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004
1013장. 약속 이행(2).
“흐흐흐. 장태산 이 자식 표정이 궁금하군.”
임주혁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태산 때문에 일이 여러 개 꼬였다.
무사히 밖으로 나왔다가 유흥을 즐기던 사진이 찍혀 유출됐다.
떠올릴수록 치욕스러웠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재수감 됐다.
여기저기 돈이 몇 배로 들었다.
손국중이 쓰러져 버린 상황이라 다른 루트를 뚫었다.
손대균이 쓸 수 있는 힘과 여러 인맥을 이용해 다시 한 번 앰뷸런스를 탔다.
두 번은 걸려들지 않기 위해 몇 달 동안 집 안에만 머물며 두문불출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 몸이 아프기도 했다.
화병이 겹치면서 신장이 안 좋아졌다.
울화에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이 치솟아 결국 신장이 맛 갔다.
물론 한창 젊은 시절부터 방탕한 생활을 즐긴 탓도 있었다.
급기야 신장 이식 수술까지 받게 됐다.
화를 억누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당연히 그 원망은 전부 다 장태산에게 돌렸다.
임주혁은 장태산의 아픈 구석을 찾는 데 집중했다.
아버지 임동철이 그랬던 것처럼 조폭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장태산과 그 주변 인물들은 평상시에도 철저하게 보호관찰 됐다.
소리 없이 장태산의 뒤통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소심한 복수에 불과하지만 장태산이 애써 키워온 걸그룹을 산산조각냈다.
임주혁은 인간 밑바닥에 있는 본성을 잘 파악했다.
조직의 수장으로서 아래로 데리고 있는 수 많은 직원들을 지켜봐 왔다.
그들 대다수가 아닌 척해도 돈과 권력의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특히 한 번이라도 성공을 맛본 자들일수록 그 맛에 젖어 들어 빠져나오지 못했다.
FOB도 마찬가지다.
살 만큼 살아서 온갖 때가 잔뜩 묻어 있는 부모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언론에 대서특필된 FOB의 전격 해체 소식.
이번 일로 장태산이 타격을 받았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권력을 행사하는 입장이 되면 다른 한편으로 순수한 인연을 찾게 된다.
회장 임주혁도 고등학교 동창들과는 아직도 그 시절처럼 욕을 하며 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성공한 이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그런 인간적인 관계.
임주혁은 나름 머리를 써서 장태산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가 그의 아름다운 추억 한 토막을 아예 부숴버렸다.
비용도 얼마 들지 않았다.
어차피 투자된 자금은 모두 다 중국 자본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인들은 장사 수완에 비상했다.
FOB는 계약금으로 들어간 자금 이상을 뽑아내고 가차 없이 버려질 것이다.
돈에 눈이 멀어 자식들을 팔아먹었다는 사실 자체를 그녀들의 부모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장태산 기다려. 아직 안 끝났어!”
장태산 한 놈 때문에 그간 쌓아온 명예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KI그룹까지 위기에 빠질 뻔했다.
비자금을 털어 처바른 덕에 겨우 회장 자리는 사수했다.
아버지 임동철도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KI그룹과 장태산은 누가 봐도 철천지원수가 됐다.
KI그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기득권층 상당수가 장태산을 불편해했다.
그렇게 돈을 벌어 성공했으면 끼리끼리 같이 놀아야 하는데 장태산은 그런 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득권층을 상대로 날을 세웠다.
재벌과 정치권은 물론 심지어 노조와도 척을 졌다.
임주혁이 보기에는 한참 어리석은 자였다.
말이 좋아 기득권이라는 말로 정의하지만 그들은 실상 보이지 않는 두텁고 진한 욕망의 살아 있는 집합체였다.
그런 집합체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장태산.
홀로 들이받다 어느 순간 자멸할 게 뻔했다.
“그건 그렇고……. 노인네는 이 자식을 왜 불렀을까? 둘이 안면이 있나?”
