수가 있으랴. 인생이 본디 그러한 것을.
정말 재수 없게 됐네.
대리시 소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느릿느릿 읊던 서리의 질문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대리시 소경은 공당 아래에 선 여인을 보며 하는 수 없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또다시 속으로 대리시승과 어사중승을 욕했다.
하여간 대리시승이 문제야. 까다로운 일을 맞닥뜨리면 꼭 나를 앞세운다니까.
“정씨, 어사중승 풍 대인이 물은 죄에 대해 인정하느냐?”
대리시 소경의 물음에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풍 대인의 말씀에 따르면, 네가 그 일을 했다고 전부 인정했다던데?”
소경이 물었다.
“네. 그 일은 제가 한 게 맞아요. 다만 말하는 이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다 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법이죠.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말하는 이에겐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소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 그저, 절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건 제가 한 일 그 자체일 뿐이죠. 다른 이가 절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들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역시 저와는 무관하고요.”
정교랑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대인, 제가 그런 일들을 한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풍 중승이 비난한 점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정을 한다는 거야? 못 한다는 거야?
이래서 이 사건의 심문이 까다롭다는 거였군. 그럼 어디 천천히 해 보자.
소경은 무슨 생각이 머릿속을 번뜩 스쳤는지 앞에 있는 경당목을 집어 들려 했다.
“대인.”
뒤에 있던 서리가 헛기침을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사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후당 안. 소경은 대리시를 찾아온 어사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고요? 오늘이라 하셨습니까?”
소경이 언성을 높였다.
“중승 대인께서 오늘 중으로 결론을 내라 하셨소.”
어사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 말입니까? 오늘?”
이리저리 서성거리던 소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농담하십니까? 심문이 어디 그리 쉽습니까?”
“중승 대인께서 이 안건은 심문하기 쉽다고 하셨소. 죄를 인정하면 결론을 내리고 집으로 돌려보내란 말이외다.”
어사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멈칫하던 소경이 곧 말뜻을 이해했다.
대리시 감옥은 어사대 감옥과 비교가 안 되지. 어쨌거나 어사대는 관리를 조사하는 곳이니까.
여인의 몸으로 대리시에 온 것만 해도 명예가 땅에 떨어진 셈인데, 감옥에 들어가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잖아.
귀판관이 인간미가 영 없는 자는 아니었어. 그래도 은인을 기억하고 있긴 하구나. 뭐, 고양이가 쥐 생각해 주는 꼴 같긴 하지만.
“저 여인이 인정하라 하면 한답니까?”
소경은 콧방귀를 뀌고 옷소매를 털며 홱 뒤돌아 공당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두고 보시구려.”
“뭐 하는 거예요? 어서 가요. 올케가 대리시로 끌려갔다고요.”
황씨는 초조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범강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벌써 데려갔단 말이오?”
황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가자고 범강림을 재촉했다.
“잠깐만 기다리시구려. 어제 중요한 일이 생겼소. 우선 이 일부터 처리해야 해.”
범강림의 말에 멈칫하던 황씨가 버럭 화를 냈다.
“벼슬에 눈이 멀었어요? 뭐가 그리 바쁘다고 며칠째 집에도 안 들어와요?”
경성의 낯선 환경 속에 전전긍긍 불안하게 지내느라 꾹 눌렀던 서북 여자의 드센 성격이 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황씨가 범강림의 팔을 홱 낚아챘다.
“누이의 일이 더 중요해요? 아니면 이 망할 곳의 일이 더 중요해요?”
문밖에 있던 이들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누이의 일이 중요하지. 누이의 일이 중요하고말고.”
범강림이 난처해하며 아내의 손을 뿌리쳤다.
“잠깐이면 되오, 잠깐이면.”
범강림은 그 말만 남긴 채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떴다. 관청 안에 남은 황씨가 씩씩거리며 발을 굴렀다.
“대인, 어서 가 보세요. 여긴 저희한테 맡기시고요.”
