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00
교랑의경 500화
“이런, 정 낭자는?”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인은 여전히 공당 안에 서 있었고, 공당 밖에 시립해 있던 어린 몸종이 언제 들어간 건지 여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안과 밖, 어두운 곳과 밝은 곳, 사람이 적은 곳과 많은 곳. 양쪽의 모습이 확연하게 갈렸다.
“죄를 인정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문밖에 선 소경을 보며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 났다! 큰일 났어!
조정 대신들은 궁을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돌아와야 했다. 내시들도 대전 양옆에 서서 수군거렸다.
“궁노원이 갑자기 훼손되다니?”
대전 안에서 격노한 황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랑캐의 세작이 궁노원까지 접수했단 말이냐? 그렇다면 이젠 짐의 황궁도 자유자재로 드나들겠구나!”
조정 대신 몇 명이 또 황급히 걸어왔다. 내시들이 대전 안을 엿보며 뭐라 수군거리자, 조정 대신 중 하나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며 옷을 털고 발을 탁 굴렀다. 내시들은 얼른 똑바로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모았다. 곧이어 안으로 들어가는 조정 대신들의 관화가 보였다.
“폐하, 범 군감이 왔습니다.”
대전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황제는 그 말에 얼른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늘 대체 왜 이러지?
조회 때는 어사중승이 기어이 정 낭자를 조사해야겠다며 억지를 부리고 진소를 압박해 사직을 청하게 만들어 정신을 쏙 빼놓는 바람에 조회를 마치고도 한참 만에 진정이 됐다. 점심 수라를 들고 나서 잠시 오수를 청할까 했는데 눕자마자 또 일이 터진 것이었다.
지진이라니!
이 엄동설한에 지진이 일어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상자가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근정전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곧 소식이 왔다.
지진이 아니었구나.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다행이도다. 연말은 무탈하게 넘길 수 있겠어. 대신들이 부덕의 소치라며 떠들어대는 소리를 안 들어도 되겠구나.
하지만 안도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궁노원에 일이 생기다니. 무려 궁노원에! 거긴 부국강병을 이룰 병기를 만드는 곳인데!
“범 군감!”
범 군감을 본 황제는 흠칫 놀랐다. 본디 시골 출신인 데다 용모도 썩 출중하지는 않은 범 군감이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숯가마 속에서 기어 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더냐?”
범강림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급히 달려오느라 의관을 정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황제가 언짢은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젓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궁노원의 작업장이 훼손되다니?”
방 두 칸이 훼손된 건 크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지만, 그중 한 고방에 신비궁과 신비궁을 만들 재료가 보관되어 있었다. 방금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신비궁 삼백 개가 못쓰게 됐다고 했다.
황제는 몹시 안타까워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무려 삼백 개라니!
“범 군감, 궁노원처럼 중요한 곳에 어찌 세작이 잠입한 것이냐!”
“폐하, 세작이 궁노원에 잠입한 게 아니라, 궁노원에서 세작을 잡은 겁니다. 발석거 두 대가 유실되어 어제 조사를 시작했다가, 오늘 아침에 용의자를 잡아 현재 심문 중입니다.”
발석거까지!
황제가 또다시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속히 조사하라!”
같은 시각, 무장한 병사들이 궁노원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범강림 등 관리 몇 명이 황제를 알현하는 동안, 나머지 관리들은 이번 사달을 일으킨 이무와 발석거를 훔친 장인을 고문하고 있었다.
“저희는 세작이 아닙니다.”
이무와 장인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럼 이건 대체 무슨 기관이냐?”
관리 하나가 호통을 쳤다.
“이건 기관이 아닙니다.”
이무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럼 뭔데!”
관리의 호통에 이무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주저했다.
이무가 망설이며 뜸을 들이는 모습을 본 병졸이 즉시 손을 들어 칼등으로 이무의 얼굴을 매섭게 후려쳤다. 이무는 그대로 나가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가뜩이나 피멍이 들었던 얼굴에 또다시 핏자국이 더해졌다.
