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32
교랑의경 532화
하긴, 장강주 집안이면 조상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연이어 진사를 배출한 게 어디 한두 번이겠나. 조상은 관두고 장강주 대에만 해도 벌써 넷이나 배출했는데.
스승님이자 연장자께서 주신 아랫것이니, 함부로 꾸중할 수도 없고.
따끔하게 호통을 치려던 정 이노야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전시 준비에 힘쓰거라.”
정 이노야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떴다.
“공자님, 우리 방 보러 가요.”
시녀도 정 이노야의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사낭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미 결과를 아는데, 뭐 하러 굳이 보러 가?”
반근의 물음에 시녀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방이 붙은 곳이 아주 떠들썩하거든. 묘회(廟會)나 꽃등 놀이 때처럼 사람도 많고 재미있어. 급제자 중에 사윗감을 고르려고 나온 사람들도 많고.”
대청에 있던 어린 낭자들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경성에 온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가지만 앙상했던 마당의 꽃나무에서도 이제는 꽃봉오리가 생겨나는 걸 보면, 추운 겨울에서 초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때였다. 그런데도 정씨 가문 낭자들은 묘회나 꽃등 놀이는 언감생심이고 저택의 대문조차 나가 본 일이 없었다.
화려하고 볼거리도 많으며 사건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다들 입을 모아 말하던 경성이지만, 그녀들에게는 차라리 강주가 나을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시녀에게서 방을 붙은 곳이 무척이나 떠들썩할 거란 말을 들으니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아씨, 우리가 사공자님을 모시고 같이 가면 어떨까요?”
시녀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은요?”
시녀가 이번에는 정사낭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응낙한 마당에 정사낭이 응낙하지 않을 리가.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분들은······.”
시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사랑과 정오랑, 정칠랑에게로 향했다. 다들 한껏 기대에 차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같이 가요.”
어린 낭자 셋은 순간 너무 기쁜 나머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물론 정칠랑은 금방 도로 털썩 앉으며 뾰로통한 얼굴로 흥 하는 소리를 냈지만.
그런 정칠랑의 모습에 정사랑과 정오랑은 앉아야 할지 일어서 있어야 할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아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럼 어서 옷 갈아입고 같이 출발하세요. 여봐라, 마차를 준비해라.”
시녀가 큰 소리로 외치며 같이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같이 가자고 저러는데 굳이 거절하는 건 좀 아니지.
정사랑과 정오랑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우르르 나가는 모습을 본 정칠랑이 다시 벌떡 일어섰다.
“오라버니.”
정칠랑이 쪼르르 뛰어가 정사낭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난 오라버니랑 같은 마차 탈래요.”
정사낭이 귀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럿이 함께 출타하다 보니 여종들이며 몸종들까지 덩달아 분주해지자 홀로 소외당한 집안 안주인 정 이부인도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반근, 반근.”
종종걸음으로 나온 정 이부인이 여종들에게 분부를 내리고 있는 시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여종들에게 하던 말을 끝마친 후에야 정 이부인 쪽으로 왔다.
“부인, 분부라도 있으세요?”
“사낭이 급제를 했으니 그래도 축하는 해야지.”
정 이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세요, 부인. 돈이 들어가는 부분은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전 아씨를 모시고 방을 보러 다녀올게요.”
말을 마치고 걸음을 옮기던 시녀가 두어 걸음 걷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참, 부인도 같이 가시겠어요?”
시녀가 눈웃음을 치며 묻자, 정 이부인은 눈을 흘기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아냐. 애들 놀러 가는데 내가 거길 뭐하러 가.”
시녀가 웃으며 뒤돌아 나갔다. 시녀의 모습이 마당 문 밖으로 사라지자, 정 이부인의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나더러 준비하라고? 돈은 자기가 내고? 그럼 난 뭐가 돼?
문서로 박아 놨으면 뭐해, 허울뿐인 주인인 것을.
