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88
교랑의경 588화
“그럼 평왕은 뭘 해야 합니까? 귀비를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하라고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고 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하지만 고능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 일은 평왕과는 무관한 일이니, 귀비를 대신해서 억울함을 호소해서는 안 되지. 폐하는 평왕의 부친이고, 귀비는 생모야.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어. 지금 평왕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것은 오직 효도뿐이다.”
막료가 고능준의 말에 동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귀비가 잘못을 인정해서도 안 되고, 우리도 죄를 인정해서는 안 되지만, 자녀들이라면 할 수 있는 게 하나 있긴 하지요. 부모 간의 불화가 생겼을 때, 자식 된 도리로서 속상하다고 자책하는 것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평왕이 뭘 하면 되는 거요?”
막료의 말을 듣던 고 관인이 성가시다는 투로 물었다.
“자신이 얼마나 속상한지 설명하고, 어머니를 대신해서 문책을 받겠다는 상소문을 써야지.”
고능준의 대답에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뭘 그렇게까지······.”
“뭘 그렇게까지? 자식이라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네놈은 뭐 그리 불만이 많아! 언젠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되더라도, 네놈은 날 위해서 무릎 한 번 꿇지 못하겠다는 말이냐! 내 일은 너와 무관한 일인 게야?”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고 관인에게 호통쳤다. 고 관인이 난감해하면서 말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건 별개의 일이지요.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저주하실 필요까지 있습니까.”
고능준이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 관인을 흘겨보았다.
“네놈이 불러온 화로도 충분하다. 나 스스로 저주하지 않아도 지금 충분히 재수가 없으니까.”
제가 불러온 화라뇨. 이건 다 그 몹쓸 정가 계집 때문인데.
그때 덕승루에서 그 계집을 죽였어야 했어. 괜히 살려 둬서 아버지한테 꾸중만 듣고.
고 관인은 다시 한번 후회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이 벌어진 것은 다 폐하 때문입니다. 일찍이 평왕을 태자로 책봉하셨더라면 괜히 다른 사람들이 딴생각을 품을 수도 없었을 텐데.”
고 관인이 재빨리 화제를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제 생각에는 폐하께서 확실히 딴생각을 품으신 것 같습니다.”
고능준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나간 일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다.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이제 황제는 그런 생각을 품을 여지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 평왕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데, 황제가 또 무슨 딴생각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이번 일도 무사히 지나가겠지요?”
고 관인이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평왕에게는 별 영향이 없겠으나, 우리 고씨 가문에는 타격이 있을 듯합니다. 제 예상대로라면, 이미 많은 조정 대신이 대인의 탄핵을 추진하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대인께서는 지금 폐하와 대립하고 계신 상태인지라, 폐하께서도 이번 기회를 빌미로 대인의 기세를 꺾으려 들 테고요. 아무래도 이번에 저희에게 오는 타격이 클 듯한데······.”
막료가 말했다.
맞는 말이야. 지금 당장은 황제가 문제다.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어디든 분출할 곳이 있어야 할 텐데. 귀비가 아니라······.
방 안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음해하는 겁니까!”
고 관인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그야 간단하지. 이번 일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고씨 가문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다.”
고 관인이 멈칫했다.
“그러기엔 적이 너무 많은데요?”
설마, 조정의 문무백관 중 절반이 이번 일에 가담했다? 그건 말도 안 돼. 이렇게 판이 커질 때까지 우리 고씨 가문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어.
그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누군가가 혼자서 벌인 일이라면 모르겠지만, 세 사람 이상이 합심한 일이라면 나 고능준이 몰랐을 리가 없어. 더 나아가서 무리를 지어 손을 맞잡고 나를 해하려고 했다면, 내가 진작에 어떻게든 눈치챘겠지.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일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모함인데, 황제가 범인이 귀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태사국에서 태백성의 일을 숨겼던 것.
황제의 말에 따르면, 귀비가 비밀리에 태사국 사람과 내통하여 기밀 정보인 태백성에 관해 알아냈고, 일부러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이라고 했다.
태백성이라······.
사천대 관리들이 근정전에서 했던 말은 믿을 만해. 그들 실력으로 태백성을 발견했을 리가 없고, 발견했다고 한들 그걸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놈들, 멍청하긴 해도 신중한 편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사천대가 생긴 지 그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월식에 관해 목숨 걸고 얘기하는 자가 곽원 하나뿐일 리 있겠나.
월식.
정 낭자.
천문 현상.
– 이미 알아봤는데, 그 학생 혼자 한 일이라더군요. 사천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답니다. 그래서 폐하의 귀까지 들어갔나 봅니다.
– 폐하께서는 정 낭자를 불러 하문하려 하셨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진안 군왕한테 가서 물어보라 하셨고요.
– 아마 정 낭자도 월식이 있을 거라 했겠죠. 그러니 폐하께서 그 곽원이라는 학생의 청을 응낙하신 겁니다.
고능준의 귓가에 아득하게 맴돌던 말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고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폐하께서 정 낭자를 부르시려고 한 게 이 때문이었군.”
고능준이 작년에 막료의 말을 듣고 내뱉었던 말을 다시 한번 읊조렸다.
생각지도 못했구나.
작년에 했던 말을 지금 다시 하는 것임에도, 이리도 딱 떨어질 수가 있다니.
“큰일 났다.”
진십삼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옆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시녀 둘이 화들짝 놀랐다.
“공자님.”
시녀들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진십삼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진십삼은 시녀들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이미 문밖으로 쌩하니 나가버린 후였다.
“공자님, 공자님, 겉옷 챙기셔야죠!”
시녀들이 다급하게 비단 겉옷을 챙겨 들고 진십삼의 뒤를 쫓아갔다.