관청 밖에 있던 병졸들이 얼른 범강림을 쫓아와 말했다. 범강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럴 수야 없지. 병기는 아주 중한 물건이야. 애들 장난감이 아니라고.”
그런 대화를 나누며 범강림과 병졸들은 궁노원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꽁꽁 묶인 채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두 사내를 에워싼 채였다.
“이무!”
범강림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벼락같이 달려와 그중 한 사내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어서 말해!”
범강림이 호통을 쳤다. 범강림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대인께서 왜 저러시지? 방금 전까진 잘해 주셨잖아?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듯 죄인을 심문하시더니.”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인이 왔거든. 집안에 일이 생겼나 봐.”
옆에 있던 이가 목소리를 죽여 가며 대답했다. 둘은 뭔지 알겠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른 이들도 퍼뜩 깨달은 눈치였다.
이거 뜻밖인데. 범 군감이 공처가일 줄이야.
“냉큼 말하래도!”
다들 언성을 높이며 사내들을 다그쳤다. 범강림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를 붙잡아 홱 일으켜 세웠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성문을 지키던 감문관 이무라는 사실을 알아보기엔 충분했다.
“전 그저 투석기(投石機)를 빌렸을 뿐입니다.”
“빌려?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무기를 빌린단 말이냐?”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이무가 고개를 떨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전에 감문관을 할 때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그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었지만, 집에 불을 낸 일로 죄를 짓고 쫓겨나 관복까지 벗게 된 지금은 그 누구도 그를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았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강림이 다시 그를 걷어찼다.
“빌려? 누굴 속이려고? 바른대로 말해라. 서쪽 오랑캐 놈들의 세작이더냐?”
범강림의 호통에 이무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대인,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라고?”
범강림이 이무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 산산조각이 난 발석거(發石車) 앞에 세웠다.
“그럼 이 발석거는 왜 하나하나 분해해 놨지? 분해해서 성 밖으로 빼돌린 다음 작동 원리를 베끼려는 게 아니냐?”
이무가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인, 분해한 게 아닙니다. 제가 포탄을 시험하다가 망가뜨린 겁니다.”
범강림이 냉소를 지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투석기가 범강림의 시야에 들어왔다. 투석기 같으면서도 투석기 같지 않은 투석기에 시커먼 돌포탄이 끼워져 있었다.
“이거 말이냐? 이 돌포탄이 투석기를 박살 냈다고?”
이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범강림에게 걷어차였다.
“누굴 세 살 어린애로 알아? 전장도 한번 안 나가 본 숙맥인 줄 아나! 돌포탄 스스로 어떻게 발석거를 망가뜨려!”
“대인, 이 돌포탄은 여느 돌포탄과 다릅니다.”
이무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간신히 투석거 앞에 섰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폭발하는데, 그 힘이 어마어마해서 발석거가 못 버팁니다.”
범강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포탄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을 붙여? 돌포탄에 불이 붙는단 말이냐? 어떻게?”
손이 뒤로 묶인 이무가 어깻짓으로 가리켰다.
“이쪽에요.”
범강림이 미간을 찌푸리며 화절자를 꺼내 눈 깜짝할 새에 불을 붙였다.
“불을 붙인 다음엔?”
범강림이 이무가 가리킨 도화선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범강림의 동작이 너무 빨라 이무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화절자가 눈에 들어왔을 무렵, 불꽃이 일며 도화선이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대인, 안 됩니다!”
이무가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굉음이 궁노원에 울려 퍼졌다.
한편 대리시에서는 여전히 정교랑을 심문 중인 소경이 짜증을 내고 있었다.
“정씨, 죄를 인정하겠느냐!”
소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경당목을 탁 내리쳤다. 경당목이 탁자로 떨어짐과 동시에 굉음이 울렸다.
귀가 웅웅 울리고, 땅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대인, 지진입니다!”
충직한 서리가 소경을 끌어안으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공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갔다. 후당에 숨어 있던 어사도 머리를 감싸 쥔 채 뛰어나왔다.
곧이어 귓가를 때리던 굉음이 사라지고, 땅도 다시 고요해졌다. 모두가 불안에 떠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