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35
교랑의경 635화
북정을 떠난 조귀는 각 점포에 들러 관리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해가 질 때쯤 남정으로 돌아왔다. 남정에는 새로 지은 저택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고, 지저분했던 흙바닥도 모두 새로 깨끗하게 깔려 있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빗물이 넘치고 벌레가 진을 치고 있던 옛 남정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여름 저녁, 시원한 곳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골목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조 집사.”
조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남정 사람들이 그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며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조귀가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다가, 한쪽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정평!”
큰 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둘러앉아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던 정평이 조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바쁩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서요.”
정평의 대꾸에 조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잃는 것은 얻기 위함의 첫걸음이고,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나아가는 것은 물러나는 것을 위한 것이고, 물러나는 것은 나아가는 것의 근간이다. 복은 화의 시작이 되고, 화가 오기 전에는 필시 복이 먼저 온다.”
정평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어린아이들이 투정을 부리듯 외쳤다.
“도경 읊지 말고요. 이야기 들려주세요. 재미난 이야기요.”
“에이, 이야기 한 번 하면서 도경도 한 번 읊는 거지. 너희들, 내가 이야기 들려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내가 무려 십여 년 동안 책을 읽어서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만 뽑아내 말해 주는 거거든. 내 이야기는 아무나 듣고 싶다고 해서 다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여기에는 교훈이 무지막지하게 녹아 있다고.”
정평이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조귀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정평, 정말로 나와 함께 경성으로 가지 않을 텐가?”
정평이 고개를 저었다.
“일백 문을 다 벌었으니, 이제 문을 닫고 경서 공부에 매진할 겁니다.”
정평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뭐, 물론 나도 언젠가는 경성으로 가겠지만요. 우린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요.”
조귀가 입술을 삐쭉였다.
“고작 일백 문 가지고 어떻게 문을 닫아걸고 공부만 하겠다는 건가? 굶어 죽는 게 무섭지도 않나.”
조귀가 아이들에게 이어서 이야기하는 정평을 보며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조귀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두 시녀가 그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비록 정교랑이 이 집에서 살고 있진 않았지만, 집은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저녁때면 언제나 등불을 밝혔다.
조귀는 주인 없는 안채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두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녀들이 밥상을 막 들여왔을 무렵, 정계가 몇 사람을 데리고 저택으로 찾아왔다.
“집사 어른, 저희가 더 도울 게 있을지요?”
정계가 물었다.
“괜찮소. 치울 것도 별로 없고.”
조귀가 대답했다. 정계와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작은 상자를 조귀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조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씨께서 혼인을 치르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약소한 마음이나마 담아 보았습니다.”
정계의 말에 조귀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괜한 돈을 쓰고 그러시오. 댁들이 잘 지내는 게 바로 아씨께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모르나?”
정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잘 알지요.”
정계가 작은 상자를 열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귀한 금은보화는 아니고, 저희가 와당을 한 개 만들어 봤습니다.”
와당?
조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정말로 와당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이건······.”
조귀가 와당에 새겨진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연꽃 절지 무늬입니다. 정씨 선조의 고택에서 쓰이던 표식인데, 아씨께서 어릴 때 강주에서 지내신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나서요. 이제 곧 시집을 가시니 저희가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아씨께서 딱히 부족한 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움이 담긴 기억을 선물하고자 준비했습니다. 아씨께서 어딜 가시든, 정씨 가문은 언제나 아씨의 고향이고 집이라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
정계의 말에, 조귀가 웃었다.
“좋소. 마음을 담은 선물이니, 아씨께서는 분명히 좋아하실 걸세.”
정계 등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조귀를 따라 웃었다.
“그럼 아씨의 선물을 전했으니, 이제 집사 어른께도 선물을 하나 드려야지요.”
한 사내가 술동이 한 개를 꺼내어 탁자 위에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어디 한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조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시녀들을 불렀다.
“좋지! 술상을 내오너라. 오늘 한번 취할 때까지 마시세!”
정계 등과 거하게 회포를 푼 조귀는 숙취로 인해 아침 일찍 출발하지 못하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떠날 채비를 마쳤다. 조귀는 여러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남정 골목을 나섰다.
깨끗하게 치워진 북정 거리에 긴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행인과 마차가 쉼 없이 지나다니는 곳에 벽을 따라 차양막이 설치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간이 화로를 만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조귀가 놀라서 물었다.
“집사 어른, 정 낭자께서 내일 혼례를 올리시니, 정 대노야께서 아무나 와서 음식과 술을 먹고 갈 수 있도록 사흘 동안 길거리에서 연회를 여신다고 합니다. 저기 덕흥루에서 가장 유명한 숙수를 데려와 요리를 준비하시고요. 강주성에 사는 그 누구든 편히 와서 연회를 즐기되, 축의금은 내지 않아도 된답니다.”
구경하던 사람 중 한 명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숙수가 힘들어 죽으면 어떡하오?”
조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 대노야께서 마차 한 대에 가득 실릴 정도의 값을 치르셨답니다. 힘들어 죽는다 해도 이 일은 꼭 해야죠.”
다른 구경꾼이 외치자,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귀도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런 경사스러운 일에는 사람이 많이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축하해야지. 눈앞에서 볼 수는 없다 해도, 이 마음들은 전해질 테니.
조귀가 말 위로 몸을 휙 날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강주 정씨 저택의 마당도 북정 거리만큼 시끌벅적했다. 대청 안에 앉은 정 노부인은 정 대노야가 어디서 구해 온 사람인지도 모를 아낙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노부인께서 참 복도 많으시지.”
