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30
교랑의경 630화
“내리시겠어요?”
여종이 물었다. 손으로 마차 휘장을 걷고, 잠시 저택을 바라보던 진십팔랑은 고개를 저었다.
“가자.”
진십팔랑이 휘장을 내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다급하게 마차를 향해 뛰어왔다.
“혹시 진 상공 댁 낭자십니까?”
사내가 예를 올리면서 물었다. 여종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사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명첩 하나를 건넸다.
“저희 대인께서 낭자께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대인? 내게 부탁을?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명첩을 받았다.
고능준.
고능준? 고능준이 나를 보자고 했다고?
진십팔랑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손에 들린 명첩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평왕의 서재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울던 백발노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본디 고능준은 그리 늙지 않았지만, 평왕이 죽은 후로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것 같았다.
나에게 부탁이라, 무슨 일이지?
진십팔랑은 잠시 고민하다가 명첩을 소매 안에 넣고 마차 휘장을 내렸다. 마차가 다시 길가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우린 정말 이대로 떠나는 겁니까?”
고 관인이 고능준의 뒤를 바짝 따라오면서 물었다.
“왜? 돌아가는 게 뭐 어때서? 네가 굶기를 하겠느냐, 입을 옷이 없기를 하겠느냐, 추위에 떨기를 하겠느냐?”
고능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향에서는 우리 고씨 가문이 그곳의 황제나 다름없지만, 사람이 돈 하나만 추구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고향에서 제아무리 떵떵거린다 한들, 경성에서 기세등등하게 돌아다니는 것만 하겠냐고요.
“노야.”
제국 부인이 대청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태후마마는 뵈었소?”
고능준이 물었다.
“네, 마마의 뜻은 여전하세요. 우리 쪽에서 태자비를 골라 주기를 바라셔요.”
제국 부인의 대답에 고능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고를 수는 없소.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줘야지.”
제국 부인과 고 관인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좋은 기회인데, 왜 남에게 넘겨야 하는 거지?
“아, 그리고 마마께서 진안 군왕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국 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하자, 고능준은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네들의 사사로운 정이란.”
“노야, 진안 군왕은 태후마마께서 손수 키우신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 감정을 어떻게 단칼에 끊어내겠어요.”
제국 부인이 고능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진안 군왕의 몸 상태를 봐서는, 이제 더는 뭘 할 수도 없어 보이고요.”
“십여 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여태 멀쩡히 살아 있지 않소.”
고능준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래도 마마께서는 내심 안타까우시겠죠. 이젠 군왕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졌을 테고요.”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미안함과 아쉬움은 차차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감정들이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마냥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지는 못하겠소. 세상일이라는 게 워낙 예측하기가 힘들잖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이런 상황이 올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소.”
고능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아버지, 확실하게 군왕을 없앨 생각이십니까?”
고 관인이 서둘러 물었다.
“너는 우리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못 줘서 안달인 게냐!”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지금은 조정 대신 네 명이 정사를 돌보고 있다. 조정의 각 파벌이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서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어. 우리는 이 혼란스러움을 조용히 피해 가야 해. 지금 저들은 저들끼리 싸우면서도, 우리 고씨 가문에 대해서는 다들 의견을 같이할 것이야.”
고 관인이 머쓱한 듯 입을 다물었다.
“태후가 미워하는 것은 진왕 군왕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미워해야만 하는 건 군왕의 신분 그 자체지.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일은 더 수월해진다.”
고능준이 잠시 수염을 쓰다듬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고 관인이 재빨리 물었다. 고능준이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태후를 뵈러 입궁해야겠다.”
“반근 언니.”
반근이 시녀를 붙잡고 조용히 불렀다.
“우리 진짜로 가?”
시녀가 모퉁이에 서서 반대편에 있는 관저를 잠시 쳐다보았다.
“당연히 가야지.”
“아씨께 한번 여쭤보고 가는 건 어때?”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몸을 돌리고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아씨를 몰라? 아씨께서는 절대로 누굴 찾아가 오해를 설명하시는 분이 아니야. 남이 아씨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아씨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니까. 말하자면, 나를 아는 이는 내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이는 나더러 무엇을 찾느냐고 하는 거지(知我者爲我心憂, 不知我者謂我何求 – ).”
반근이 반쯤 알아들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와 함께 관저를 내다보았다.
“주 공자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잖아. 군왕 전하는 아씨께서 그날 자기를 일부러 구해주지 않은 거라고 오해해서, 아씨를 아예 관저 안으로 들이지도 않으셨대. 그래서 아씨께서는 그날 밤새 경왕부 밖에 서 계셨고.”
시녀가 몹시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
“밤새 앉아 계신 거지.”
반근이 시녀의 말을 고쳐주자, 시녀가 반근을 흘겨보았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반근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씨께서 경성에 계시는 동안 말이 통했던 사람도, 가까이 지냈던 사람도 이젠 전부 없어졌어. 진 공자님은 아씨와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원수지간이 되었지. 그건 진 공자님이 선택한 일이지만, 군왕 전하는 달라. 다른 이의 함정에 빠진 아씨를 오해하게 된 상황이잖아. 군왕 전하와 혼사를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아씨께서 정말로 개의치 않으신다고 해도, 나는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긴 힘들어. 아씨께서 이대로 또 억울하게 한 사람을 잃으시는걸.”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반근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한텐 증거도 있어.”
