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42
교랑의경 542화
같은 시간, 주씨 저택은 무척 평온했다. 주육낭의 거처에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이건 내가 네게 주는 선물이다.”
주육낭이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 앞에 놓인 큰 상자를 앞으로 밀었다.
“많다고?”
그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별로 많지도 않아. 너 주려고 삼 년 동안 모아둔 거니까.”
자문자답하던 주육낭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상자를 홱 가져왔다.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럼 내가 삼 년 내내 그 애를 그리워한 것처럼 들리잖아. 그렇게 구구절절 말해서 뭐해!”
주육낭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또다시 긴 한숨을 뱉고는 상자를 앞으로 쭉 밀었다.
“어이, 네 거다.”
주육낭이 무심하게 말했다.
“묻긴 뭘 물어. 주면 그냥 받아. 뭐냐고 묻지 좀 말고.”
주육낭은 잠시 침묵하다가 상자를 도로 끌어당겼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그 고약한 성격에 나한테 이걸 냅다 던져 버릴지도 몰라.”
미간을 찌푸리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었다.
“돌려줄 테면 돌려주라지. 이건 꼭 내가 그 여인이 받아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잖아. 갖기 싫으면 갖지 말든가!”
혼자서 성을 내던 주육낭이 중얼거렸다.
“진십삼한테 선물을 줘? 진십삼이 자기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주육낭이 한창 구시렁대던 찰나,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정 아씨께서 오셨······.”
사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육낭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애가 왔어! 그 애가 왔다고!
제 발로 나를 찾아오다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주육낭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바닥에 있던 상자를 들어 올려서 아무 곳에나 쑤셔 넣으려 허둥댔다.
하지만 부피가 큰 상자를 숨길 곳을 찾지 못한 주육낭은 상자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상자에 발이 걸려 버렸다. 주육낭의 힘이 워낙 센지라, 상자는 발에 차인 것처럼 뚜껑이 열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금은으로 만든 팔찌와 비녀, 반지와 아기자기한 목각인형 같은 것들이 상자 안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주육낭이 재빨리 쏟아져 나온 것들을 상자 안으로 다시 담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가에 멈춰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너 주는 거 아니야!”
주육낭이 다급하게 외치면서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사환이 의아한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뭘 저한테 주는 게 아니라고요?”
주육낭이 목을 빼고 사환의 뒤를 내다보았지만, 마당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당에는 회랑 아래에 서서 잡담을 나누며 웃는 시녀 두세 명 외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정 아씨가 왔다며?”
주육낭이 물었다.
“아, 정 아씨 쪽 사람이 왔는데,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사환이 서둘러 대답했다. 주육낭이 사환을 노려보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쪽에서 사람이 온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놀랐잖아!
“아니, 공자님, 정 아씨께서 그 사환의 말을 듣고는 엄청 급하게 나가셨어요. 게다가 시종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데리고 가면서 무기까지 챙기시더라니까요?”
사환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 사환이 오열하면서 말하는 바람에, 문지기들은 무슨 덕승루, 화괴, 고 관인, 누굴 때려죽인다는 그런 말밖에 못 알아들었대요. 노야께서는 그래도 걱정되시는지 공자님께서 한번 가 보시는 게 어떻겠냐고······.”
문지기가 한 말을 떠올리느라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사환은 주육낭이 어느새 자리를 뜬 것도 몰랐다. 주육낭은 정교랑이 급하게 나갔다는 말에 벌써 뛰쳐나간 후였다.
사환은 주육낭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주육낭은 금세 또 사환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어디로 갔대?”
주육낭이 호통치듯이 물었다.
뒷얘기는 하나도 못 들으셨나 보네.
“덕승루요.”
사환이 재빨리 대답했다.
고통스러운 외마디 비명이 들리고, 덕승루 안은 다시 잠잠해졌다.
얼큰하게 취한 것처럼 보이는 사내가 덕승루의 구름다리 난간에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좌우를 살피던 그는 고개를 숙이고 대청을 내려다보았다.
대청 안은 벌써 손님으로 꽉 차 있었고, 흥겨운 술판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대청의 위층에 좌우로 나눠진 별실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관인? 왜 그러세요?”
사내를 부축하던 기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봐.”
취객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웃으면서 기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덕승루에서 비명이 들릴 리가 있나.”
취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름다리 왼편의 별실에서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 무리가 우르르 나왔다.
“어서 가자.”
맨 앞에 선 남자가 살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뒤로 두 사람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따라 나왔고, 앞서 나간 남자와 같은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세 사내를 부축하면서 걸어 나왔다.
“보기에는 어째······.”
취객이 중얼거렸다. 그는 눈을 비비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부축 받는 세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보긴 뭘 보시오! 취한 사람 처음 봐?”
무리 중 가장 앞서 있던 남자가 구름다리를 향해 걸어오면서 취객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고 호통쳤다.
어유 무서워라.
깜짝 놀란 취객이 기녀를 품에 안고 얼른 옆으로 길을 비켰다. 별실에서 나온 무리가 그의 바로 앞을 지나갈 때, 취객은 곁눈질로 부축받는 세 사내를 몰래 훑어보았다.
앞에 있던 두 사내는 오줌을 지렸는지 지린내가 나는 것 외에는 멀쩡해 보인다만, 맨 뒤의 사내는 이상하게 사지에 힘도 없고, 고개까지 축 늘어진 것이 취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취객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때, 대청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들 뭐 하는 자들이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취객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대청을 내려다보자, 덕승루 밖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활을 쥔 채 대청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활?
“저놈들이에요!”
사환이 고개를 들고 구름다리를 올려다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공자님!”