이무가 울컥 피를 토했다.
“말해!”
관리가 호통을 쳤다.
“네놈은 신비궁 백 개를 망가뜨렸어. 죽는시늉으로 엄살떨 생각은 접어라!”
아파서 혼절한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이무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말없이 있었다.
궁노원 관청 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 한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관청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황성사의 사람들이 온 것이었다.
“물어보셨소이까?”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투로 물었다. 궁노원 관리들은 못마땅한 눈치였다.
“지금 심문 중이오.”
궁노원 관리 중 하나가 대답했다.
“우리 제거(提舉: 관직명) 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심문이 힘들면 우리 황성사로 넘기라 하셨소. 괜히 국사를 방해하지 말고.”
황성사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우리 궁노원의 일이오.”
궁노원 관리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궁노원 병졸 하나가 이무 앞에서 몸을 굽히며 물었다.
“이무, 너도 군에 있었던 사람이니 황성사가 어떤 곳인지 잘 알 거다. 저들 손에 들어가면 죽느니만 못한 고초를 겪을 거야.”
병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할 말 있으면 냉큼 해. 어차피 죽을 몸, 고생하지 말고 깔끔하게 가는 게 좋아.”
이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저쪽에 꿇어앉아 있던 장인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인, 대인, 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제가 저자의 돈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발석거 두 대가 필요하다고만 했습니다. 제가 돈에 눈이 멀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 세작이 아닙니다. 저자가 세작인 줄도 몰랐고요. 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대인. 살려 주십시오.”
장인의 통곡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황성사에서 나온 관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이무에게로 다가갔다.
“이무, 할 말이 없느냐?”
그 말에 이무가 마침내 고개를 들고, 황성사 관리를 올려다봤다.
“할 말이 있습니다.”
이무는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전 세작이 아닙니다. 전 폐하를 알현해야겠습니다.”
황성사의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실소를 터트렸다.
“폐하를 알현하겠다고? 넌 네가 누군 줄 모르느냐?”
“소인은 폐하께 보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이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보물? 뭘 바치겠다는 거냐? 그래 봤자 다른 놈의 이름일 테지. 그런 핑계로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접어라.”
이무는 웃음을 터트리며 일어나 앉으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폐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이 이무가 신비궁보다 백배 강력한 병기를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허튼소리!”
풍림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풍림이 몸을 돌려 황제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 정씨 여인이 남긴 폐단입니다. 다들 저마다 신기한 기술을 들먹이며 폐하를 알현하겠다고 나오지 않습니까.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上有所好 下必甚焉 – 맹자).”
진소가 사직을 청하며 두문불출하는 상황이었기에 대전에서는 풍림 한 사람만이 목청을 높이며 떠들고 있었다.
하긴, 이 세상 사람이 모두 정 낭자일 수는 없는 법인데.
신비궁보다 백배 강력한 병기를 만들었다는 소식에 반색하던 황제는 멋쩍은 얼굴로 기쁜 표정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했다.
“황성사에 명해 조사토록 하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황제가 결론을 내렸다.
“폐하, 이무가 그 물건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친히 폐하께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황성사 제거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황당한지고!”
황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풍림이 추상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자가 무슨 기술을 개발했는지 심형원(審刑院), 대리시, 황성사에서 조사하면 밝혀질 일이오. 조사하여 죄가 있으면 벌을 내리고, 공이 있으면 국법에 따라 상을 내릴 텐데, 어찌하여 걸핏하면 폐하를 알현하겠다는 게요!
얼마나 뛰어난 기술인지 조사하기도 전에 함부로 보물이니 뭐니 운운하는 바람에 폐하까지 마음이 흔들려 혜안을 잃으셨습니다. 이는 정씨 여인의 선례 때문에 심지가 흐트러졌기 때문입니다!”
하긴, 그건 그렇지.