시녀가 자신의 소매를 꼭 잡고 말했다.
“군왕 전하라면, 분명 아씨를 이해하실 거야. 군왕 전하는 늘 아씨를 믿으셨잖아.”
– 아, 참.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 책에서 봤는데, 늑대 떼는 야밤에 큰길에서 먹이를 찾지 않는대요. 사람이나 마차를 기습하는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 아, 참.
아씨께서 말씀하시면, 군왕 전하는 그대로 믿어 주셨어.
“아씨께서 이대로 강주로 돌아가셔선 안 돼.”
시녀가 깊은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결심한 듯이 손짓했다.
“가자.”
“전하, 전하.”
이 태의가 잰걸음으로 문턱을 넘어서면서 진안 군왕을 다급하게 불렀다. 안쪽에 있던 내시 두 명이 이 태의를 향해 재빨리 다가와 쉿 소리를 내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이 태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전하께선 지금 막 잠드셨습니다.”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 태의가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무슨 좋은 일이기에 이렇게 기뻐하십니까?”
내시가 흥분한 표정의 이 태의를 보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정 낭자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정 낭자는······.”
이 태의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하던 찰나,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누가 정 낭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이 태의! 저 두 사람은 뭡니까!”
“고 선생, 저들은 나를 찾아온 것이오.”
“뭐요? 이 태의를 찾아왔다고? 저 여인이 신선거, 태평거의 총 관리인이라는 것을 모를 줄 아시오?”
“예, 저희는 이 태의를 찾아온 게 아니라, 진안 군왕 전하를 뵈러 온 거예요.”
“지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여기가 너희가 오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이 태의, 외부인을 멋대로 왕부 안으로 들이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이요!”
“이보세요, 선생. 우리는 저기 있는 문으로 들어왔어요. 당초 전하께서 우리 저택에 들어오실 때는 담벼락을 넘어서 오셨지만요.”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던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고 선생, 반근이 온 것인가?”
진안 군왕이 목청을 높여서 물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멈추고,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시녀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침상 가까이 다가가려 걸음을 뗐다.
“잠깐, 멀찌감치 떨어져라.”
고 선생의 말에, 시위 두 명이 즉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시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녀가 걸음을 멈췄다.
“전하, 소인은 그날 저희 아씨께서 전하를 구하러 오시지 못한 이유를 알려드리고자 이곳에 온 거예요. 그때 저희 아씨는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있었어요. 진씨 가문의 공자님이 저희 아씨를 속여 연꽃 구경을 데려가고, 그 틈을 타서 곧바로 사공자님을 납치해 아씨를 협박했거든요.”
시녀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침상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시중을 드는 시녀가 재빨리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그래? 그랬던 거로구나.”
휘장 사이로 보이는 진안 군왕의 허약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반근이 안심한 듯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럼요. 제가 증거도 가지고 있어요.”
시녀가 서둘러 대답하고, 소매에서 조심스럽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볼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젓자, 시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정도면 충분해.”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었다.
“내 말이 맞았어. 정사낭은 나 때문에 변을 당한 것이야.”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시녀는 눈물이 왈칵 쏟을 정도로 기뻐했다.
“소인은 알고 있었어요. 전하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고요.”
시녀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고 선생이 시녀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냉소를 지으며 종이 위의 글씨를 훑어보았다.
“낭자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아래 몇 마디를 그대로 말하시오. 만약 한 글자라도 틀렸다가는 정사낭의 시신을 보게 될 것이오.
무슨 일이죠?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고 선생이 종이 위에 쓰인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시녀와 반근이 고 선생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저기에 쓰여 있는 말처럼, 그날 아씨께서 하신 말씀은 아씨가 정말로 하시려던 말씀이 아니었어요.”
고 선생이 실소를 터트렸다.
“틀렸다. 우리가 문제라 여기는 건, 네 아씨가 했던 말이 아니야.”
시녀와 반근이 멈칫했다.
“네 아씨가 했던 행동이 문제인 거지.”
고 선생이 손에 쥔 종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뭐 하나만 물어보마. 만약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이, 전하의 병을 고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전하를 죽이라는 말이었다면.”
고 관인이 종이에서 시선을 거두고 시녀를 바라보았다.
“네 아씨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으냐?”
우리 아씨께서 어떻게 했을 것 같냐고?
우리 아씨께서는······.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저희 아씨께서는 남을 먼저 해친 적이 없단 말이에요!”
반근이 소리쳤다.
고 선생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은 먼저 해치는 상황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협박을 받는 상황이라면, 너희 아씨가 남을 해칠까, 해치지 않을까?”
고 선생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시녀와 반근을 쳐다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너희는 정 낭자의 측근이니, 정 낭자의 답이 무엇일지 잘 알고 있겠지.”
고 선생이 침상에 누운 진안 군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 혼인은 내게 사소한 일이에요.
정 낭자에게는 사소한 일이겠지.
“고 선생, 그 말은 틀렸네. 내가 해를 입은 건 정 낭자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 해를 당한 결과도 정 낭자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지.”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그러자 고 선생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영명하십니다, 전하.”
고 선생이 표정을 가다듬고, 더는 이 주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