사환의 목소리에는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사환의 애절한 부름이 대청 안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뚫고 취객의 고막에 꽂혔다.
무슨 일이지?
취객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사환의 뒤를 쳐다보았다. 사환의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내들이 손에 쥔 활을 높이 들어 올린 채, 구름다리 위를 조준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취객이 미처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촘촘한 화살들이 그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에구머니나!
취객은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그가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안타깝게도 아랫도리에 힘이 쪽 빠졌다. 곧 지린내가 코 속으로 들어오는가 싶더니, 취객은 술이 깨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쿵 소리와 함께 별실의 문이 열렸다. 별실 안은 외설적인 소리로 가득했다.
“고 관인, 큰일 났습니다!”
기녀에게 술을 받아 마시던 고 관인이 문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인데?”
고 관인이 느긋하게 물었다. 이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자들이오! 거기 멈추······.”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부딪히는 육중한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진짜 큰일이 났나 본데?
별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 관인도 기녀를 확 밀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뭐냐고 묻기도 전에 낯선 사내들이 별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지금 뭐 하는 거냐고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대청으로 뛰쳐나온 기생 어미가 활을 든 채 별실 안으로 들어간 사내들을 향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병사도, 관졸도 아닌 사람들이 어떻게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거예요! 게다가 덕승루에서 사람을 때리다니, 간덩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나?”
기생 어미가 목청껏 외쳤지만,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씨께서 오셨다.”
누군가가 말하자, 층계까지 줄지어 서서 활을 든 사내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곧 여인 한 명이 시야에 들어오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과 구름다리나 층계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눈앞이 번쩍 뜨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등불을 환하게 밝힌 덕승루는 화려한 옷을 입고 제각각 매력을 뽐내며 요염한 눈짓을 보내는 기녀들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짙은 색 치마에 꽃이 수놓아진 단정한 치마저고리를 입은 가냘픈 소녀 하나에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덕승루가 여자 손님을 아예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해가 중천에 뜬 대낮이나 등불 놀이를 할 때가 아니면 여자 손님이 덕승루를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외의 대부분의 시간, 특히 해가 지고 난 뒤의 덕승루는 사내와 기녀들의 천하였다.
사내들은 이곳 덕승루에서 저토록 고상하고 단아한 여인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뒤로 무기를 든 건장한 사내들 여럿이 서 있어서 그런지, 여인의 부드러움은 사내들의 강직함에 대비되어 더욱 강조되고, 여인에게서는 기이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놓고 입을 벌려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 덕분에 대청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씨.”
두 시종이 등에 업고 온 정사낭을 정교랑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공자님!”
사환이 울면서 정사낭을 향해 기어갔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눈을 꼭 감고 있는 정사낭을 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얼굴에는 상처가 별로 없고, 있더라도 피부가 까진 정도의 외상이 전부입니다.”
말을 전하던 시종이 머뭇거리며 정사낭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만, 몸을 좀 다쳤습니다. 손목이 부러진 듯합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뒤에 서 있던 시녀가 정교랑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정교랑이 그녀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덕승루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씨?
누구의 주의도 끌지 못했던 기생 어미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 우리 관인의 누이가 누군지는 알아?
기생 어미의 귓가에 사환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저 사환, 정말로 누이를 말한 거였어? 정신 나간 소리를 한 게 아니고?
설마 저 여인이 바로 정 공자의 누이?
기생 어미가 여인을 쳐다보았지만, 층계에 서 있던 여인은 기생 어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허리를 곧추세운 채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여인을 보니, 기생 어미는 알 수 없는 경외감이 들 정도였다.
“어디 있지?”
여인이 물었다.
이제 나한테 잘못을 물으려나 봐! 분명히 내게 매질을 할 거야!
언제나 이랬어. 무슨 일이 나기만 하면, 다 우리 탓이 되지. 원숭이 보라고 닭을 죽여 일벌백계로 삼는 이야기 속에서 닭이 되는 건 늘 우리였어. 누구 잘못이든 상관없이 욕을 먹고 매를 맞는 사람은 바로 우리라고.
기생 어미가 속으로 외치면서 뒷걸음질 쳤다.
“뭐, 뭐 하려는······.”
기생 어미가 목청을 높이던 찰나, 단정하게 서 있던 여인이 걸음을 옮겨서 기생 어미 앞을 지나쳐 갔다. 기생 어미는 흠칫 놀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지나가?
기생 어미가 고개를 돌리자, 시종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면서 치맛자락을 흩날리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의 치마저고리 가장자리에 수놓은 금실이 불빛에 비치면서, 여인이 지나간 자리에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보였다.
정 관인······.
정? 정씨 가문의 여인?
정씨! 정 낭자!
설마 저 여인이 그 정 낭자!
기생 어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주 바보!
“따지고 보면, 바보 집안이긴 하네.”
기생 어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하는 자들이냐?”
고 관인이 느릿느릿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은 별실 한가운데서 자신을 향해 화살을 겨눈 시종들에게 향했다.
잠시의 소란이 지나가자, 별실 안은 조용해졌다.
고 관인은 사내들이 집에서 부리는 시종들이라는 사실을 빠르게 눈치챘다. 그래서 시종들이 아무리 신체 건장하고 흉악해도, 고 관인을 두렵게 하진 못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황궁이 있는 경성이었다. 아무렇게나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곳은 결코 아니었다.
고 관인의 물음에 시종들은 대답 대신 사내 몇 명을 방 안으로 던졌다. 바닥에 고꾸라진 사내들을 알아본 고 관인은 곧바로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떴다.
바닥에 고꾸라진 사내들은 고 관인이 정사낭을 손보라고 보냈던 시종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