“안 그래도 제가 얼마 전에 마당에서 커다란 꽃을 따는 꿈을 꿨는데, 역시 길몽이었나 봐요.”
“노부인께서 귀한 군왕 손주사위를 보시네요.”
아낙들의 아첨에 정 노부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목청을 높이고 말했다.
“우리 교교의 할아비는 교교가 남다르다는 걸 일찍이 알았네. 교교에게 이름을 지어주겠다면서 반년 내내 작명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다는 거야. 낳기 직전까지도 이름을 정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길을 지나가는 노승을 만났어. 그 노승이 입을 열자마자 한 글자를 딱 뱉었는데······.”
말하던 정 노부인은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 바보 이름이 뭐였더라?
“방이요.”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재빨리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그게 바로 방(昉)이라는 글자였네.”
노부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덧붙이고는 눈이 없어질 정도로 웃음 지었다.
“게다가 더 신기한 게 뭐였는 줄 알아? 그때 노야께서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로 정방이라 중얼거리고는, 그 노승에게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자 고개를 들었는데, 그 노승은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어머나, 그럼 부처님을 만나신 거 아니에요?”
주위에서 감탄 섞인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문밖에 서 있던 정 이부인이 눈썹을 꿈틀대며 눈을 흘겼다.
“뻔뻔스러운 할망구 같으니라고. 누가 들으면 교랑이 황후마마라도 되는 줄 알겠어. 뭐? 부처님이 이름을 지어 줘? 그 애가 바보라는 걸 알자마자 요강에 빠트려 익사시키려고 했다더니만. 참 나, 부처님이 내리실 벌이 두렵지도 않나.”
정 이부인은 구시렁대며 욕을 내뱉고는 대문 앞으로 나갔다.
거리에는 길거리 연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쌀이 왔네, 고기가 왔네 하며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들과 술장수들이 술동이를 내리는 모습을 보던 정 이부인은 속으로 계속해서 불경을 읊었다.
“저게 다 무슨 낭비람. 역시 사람들은 자기 돈이 아니면 아주 있는 대로 낭비하려고 발악을 하네.”
같은 시각 경성의 정씨 저택에서는 여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왔어요. 왔어요.”
여종 몇 명이 소리치며 방 안으로 들어와 휘장을 내렸다.
창가에 있던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방 안으로 들여지는 옷걸이를 바라보았다. 옷걸이에는 온통 붉은색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혼례복이 걸려 있었다.
여종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어린아이들이 문가에 기대어 호기심 어린 얼굴로 혼례복과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이어 다른 부인들 그리고 젊은 새댁들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진소 부인이 혼례복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잘 만들었다는 칭찬을 하고 상서로운 말들을 했다.
“잠시 이리 와요. 낭자에게 해 줄 말이 좀 있어서.”
진소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이끌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동씨 가문의 부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진소 부인이 바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줄게요.”
진소 부인이 방을 나가자, 부인들과 젊은 새댁들도 자연스럽게 진소 부인을 따라 방을 나갔다.
실내가 조용해지자, 정교랑이 천천히 옷걸이 앞으로 걸어가 혼례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문과 문틈 사이로 들어와 부서지는 햇빛 때문에 실내는 몹시 환했다. 혼례복 위에 수놓아진 금빛이 강가의 윤슬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예뻐요?”
누군가가 문밖에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진단랑이 서 있었다.
“예뻐.”
정교랑이 싱긋 웃었다. 진단랑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정교랑의 옆에 서서 정교랑과 함께 혼례복을 쳐다보았다.
“나도 예쁘다고 생각해요.”
진단랑이 정교랑의 소매를 흔들면서 졸랐다.
“언니, 한번 입어 봐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혼례복을 잠시 바라보다가, 혼례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교랑의 마당에 도착한 주복이 열린 대청 문 사이로 한 여인을 지켜보았다. 여인은 두 팔을 벌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주복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붉은색······.
온통 붉은색이네. 눈부신 붉은색에 금실로 촘촘하게 수놓은 꽃까지.
시집가는 여인은 예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지금껏 살면서 저런 붉은색을 처음 본다고 주복은 생각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은 본 적이 없어.
항상 우중충한 무채색만 입던 여인이 저렇게 눈부신 붉은색을 몸에 걸치니, 깊은 밤 만개한 모란꽃 한 송이가 따로 없군.
사실 무채색의 옷을 입어도 어디서나 돋보이긴 했지. 그런 여인이 저리 돋보이는 옷을 입으니, 눈부시게 빛나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구나.
정말 유일무이해. 저 여인은.
“혼례복이 정말 예뻐요!”
대청 안에서 진단랑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단랑은 정교랑의 주위를 빙글빙글 뛰어다니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옆에 놓인 구리거울을 바라보았다.
주복은 그런 정교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복의 눈에 정교랑은 구리거울 속에 비친 혼례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앞으로의 나날들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어딘가 모르게 들뜬 것 같기도 했다.
혼례복이 정말 예쁘네.
“주 공자?”
여인의 목소리가 주복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주복은 심장이 멈춰버린 듯이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가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재빨리 몸을 돌렸다.
“주 공자의 옷도 준비해 뒀는데, 입어 봤어요?”
진소 부인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물었다.
주복이 정교랑의 신행을 담당했지만, 주씨 가족이 모두 섬주로 내려간 탓에 황씨가 그의 예복을 준비했다. 주복은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네, 하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마당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