정 이부인은 한숨을 토했다. 그녀는 이런 날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는 않길 바랄 뿐이었다.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벼 끝이 어딘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공자님, 저기까지 어떻게 가죠?”
사환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딱 보니까 처음 보러 온 모양이네.”
옆에 있던 서생이 아둔한 사환과 어리숙한 공자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게. 우린 오밤중부터 와서 기다렸는데.”
그 말에 저쪽에 있던 서생이 고개를 돌렸다.
“원조 형, 이번엔 오밤중부터 기다린 보람이 있군.”
서생은 공수의 예를 표하며 말을 이었다.
“급제를 경하드리오, 원조 형!”
그 외침 소리에 한원조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옆에서 한 무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한원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곁을 지키던 사환과 시종들이 아니었다면, 벌써 누군가의 손에 붙잡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례지만 혼처가 있으시오?”
같은 질문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있습니다, 있어요.”
한원조가 웃으며 대답하자 인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원조와 동료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 급제한 사윗감을 찾느라 아주 난리군.”
웃으며 이야기하던 서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원조, 삼 년 전 일 기억나나? 그때도 사윗감으로 점찍혀서······.”
“아니라니까 그러네. 몇 번을 말해.”
한원조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진 상공 댁은 아니야. 진 상공의 딸 중에 그 글씨를 아주 잘 쓴다던 어린 낭자의 신랑감도 이번에 진사 급제를 했는데, 합격자 방이 붙은 곳에서 고른 건 아니라더군. 그럼 그때 자네를 사위로 맞이하려던 건 대체 누구지?”
“몇 번을 말하나. 글쎄, 그런 거 아니래도.”
답답하다는 듯 해명하려던 한원조가 돌연 말을 멈추고 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기 보세요. 저 급제자를 낚아챘어요!”
시녀가 앞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정사랑과 정오랑은 물론이고 정칠랑까지 흥분되는 표정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나이도 많으면서 뭘 뺏고 저래?”
정사랑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빼앗아야죠. 진사 급제를 하면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일가족 전체의 세금이 줄어들거든요. 세금이 줄면 그만큼 재산을 불릴 수 있잖아요.”
시녀가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 그렇담 재물을 불러들이는 복덩이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쪽이 또다시 떠들썩해지면서, 서너 명이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칠랑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정사낭 역시 그런 누이들의 모습에 못 말리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는 나랑 같이 방을 보러 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이들을 구경하러 온 것이냐?”
정사낭이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방을 보고 싶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정사낭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앞쪽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산인해였다.
방에 붙은 이름 석 자를 내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결과를 아는데, 굳이 뭐하러 봐.”
정사낭의 말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저기······.”
정교랑이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부르자, 시종 네다섯 명이 즉시 다가와 일제히 대답했다.
“네, 아씨.”
“길을 좀 내야겠어. 나랑 오라버니가 가서 볼 수 있도록.”
시종들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한 후, 험상궂은 얼굴을 앞세우며 인파 속에서 길을 열었다. 순식간에 길이 나자 정사낭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 설마 저 시종들의 이름을 모르는 거야?”
정사낭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몰랐네요. 돌아가면 기억해 둘게요.”
정사낭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정교랑을 보호하며 방이 붙은 곳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저 사람은, 누구지?
순식간에 벌어졌다 다시 닫히는 인파를 보며 한원조가 생각에 잠겼다.
저 여인과 젊은 서생도 방을 보러 가는 건가?
“원조, 원조.”
동료들이 호들갑을 떨며 한원조의 어깨를 탁 치는 바람에, 생각이 끊겼다.
“저기 좀 봐. 저기 저 사람 말이야.”
동료가 한원조의 어깨를 치며 한쪽 옆을 가리켰다.
시녀는 여전히 마차에 탄 채로 어린 낭자들에게 이런저런 구경거리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저 여자애 말인데, 왠지 낯이 익지 않아?”
동료가 한원조를 보며 물었다.
“그때, 자네를 찾아왔던 그 몸종 아닌가?”
