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10
교랑의경 510화
“손님, 이쪽입니다.”
고개를 들고 이쪽저쪽을 두리번거리던 곽원(郭元)이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접대하는 점원이 문을 열자 곽원은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라.”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곽원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꿇어앉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닥에 있는 정교한 꽃문양뿐이었다.
“네가 사천대의 곽복지(郭复之)더냐?”
곽원이 예를 표한 후 네 하고 대답했다.
“네가 월식이 있을 거라고 계산했다지?”
곽원은 오늘 아침에 사천대 관원들에게 실컷 욕을 얻어먹은 일과 계산이 잘못됐다며 지적하던 일들이 떠올라 잠시 머뭇거렸다.
– 며칠이나 배웠다고! 그럼 황도(黃道)와 백도(白道)도 예측할 수 있더냐?
– 조금은요.
– 조금?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어쩌면 내가 정말 틀렸을지도.
“괜찮으니 대답해 봐라. 편히 말해도 된다. 나 역시 편히 듣겠노라.”
곽원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네. 보름에 월식이 있을 거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물론 틀릴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가서 너 대신 물어보고, 답을 알려 주마.”
물어본다고? 누구한테?
곽원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소년은 어느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펄럭거리는 옷자락이 곽원의 시야에 어른거렸다.
곽원은 다시 멍하니 고개를 돌려 눈앞에 차려진 연회 음식을 쳐다보았다. 실로 풍성한 음식이었다.
경성으로 올라와 사천대의 학생이 된 지 벌써 삼 년이었지만, 이런 산해진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워낙 고급 음식점이다 보니 곽원으로서는 발을 들일 기회조차 없었다.
저 귀인이 계산은 하고 가셨나 모르겠네.
곽원이 산해진미를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진안 군왕은 벌써 마차에 앉아 있었다.
“전하, 정 낭자한테 물어보러 가시려고요?”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진안 군왕이 힐끔 쳐다보았다.
“당연히 물어봐야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묻진 않을 것이다.”
내시가 퍼뜩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똑똑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똑똑한 일이지. 특히 그 남이 황제라면 더더욱.
근래 들어 경사가 이어지면서 조회 때도 모처럼 논쟁이 없었고, 황제도 모처럼 근정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안비마마께 가 보시지요. 요즘 식사를 잘 못 드신다고 하옵니다.”
한쪽 옆에 있던 내시의 말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밥을 못 먹어? 태의를 부르거라.”
내시가 네 하고 대답했다.
“가희와 예인들도 부르고. 짐이 안비의 처소로 가서 같이 봐야겠다.”
황제가 또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대답하고 나가던 내시는 문가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깜짝 놀라 어이쿠 소리를 내며 욕이나 해 주려고 고개를 돌리던 내시가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전하.”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진안 군왕은 내시를 향해 손을 휘휘 젓고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며칠 만에 군왕을 보는지라 황제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입궐을 해? 탄핵을 당할까 두렵지도 않느냐?”
황제가 짐짓 정색을 하며 물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여느 때처럼 헤헤 웃지 않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폐하.”
진안 군왕은 예를 올린 후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뭘 그리 수상쩍게 굴어?”
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폐하.”
진안 군왕이 황제 곁으로 바짝 다가와 귓속말을 하려고 하자, 황제가 웃으며 진안 군왕의 어깨를 탁탁 쳤다.
“군자는 남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 없어야 하느니라. 체통을 지켜야지. 앉거라.”
진안 군왕이 황제 옆에 앉았다.
“폐하, 소문을 들은 게 있사옵니다.”
진안 군왕이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지한 표정의 진안 군왕을 보니 황제도 호기심이 생기는 눈치였다.
“소문이라니?”
진안 군왕이 황제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듣자니 월식이 있을 거라고 합니다.”
진안 군왕이 손을 들어 가리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황제가 놀란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월식?”
진안 군왕은 황제의 말에 놀란 듯 얼른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말했다.
“폐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황제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사방을 쭉 훑어보다가 내시를 보며 물었다.
“왕래귀(王來貴), 네 입이 가볍더냐?”
왕래귀라는 이름을 가진 내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끔뻑이며 잠자코 황제를 쳐다보다가, 앞으로 몇 걸음 나서며 물었다.
“폐하, 지금 소인에게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내시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군가가 대전에 들었을 땐 소인의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사옵니다.”
황제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폐하, 지금은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넌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느냐?”
황제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왜 황제는 들어 보지도 못한 일을 남들은 다 알고 있는 거지?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황제의 자리는 그랬다. 황제가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일이란 사실 아래에 있는 신하가 들려주고 싶고, 알려 주고 싶은 일에 불과한 법이니까.
내시가 눈을 내리깔았다.
“제가 최근 천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진안 군왕은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황제는 또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네가 이번엔 천문에 관심이 생겼나 보구나.”
진안 군왕은 어릴 때부터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며칠은 지리에 관심을 보이고, 또 며칠은 칠현금에 관심을 보이다가, 또 며칠은 바둑에 관심을 보이는 등 종잡을 수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공부가 그토록 지지부진하지는 않으리라.
너무 오냐오냐 키운 탓이겠지.
“어쩌다 또 천문에 관심이 생긴 것이냐?”
황제가 웃으며 물었다.
“재미있잖아요.”
진안 군왕이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재미있어서라고? 그 여인 때문이겠지. 말할 때나 행동할 때나 늘 그 여인이 빠지지 않잖아. 그 여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다 관심을 갖고 해 보려 드니까.