정씨는 중노보다 백배 강력한 병기를 바치겠다 공언했고,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그러니 무엇보다 백배 강력하다는 말에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씨가 신비궁으로 상을 받은 일로, 마음이 흔들린 이가 많은 것도 사실일 테지. 그 말만 믿고 친히 만나 주는 건 경솔한 일이야. 그랬다간 조당이 저잣거리와 다름없지 않겠는가. 황제의 위엄이 있는데 그럴 수야 없지.
그러고 보면 정씨가 남긴 폐단이긴 하군.
황제가 막 입을 열려는데, 누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소이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조회에 나오는 일이 드물고, 조회에서 입을 여는 일은 더 드문 장순이었다.
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던 고능준은 장순을 보자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쩐지 긴장이 됐다.
물론 고능준도 딱히 장순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사사건건 맞서는 진소에 비하면 한결 나았다. 애초에 장순과 고능준은 엮일 일이 없는 사이였다. 학문에 심취한 장순은 도리를 논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는지라 고능준에게 영향을 미칠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그 손에 꼽을 정도 중 한 번은 평생 잊지 못하겠지만.
저자가 왜 나서는 거지?
정신을 차린 고능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순을 쳐다봤다.
“뭘 증명했단 겁니까?”
풍림이 물었다.
“그자가 바치겠다는 병기의 위력 말이외다. 이미 증명되지 않았소?”
장순의 말투는 담담했다.
“뭐가 증명됐다는 겁니까?”
풍림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순이 옷소매 속에서 손을 내밀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자 말이오.”
모두가 장순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범강림의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지목을 받은 범강림은 순간 당황했다.
“저요?”
“그래, 자네 말일세. 자네가 직접 보지 않았는가?”
장순의 물음에 범강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네, 맞습니다. 소관이 봤습니다!”
범강림이 돌연 흥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방 두 칸이 날아갔습니다. 신비궁 백 개로도 못 당할 위력이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범강림은 털썩 무릎을 꿇고 앞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폐하, 실로 어마어마한 병기입니다!”
그래. 눈 깜짝할 새에 방 두 칸을 날릴 정도면 신비궁보다 백배 강력한 건 사실이지.
황제는 몸을 들썩였다. 이번에도 범강림의 말이 황제를 흥분시켰다.
“이무를 들라 하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내시는 풍림이 나설 기회를 주지 않고 얼른 목청 높여 대답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장강주!
풍림이 고개를 돌려 장순을 바라봤다. 하지만 장순은 풍림을 바라보지 않고, 두 손으로 홀판(笏板: 대신들이 조회 때 드는 막대)을 든 채 말없이 서 있었다. 한 번도 입을 연 적 없다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기밀 유출을 방지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궁노원 군기사의 작업장은 커다란 연못인 곡강지(曲江池) 근처에 위치했다. 황실의 공원이자 군사 무기를 만드는 중요한 곳이다 보니 일반 백성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도 경성 안에 있다 보니 궁노원에서 흘러나온 굉음에 경성 사람들은 다들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금군 복장을 한 병사 십여 명이 거리를 질주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붐비던 거리는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뭔가 큰일이 났구먼!
경성은 그 어느 곳보다 소식이 빨리 퍼졌다. 나는 듯이 뛰어가는 금군과 함께 궁노원에서 일이 생겼다는 소식도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하인 하나가 큰 저택으로 구르다시피 뛰어 들어가며 외쳤다.
소리를 듣고 안에서 사내 몇 명이 뛰어나왔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대문 쪽이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칼을 든 금군이 우르르 들어왔다.
사내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전부 포위해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무관이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무슨 일입니까?”
새파랗게 질린 이 대노야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네가 이신이냐?”
무관의 물음에 이 대노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인은 폭죽 공방을 운영하며 성실히 납세하였습니다. 결코······.”
이 대노야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무관이 말을 잘랐다.
“이무가 네 아들이냐?”
이무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