장태산을 감시하는 중에 들려온 정보 하나.
장태산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됐지만 아직도 현역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재계의 거물.
KI그룹도 그를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런 거물이 장태산을 만났다.
“치매 걸린 호랑이와 겁대가리 상실한 호랑이의 만남이라……. 이거 뭔가 찝찝한데.”
웃음 뒤에 임주혁은 불안한 입맛을 다셨다.
구체적인 건 알 수 없지만 뭔가 기분을 찜찜하게 만드는 호랑이 두 마리의 회동.
하지만 지금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오래된 비서가 나를 맞이했다.
처음 만남은 유쾌하지 않았지만 상대도 나도 지난 일에 대한 인상을 표정에 담지는 않았다.
굳이 지난 일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는 어리석은 짓은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둘 다 잘 아는 처지였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그의 소왕국에 발을 들였다.
소공동 호텔 최상층은 여전히 그의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변한 게 거의 없다.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가 한자리에 뿌리를 박고 수백 년을 머무는 것처럼 이곳도 그러했다.
과거 시대로 되돌아온 기분.
아니 거의 잊고 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제는 대내외적으로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을 받고 있는 남자.
스르릇.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
200평이 넘는 거대한 공간.
나이 먹은 환자가 거주하고 있어서인지 특유의 냄새가 배어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피해갈 수 없는 노화.
한때 대한민국 내 갑부 서열 상위를 차지하던 이도 하늘이 정한 공평함 앞에서는 초라한 한 인간에 불과했다.
“이쪽입니다.”
같이 들어온 윤창호 비서가 조용히 나를 안내했다.
사박사박.
부드러운 양탄자를 밟으며 그를 따라갔다.
시원하게 밖이 보이는 넓은 창가 앞에 휠체어를 탄 그 남자가 있었다.
“회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래…… 왔군.”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얼굴 가득 검버섯이 핀 남자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노화의 또 다른 모습이 보였다.
지금쯤이면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되고 있을 상태다.
그럼에도 남자는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곧 가죽을 남길 처지였지만 아직은 살아 있는 호랑이였다.
스윽.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누르스름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바쁜 것 아는데……. 괜찮아.”
젊은이들보다 두 배는 느린 속도의 말이 전해졌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윤창호 비서가 물러났다.
주인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신하도 벌써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노중년이 다 됐다.
“앉아.”
“네.”
휠체어 앞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와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스윽.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말없이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남자.
살짝 민망해 싱긋 웃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노인들 특유의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니라 젊은 청춘 시절을 곱씹다 죽어가는 것이다.
몸은 늙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해 죽어가지만 정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특히 평생을 사업에 몸바쳐 온 이들은 더욱 그랬다.
젊어서 자신이 호령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그때를 추억 삼아 시간을 흘려보냈다.
“100세는 넘기셔야죠.”
“뭐하러…… 그리 오래 살아.”
그 나이까지 몇 년 남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까마득하게 먼 시간이지만 다 닳아버린 건전지 같은 남자에게는 이제 곧 마주하게 될 시간이다.
“아직 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는 총괄회장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 장성한 자식들이 오십을 넘기고도 실권을 차지하지 못했다.
나와 악연이 된 성동국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다.
황제가 되지 못하고 황태자에 만족해야 할 운명 때문에 대놓고 비뚤어진 오춘기를 보내고 있는 성동국.
가진 재산이 차고 넘쳐도 자식 농사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바쁜데 미안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 정신은 총총해 보였다.
하지만 눈에 담겨 있는 총기는 많이 부족한 듯하다.
“차 드십시오.”
소리 없이 나타난 윤창호 실장이 녹차를 내왔다.
“들어.”
“향이 예전 그대로입니다.”
“이놈도 옛날 같지가 않아. 내가 입맛이 변했는지…….”
말끝을 자꾸 흐리며 말을 아꼈다.
“그럼.”
차를 놓고 비서가 나갔다.