그게 아니라면 지난번엔 왜 간식까지 만들어 가져왔겠어? 이젠 집에서 술을 빚는다고 하려나? 어엿한 사내가 체통을 지켜야지!
“재미는 무슨.”
황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궁에서 나갔으니 단속할 사람이 없다 이것이냐? 공부는 아예 내팽개친 게야?”
진안 군왕이 겁먹은 듯 코를 만졌다.
“폐하, 지금 그런 말씀을 할 때가 아닙니다. 무려 월식이란 말입니다. 제가 사천대에 가서 물어봤더니, 거기서도 논쟁이 벌어졌답니다. 월식을 계산해 냈다는데, 진짜라고 하기도 하고 계산이 틀렸다고 하기도 하면서 논쟁이 끊이지 않았대요.”
그랬군.
황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들 말을 뭐 하러 듣느냐? 사천대가 언젠 안 그랬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역법이니 천상이니 하며 싸우기만 하지. 그런데 결과는? 짐은 그놈들이 뭘 계산해 낼 것이라 바라지도 않는다. 괜히 짐의 잘못이라며 물고 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이젠 다르잖습니까.”
진안 군왕이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아둔해도, 아둔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황제가 진안 군왕을 힐끔 보고 눈치를 챘다.
“위낭, 혼인을 하고 싶으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위낭,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아.”
“네, 그래도 경왕이 아직 어리잖습니까. 아직 너무 어려서 지금은 제가 떠날 수 없습니다. 경왕이 누군가를 놀라게 하는 것도 싫고, 누군가 때문에 경왕이 놀라는 것도 싫습니다.”
황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애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결, 결국 그 모양일 텐데.”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달라질지도 모르죠.”
그래.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
황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느니라. 태후께 가 보거라.”
진안 군왕이 네 하고 대답한 후 예를 올리고 물러갔다.
“폐하, 안비마마께 가시겠습니까?”
내시가 나지막이 물었다. 황제는 손으로 탁자를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 가겠다. 안비에게 상으로 가무를 내리거라.”
내시가 네 하고 대답했다.
월식이라······. 올해는 일식에 이어 월식까지 있구나. 정말이지······.
황제의 얼굴에 차츰 수심이 드리웠다.
그리 재수가 없을 린 없는데.
“여봐라.”
황제의 부름에 내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정 낭자를 부르거라.”
하지만 신나게 중서성으로 달려와 황제의 말을 전하던 내시에게 돌아온 것은 진소의 매서운 질책이었다.
“또 누가 그 여인을 발고한 것이냐? 아니면 이미 관직을 받기라도 했다더냐?”
진소의 호통에 내시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엔 왜 또 절차를 무시하고 그 여인을 궁으로 부른단 말이냐?”
“폐하께서 하문하실 게······.”
“국사를 물으신다더냐? 그렇다면 문무백관이 있지 않느냐. 사사로운 일을 물으신다더냐? 그렇다면 황성사가 있지 않느냐.”
진소가 내시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폐하께서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여인을 부르신단 말이냐?”
내시는 호통에 놀라 몸을 움츠리고 풀이 죽은 채로 돌아갔다.
“폐하께서 황당한 짓을 벌이시면, 폐하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너희들이 나서서 말씀을 올려야지!”
내시는 겁에 질려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아났다. 달아나는 내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진소는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폐하께서 조정 대신을 가까이 두시는 것도 꼭 좋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법인데, 하물며 여인이 아닌가! 겉보기엔 영예로워 보이지만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순 없었다.
진소의 반대에 부딪히자 황제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조정의 법도가 지엄하니 반박할 논리가 없지 않은가. 또다시 진소의 심기를 건드려 사직을 청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할수록 참······. 강직한 진소조차도 걸핏하면 사직을 청하고 들다니. 사람은 다 변하기 마련이구나.
황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발고한 것도 아니고, 관직을 받은 것도 아니라, 짐이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짐이 관직과 작위를 내려야겠구나. 그때는 뭐라고 하나 어디 두고 보자.”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었고, 지금 당장 긴박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진안 군왕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라 하거라. 아마 지금쯤 눈물을 앞세운 태후의 압박에 시달리거나 태후 때문에 눈물을 뽑아내고 있을 게다.”
아마도 후자겠지.
“나한테 묻는다고요?”
정교랑의 저택 안.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궁금하시대요. 보름에 정말 월식이 있어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안 군왕은 멈칫하다가 정교랑을 골똘히 보며 물었다.
“아니, 그게 보여요?”
정교랑이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고 흔들어 보였다.
“그게 어떻게 보여요. 계산을 해야죠.”
“손가락을 꼽으면서요?”
진안 군왕은 더욱 호기심이 이는 표정이었다.
“아니요. 역법으로 계산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아, 소리를 내며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폐하께 그렇게 말씀 올리면 될까요?”
진안 군왕이 머뭇거리며 묻자 정교랑이 웃으며 대꾸했다.
“안 될 게 뭐 있어요? 남 앞에서 못 할 말도 아닌데. 어차피 모두가 보게 될 거예요.”
“난 낭자한테, 성가신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은 다시 웃음을 짓고 손을 거두어 옷소매를 몸 앞으로 모았다.
“정씨는 천도를 보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으며, 천도를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정교랑이 느릿느릿 말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화를 두려워한 적도, 화를 피한 적도 없지. 단 한 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