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70
교랑의경 670화
“일찍 자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저녁땐 책 보지 마요.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눈 아파요.”
정교랑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진안 군왕이 다가와 웃으며 정교랑의 팔을 쿡쿡 찔렀다.
“그만 보라니까요. 나 머리 감겨 줘요.”
“난 머리 감길 줄 몰라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내가 감겨 줄게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밖에 있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머리숱이 참 풍성하네요.”
“······물 안 차가워요? 따뜻한 물을 좀 더 섞을까요?”
안에서는 여전히 진안 군왕의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전하께서 머리를 참 잘 감겨 주시네.”
소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근은 조금 전 구리 대야가 엎질러지던 소리를 떠올리고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반근이 막 뭐라 대꾸하려는데, 안에서 나오는 진안 군왕이 보였다.
“부인이 씻도록 도와드려라.”
진안 군왕의 말에 반근이 얼른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안 군왕이 씻고 나왔을 무렵, 정교랑은 벌써 침상에 누워 있었다. 몸종이며 시녀도 전부 물러간 터라, 진안 군왕은 한쪽 옆에 따라 둔 물을 들고 편히 마셨다.
“물 마실래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안 군왕은 물잔을 내려놓고 등불을 끈 다음,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교랑을 타넘고 침상 안쪽으로 들어가 누웠다.
“정말 당신이 말한 그대로네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옆에 있는 사람을 툭툭 치며 말했다.
“뭐가요?”
귓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은 몸을 틀어 옆으로 누워,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휘장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같은 침상에서 자는 거 습관 되면 괜찮다고요.”
진안 군왕이 웃자 정교랑도 웃음을 보였다.
“방백종.”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부르자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난 괜찮아요. 진 대인이 수락할 거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어요.”
진작 예상했던 일이죠. 이렇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뭐든 다 알았다. 그녀에게 좋은 것도, 좋지 않은 것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라 해도, 슬프잖아요.”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베개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다가, 또 얼른 손을 거두었다.
“내가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보며 물었다. 캄캄한 어둠 아래 두 눈만이 반짝반짝 빛났다.
“난 슬프지 않아요. 내 일도 아닌걸요.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子非魚, 安知魚之樂 – 장자). 남의 일에 내가 뭐하러 괴로워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내가 괜한 생각을 했네요.”
진안 군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단랑은 착한 아이인데, 이런 일을 겪다니, 많이 슬프겠어요.”
정교랑이 베개 위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슬프지 않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몸을 받친 채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으응?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죠?”
“실은 나도 물고기거든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하늘빛이 서서히 밝아오고, 이제 막 성문을 연 위병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청소 준비를 할 무렵, 마차 한 대가 흔들흔들 성문을 빠져나갔다.
이런 꼭두새벽부터 누구지?
위병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았다.
고생스레 돈벌이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그때 성안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위병들이 고개를 돌리자, 말에 탄 중년의 사내가 보였다.
“진 상공!”
위병 중 하나가 대번에 알아보고 놀라 외쳤다. 위병들이 미처 예를 올리기도 전에, 진소의 말은 쏜살같이 성문을 빠져나갔다.
“아버지!”
마차 옆에서 말고삐를 당긴 진소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진소는 창백한 안색에 두 눈이 붉은 채로, 말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연신 땅에 머리를 찧었다.
“막을 것 없다.”
진 노태야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네 자식은 네 뜻대로 하게 둘 테니, 내 자식은 내 뜻대로 하게 해 다오. 진소, 오늘부로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다. 네가 정녕 충과 효를 다하고 싶다면, 더는 성가시게 굴지 마라.”
진소가 아버지를 불러대며 오열했다.
“왜 이러느냐. 날 이리 압박하는 것도 너의 대의를 따르는 일이더냐? 널 용서하지 않고, 네 뜻을 헤아려 주지 않는 것이 내 잘못이란 말이냐?”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진소가 고개를 들었다. 진소의 이마에는 벌써 피멍이 들어 있었다.
“아니면 됐다. 그럼 길을 열거라.”
진소가 다시 땅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마차를 몰던 노복이 더는 못 보겠는지, 나지막이 말했다.
“노야, 그만하시지요. 노태야를 놓아 주십시오.”
놓아 달라······.
진소가 몸을 움찔하더니, 납작 엎드리며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고는 무릎걸음으로 두어 걸음 물러나 길가로 비켜섰다.
마차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고, 다시 휘장을 내린 진 노태야는 더 이상 진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차가 차츰 멀어지면서 길을 오가는 사람도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길가에 엎드린 진소는 지나가던 행인들이 놀라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리는데도 시종일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저 뒤에 있는 진소가 자그마한 점만큼 작아지자, 노복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초가을인데도 하늘은 높고 푸르르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비가 오려나 보네.”
노복이 중얼거렸다. 진 노태야도 휘장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더니 멈칫했다.
“음, 솜구름이 몰려드는 것이 곧 비가 오겠구나.”
진 노태야는 추억에 잠긴 듯 말을 이었다.
“기억하느냐. 우리가 처음으로 정 낭자를 만났던 때도, 이런 날씨였지.”
노복은 멈칫했다. 어느덧 육 년 전 일인지라 이미 흐릿해진 기억이었다.
“그때 정 낭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벌써 몇 년 전에 죽었을 게야.”
웃음을 짓던 진 노태야는 거기서 돌연 말을 멈추었다가 잠시 후 다시 이었다.
“그때 낭자의 말을 믿었다면, 경성으로 오지도 않았을 텐데.”
경성으로 오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같은 일도 없었겠지.
노복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노태야.”