진십삼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시녀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공자님이 다시는 안 오실 줄 알았어요.”
시녀가 웃었다. 진십삼이 시녀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네 생각인 게냐, 네 아씨의 생각인 게냐?”
“당연히 제 생각이죠.”
시녀가 빙긋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래서 네가 네 아씨를 능가할 수 없는 게다.”
진십삼이 고개를 젓고는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녀가 진십삼의 뒷모습을 보면서 혀를 날름거렸다.
“태백성을 알고 있었다고요?”
마당 안에 들어선 진십삼은 대청 안에 앉을 새도 없이 회랑 아래에서 바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본 거예요?”
진십삼의 물음에 정교랑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왜 말하지 않았어요?”
진십삼이 또 물었다.
“아무도 안 물어보던걸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은 복잡한 표정으로 정교랑이 진지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웃어서는 안 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안 물어보던걸요.
“이렇게나 큰일을······. 조정에 바로 알렸어야죠.”
진십삼이 감탄하며 말하자 정교랑이 진십삼을 바라보았다.
“진 공자, 천문 현상에 관한 일은 길흉을 예측하는 일이라, 굳이 묻지 않는 한 먼저 말할 수는 없어요. 사천대나 태사령처럼 천문 현상을 관측하는 게 일인 사람들을 제외하고요.”
지금 화난 건가?
진십삼이 잠시 흠칫했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랬군요. 제가 그것까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혹시 화난 건 아니죠?”
“화 안 났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진십삼이 미소를 지으며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가 태백성을 보고도 말하지 않은 것을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고, 그저 감탄한 겁니다.”
진십삼이 웃음기를 거두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번에도 낭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또 뜻밖의 일에 휘말리게 된 것에 대해서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또 뜻밖의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반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이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마자 반근은 흠칫 놀랐다.
내가 왜 역시라고 했지?
“무고하게 어떤 일에 휘말리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다 그에 따른 이유가 있을 테니까.”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진호가 웃었다.
“낭자가 한 그 말이 충분한 이유가 되겠네요.”
“말하는 이에게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예전에 아씨와 군왕 전하께서 나누시는 대화도 못 알아들었는데, 이제는 진 공자님과의 대화도 알아들을 수가 없네.
반근이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와서 얘기해요. 날씨가 좋지 않네요. 곧 비가 내릴 거예요.”
정교랑이 진호에게 안쪽으로 들라는 손짓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다고?
반근과 진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도 불지 않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쬈다.
“아, 그럼 저는 햇볕 아래 널어 둔 혼례복을 걷으러 갈게요.”
반근이 서둘러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아씨께서 비가 온다면 꼭 올 거야.
혼례복이라······.
진호는 잠시 멈칫했다가 시선을 거두고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는 말을 입에 올리신 순간부터 낭자와 연관된 일이 되었습니다.”
자리에 앉은 진호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날 찬합을 받고 마당을 떠난 뒤로, 진호는 정교랑을 다시 보게 될 때 뭔가 다른 느낌을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정교랑을 마주한 지금 진호는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고 느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 두 사람의 관계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았다.
맞아, 변한 건 없어. 예전과 똑같아.
이것 봐, 역시나 또 어떤 일에 휘말리게 되었잖아?
“월식 전에 폐하께서 진안 군왕을 시켜서 낭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던데요?”
진호가 물었다.
“맞아요. 월식이 있었냐고 내게 물어봤었어요. 그건 별로 특별한 게 아니죠. 월식은 누구나 계산해낼 수 있는 거니까요. 나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월식이야 흔한 것이니 문제 될 건 없어요. 다만, 낭자에게 물었다는 게 중요하죠.”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진안 군왕이 낭자에게 물어봤다는 건, 누구나 알아도 되고, 알 수도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물었는지는 오직 낭자와 진안 군왕 둘만 아는 게 되죠.”
“황후마마께서 후궁의 모든 일을 관장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계신 듯합니다. 안비가 황자를 잃어도 폐하께서 안비에 대한 총애를 거두지 않고, 매일 안비궁에서 침수에 드시는 것도 황후마마의 조언 때문이라고 하고요.”
보고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더 잿빛으로 변했지만, 고능준의 표정은 담담했다. 방 안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보고하던 사람은 차마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궁에 있는 사람은 모두 황후마마의 사람들이고, 태후궁에 있는 자들도 어느 쪽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 여인, 참으로 잽싸게 움직이는군. 잠깐 사이에 사람을 전부 바꾸다니, 폐하의 의심을 살 걱정은 하지도 않나?”
고 관인의 말에 보고하던 사람이 고개를 살짝 들고 조용히 대답했다.
“사실 근래에 바꾼 건 아니고, 어느 순간부터 바꾸기 시작한 듯합니다.”
뭐라?
고 관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써 태상예원(太常禮院: 관직명)을 시켜 관까지 짜 놓고 부장할 물건까지 정리해 두었던 그 황후가? 곧 숨이 넘어갈 듯했던 그 여인이 어찌 후궁을 관장하게 됐단 말인가!
웃기지도 않은 소리!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태후와 귀비가 두 눈 똑바로 뜨고 살아있거늘, 어떻게 그게 가능하냔 말이야!
“그럴 리가 없기는. 본디 사람을 죽도록 물어뜯을 수 있는 개는 바로 죽은 듯이 구석에 숨어 지내던 개다. 황후마마께서 이번 한 번을 물어뜯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숨죽이고 살았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탄복할 일이지.”
고능준이 평온하게 말했다.
“이건 절대 황후마마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황후마마께서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일이거나,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지 않은 한 황후마마께서 이런 일을 벌이실 리가 없습니다.”
막료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