“가세. 우리가 지금 이런 거나 구경할 때인가? 얼른 돌아가 이제 마음 푹 놓고 전시 준비에 매진해야지.”
한원조는 웃으며 화제를 돌리고 돌아섰다. ‘전시’라는 두 글자에 퍼뜩 정신이 든 두 동료는 순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가세, 가자고.”
두 사람은 몰려드는 인파를 거슬러 나와 한원조를 따라 자리를 떴다.
정교랑와 정사낭은 어느덧 급제자 명단 앞에 서 있었다. 이미 석차를 아는지라 이름이 대략 어디쯤 있을지 알고 있는데도 정사낭의 시선은 맨 앞 수석의 이름으로 향했다.
진호.
“그 진 공자네. 나이도 어린데 저리 대단할 줄이야.”
정사낭이 놀라움과 부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이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나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비교할 필요도, 마음에 담아 둘 필요도 없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비교하는 거 아냐.”
정사낭은 웃으며 맨 마지막 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이름이 보이자 순간 가슴이 쿵쾅대며 흥분됐다.
“저기 봐. 내 거야, 내 거.”
과연 자신의 이름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그냥 들었을 때와는 다른 기쁨이 있었다. 흥분한 정사낭의 모습을 보고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빼고 석차를 확인하더니 입을 삐죽였다.
“맨 끝에 있으면서도 저리 좋아하다니, 수석이라도 했으면 까무러쳐 실려 나가는 건 아닌가 몰라.”
“공자님!”
경성 밖으로 십 리쯤 떨어진 곳에서 말 두 필이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사환이 앞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저기 보세요. 주 공자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뒤쪽 말에 타고 있던 공자가 모자를 벗고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이번 예부시의 수석 급제자 진호였다.
수석 급제자 진호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야, 주 시금, 오느라 고생 많았네.”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간 진십삼이 공수의 예를 표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은 아직 비옷 차림이었지만, 옷에 묻은 빗방울은 이미 바람에 마른 후였다. 모자를 벗은 주육낭이 진십삼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이구,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진 성원(省元)께서 친히 마중까지 나오시고.”
주육낭이 공수의 예를 표했다. 진십삼은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자, 자, 더 불러 봐. 그래야 비도 오는데 꼭두새벽부터 여기까지 마중 나온 보람이 있지.”
주육낭은 퉤 하고 침을 뱉더니 뒤에서 화관(花冠) 하나를 불쑥 꺼냈다. 진십삼이 놀라 소리쳤다.
“어이, 뭘 하려는 거야?”
진십삼은 얼른 말 머리를 돌렸지만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어느새 말을 몰아 온 주육낭이 손을 뻗어 말고삐를 홱 낚아챘다.
“난 그런 거 쓰기 싫다고!”
진십삼이 소리를 질렀지만, 주육낭의 완력을 당해내긴 역부족이었다. 진십삼의 머리에 화관이 씌워졌다.
“다들 진 성원이라 부르는데, 꽃장식 정도는 해 줘야지!”
주육낭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전시가 남았잖아! 꽃장식은 무슨!”
진십삼은 손을 뻗어 빼내려 했지만, 주육낭이 막았다.
“어이, 절름발이, 겁이 나서 그래? 꽃까지 꽂았는데 전시에서 십 등 안에 못 들까 봐?”
진십삼은 어이가 없는 듯 주육낭을 뿌리쳤다.
“자극할 필요 없어. 소용없으니까.”
진십삼은 말을 몰아 앞장서 가면서도, 머리에 꽂은 우스꽝스러운 화관을 벗지 않았다.
“난 분명 십 등 안에 들어 꽃을 꽂을 거야. 이 꽃은 너무 흉해서 싫은 것뿐이야.”
“흉하긴 하네.”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어떤 꽃을 골라야 예쁜지도 모르겠고 해서······.”
“길에서 꺾은 거지? 돈 주고 산 거 아니고?”
주육낭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몰아 앞으로 쫓아갔다. 말 두 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성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