진 노태야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내 병은 정 낭자가 고쳐 줬다지만 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구나. 그래서 병은 고쳐도 명은 못 고친다는 말이 있는 게야. 운명은 자기한테 달린 것이니, 남 탓을 할 수는 없는 법이지.”
진소가 무릎을 꿇은 채 경성을 떠나는 진 노태야를 배웅했다는 소식이 경성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기도 전인 사흘 후, 진씨 가문의 십구랑을 태자비로 책봉한다는 조서가 만천하에 반포되었다.
정교랑은 그 소식을 연무장에서 활쏘기를 하다가 들었다. 진안 군왕이 직접 와서 이야기해 주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떠난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고, 화살 끝에 달린 궁깃은 햇빛 아래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지금은 출타하기 어려운 처지지만, 그래도 진 상공 댁엔 내가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그러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방문한 일로 탄핵 상소가 몇 개 더 올라오고 조롱하는 말 몇 마디 더 듣는다고 해서, 진 상공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정교랑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손에 든 활을 내린 채 잠자코 있었다. 그때 소심이 멀리서 급히 다가왔다.
“부인, 부인, 조 집사가 왔어요.”
소심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조 집사?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소식을 들은 반근도 반색을 했다.
드디어 왔구나. 왜 이렇게 늦었담. 날짜를 꼽아 보니 이틀 전에는 당도했어야 하는데.
소심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정평도 같이 왔어요.”
정평?
진안 군왕이 그 이름에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활과 화살을 내던진 채 밖으로 급히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달려가고 있어!
정교랑이 예를 잊은 채 이토록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진안 군왕이었다.
놀라운 광경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교랑은 빠르게 걷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교랑의 저고리와 긴 소매, 옷자락이 새벽빛을 받으며 펄럭였다.
누구야, 대체!
진안 군왕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누군데 이래!
대청 안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이쪽으로 오던 진안 군왕이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울다니!
저 여인을 알고 지낸 사오 년 동안, 저렇게 우는 건 처음 봐. 그것도 아주 대성통곡을 하고 있어.
대체 누구기에 저 앞에서 목놓아 우는 거지?
진안 군왕은 조심스레 고개를 빼고 안쪽을 쳐다보았다.
대청의 문은 열려 있었고, 휘장 너머로 두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등을 지고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중 몸을 살짝 굽히고 있는 사내는 진안 군왕도 만난 적 있는 조 집사였다.
다른 사내는 입성이 남루하고 빼빼 말랐지만,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여인은 그 사내를 향해 바닥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저자구나. 대체 누구지?
“집안사람이라고 합니다.”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말했다. 화들짝 놀란 진안 군왕이 얼른 몸을 펴고 고개를 돌리자 경 공공이 보였다.
“수상쩍게 무슨 짓이냐.”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지금 수상쩍게 구는 게 누군데······.
경 공공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여긴 전하의 저택이 아닙니까. 전하의 아내가 외간 사내를 만나는데,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 서서 훔쳐보시다니요.
“전하, 강주에서 온 자라고 합니다. 왕비 전하의 친정 사람이라니, 전하께서도 만나 보셔야지요.”
경 공공이 말했다. 대청 안에서는 여전히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울 수 있는 것도 행복이지.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편히 이야기 나누게 둬라. 얘기가 끝나면 자연히 날 만나러 올 테니. 난 외서재로 가겠다.”
진안 군왕이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경 공공은 대청 쪽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지만, 여인은 여전히 엎드려 울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 친정 사람을 만나서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잖아. 아직도 친정 사람 중에 저리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사람이 남아 있었단 말이야?
한편 같은 시각 대청에 앉아 있던 정평과 조귀의 표정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귀는 하인 신분이라 몸을 살짝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정평은 팔짱을 낀 채 대청을 둘러보며 막막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대청에서 울음소리가 차차 잦아들더니, 이내 몸을 일으킨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옆에서 함께 눈물을 훔치고 있던 반근도 얼른 일어났다. 반근은 정교랑을 따라 욕실로 들어가 정교랑이 씻도록 도와주었다.
조귀와 정평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례를 올릴 때도 친정 사람이 없었잖나. 손윗사람을 만나니 아씨께서 설움이 복받치셨겠지.”
조귀가 불쑥 입을 열었다.
조귀와 정평은 본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 후 외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정교랑이 직접 달려왔다. 그러더니 보자마자 대뜸 큰절을 올리고 대성통곡을 하는 게 아닌가.
놀란 정평은 그 자리에서 달아나려고 했지만, 일찍이 비슷한 광경을 목도한 바 있는 조귀가 기지를 발휘해 정평을 붙잡아 앉혔다.
손윗사람은 무슨? 당초 강주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정씨 성을 가진 손윗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는데, 그때도 내 앞에서만 눈물을 쏟았잖아.
역시 이 얼굴 때문인가.
정평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게 벌써 언제 적인데, 여전히 이러네.
“항렬로 따지자면, 내 고모님뻘이 되시는데요.”
정평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조귀에게 나지막이 말하자, 조귀가 눈을 부라렸다.
“시끄럽다. 손윗사람으로 띄워 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이럴 줄 알았으면 데려오지도 않았어.”
아씨께서 혼인도 하고 가정도 이루셨으니 예전과 달리 잘 지내시는 줄 알았는데, 어찌······.
조귀는 순간 자신이 정평을 데려온 게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알 수 없어 막막해졌다.
아씨께서 정평을 남달리 대하시는 모습을 보니 잘한 일 같기도 하고, 정평을 보기만 하면 이상하게 변하시니 잘못한 일 같기도 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세수를 하고 새롭게 단장을 마친 정교랑이 걸어왔다. 조귀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바로 앉았다.
대청 안은 침묵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