조용히 녹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밖으로 펼쳐진 도시 풍경은 분명 보기 좋았지만 이곳에서 보고 있으려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전혀 활력이나 역동성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무덤 자리 같다고나 할까?
“갑자기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야.”
“부탁…… 말입니까?”
성경호 회장이 나에게 부탁할 일은 사실 많지 않다.
랏데는 알아서 잘 굴러갔다.
중국에 진출한 사업이 문제가 좀 많긴 하지만 아직 터질 때가 아니었다.
쇼핑과 내수 위주 사업이었기에 수출 문제로 골치 아플 일도 없었다.
적당히 로비하면 알아서 굴러가는 알짜 사업체다.
아들들이 자꾸 확장을 하려다 그때그때 말아 먹어서 문제였다.
“약속 잊지 않았겠지?”
성경호 회장이 과거의 약속을 언급했다.
“물론입니다.”
천일 그룹을 무너트릴 때 약속한 일을 꺼낸 것이다.
랏데를 두 번은 구해주겠다고 말한 일을 확인하고 있었다.
“조언을 받고 싶네.”
“제게 말입니까?”
과거의 약속한 일을 이행하는 것으로 치기에 조언은 무게감이 약했다.
“자네가 대단하다는 건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그래서 불렀어.”
“소문이 과장되었을 뿐입니다.”
“나에게는 그렇게 말 안 해도 돼.”
총기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긴 인생을 살아온 한 인간의 노하우는 또 달랐다.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과거 그대로였다.
또 여전히 총괄회장으로 그룹을 무난히 이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였다.
“어떤 식의 조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시간을 때우기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성경호 회장의 기가 그렇게 짱짱하지 않다는 것이다.
“후계자 문제 말이야.”
“네?”
후계자라는 말에 찻잔을 든 채 내가 다시 반문했다.
다른 문제도 아니고 그룹 후계자를 정하는 중요한 사안을 나에게 조언해 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늘 만남이 겨우 두 번째다.
내가 아무리 잘나간다지만 이건 엄청 예민한 사항이다.
“문구가 자네를 추천하더군.”
“아!”
연대자동차 그룹 회장을 옆집 아이 부르듯 부르는 성경호 회장.
그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그룹 투자자로서 허심탄회하게 조언해 주게. 사적인 감정 다 빼고……. 오직 냉정한 투자자로서 말이야.”
호랑이는 죽지 않았다.
랏데 주식 상당수를 내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랏데 쇼핑을 비롯해 상당수 사업체가 모두 알짜배기다.
어차피 대한민국에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업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랏데가 꼭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두 번의 동아줄 중 한 차례 사용할 기회 가치로 충분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겠지만 난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
“자네가 나라면 누구를 후계자로 세우겠는가?”
질문이 바로 훅 들어왔다.
“흐음…….”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렇다고 바로 답할 수는 없다.
“회장님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해 보게.”
이 문제의 직접 당사자이자 결정권자는 성경호 회장이다.
나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내려오는 지혜로운 가르침이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
조용히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성 회장.
“나이가 든 현명한 인디언 추장과 그의 손자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추장에게 손자가 물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집에 새끼 개가 두 마리 태어났는데 아빠가 한 마리만 선택하라고 했답니다. 손자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자랄수록 두 마리 개의 성격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사납지만 사냥개로 쓸 만한 가치가 충분한 개와 손자만 보면 꼬리를 흔들고 집을 잘 지키는 충성스런 개. 두 마리 중 어떤 개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됐던 겁니다.”
“으음…….”
내 말을 듣고 있던 성경호 회장이 신음을 흘렸다.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있는 이야기의 메시지.
“추장이 손자에게 어떤 개를 선택하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스스로 답을 찾기를 바라며 질문을 했다.
“……어렵군.”
“아닙니다, 쉽습니다.”
“쉬워? 추장은 어떤 개를 선택하라고 했나?”
고민하지 않고 곧장 답을 요구하는 성경호 회장.
그 모습에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추장은…….”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