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005
1014장. 파격 제안.
“장태산을 만나고 계신다고?”
“그렇습니다. 회장님.”
“왜?”
“그게…….”
랏데그룹 회장실.
명예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를 대신에 그룹 전반을 챙기고 있는 성동민 회장.
심플하면서도 단아하고 모던한 집무실 분위기가 그의 성품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아버지 말을 잘 들었던 아들이다.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영향도 컸지만 본성 자체가 깔끔한 걸 추구했다.
어릴 때는 하는 수 없이 형에게 눌려 지냈지만 나이가 들어 미국 유학 생활을 거치면서 자신감을 장착했다.
그 뒤 본격적으로 시작된 피 튀기는 승계 전쟁.
성격에서처럼 어설픈 짓은 아예 하지 않았다.
대신 정면 승부를 즐겼다.
그런 태도가 아버지 마음을 어느 정도 붙들었다.
다른 그룹에 비해 랏데는 승계가 늦어진 편이다.
반면 성경호 회장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지금도 젊은 여성들과도 간간이 염문을 뿌렸다.
90살이 넘기 바로 직전까지 그룹 전반을 다 챙겼다.
동시대를 살았던 경영자 대부분이 고인이 된 지 오래지만 그만은 여전히 팔팔했다.
그런 성경호 회장 밑에서 눈치껏 경영 실력을 쌓아온 성동민 회장은 이제야 제대로 권력을 쥐었다.
일본에서 쭉 생활해 온 탓에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형과 입장이 달랐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일부러 한국말을 많이 사용했다.
동시에 한국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일본에도 사업체가 존재했지만 주력은 한국이었다.
제과와 빙과, 면세 사업 및 각종 유통업이 랏데 사업의 주를 이루었다.
물론 랏데그룹의 실질적 소유권은 일본 랏데에 있다.
성경호 회장 입장에서는 나름 일찍부터 승계 작업을 준비해 온 것이다.
종업원 지주회사를 통해 일본과 한국 랏데 두 그룹을 좌지우지 흔들었다.
그리고 지주회사 주식은 보이지 않는 신탁으로 성경호 회장이 관리했다.
한국에서는 불법으로 규정됐지만 일본에서는 그 방법이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성경호 회장의 뒤를 이를 자식들은 경영권 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눈 밖에 나는 순간 국물도 없게 되는 구조였다.
조선시대 영조처럼 끝까지 권력을 쥐고 자식들의 능력을 시험했다.
현 회장인 성동민은 아직도 아버지 성경호의 눈치를 봤다.
중요 사업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보고하고 일일이 허락을 받았다.
최근 들어 야심차게 중국 쪽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좀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포효하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업종 특성상 일본과 한국을 벗어날 수 없었다.
틀을 깨고 훨훨 날고 싶었지만 만만치 않았다.
연대나 오정처럼 더 크게 그룹을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중공업 분야 투자는 실적이 미미했다.
아쉬움에 사업 확장을 밀어붙였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다.
먹는 것만큼 남는 장사가 없다는 지론이었다.
괜히 판을 키웠다 한 방에 말아먹는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배고픈 시절을 누구보다 서럽게 보낸 성경호 회장의 고집은 결코 꺾을 수 없을 만큼 완강했다.
그걸 알기에 쥐죽은 듯 숨을 죽이고 도약할 때를 기다리며 미래를 그리고 있는 성동민 회장.
아버지 성경호와 장태산과의 만남에 그만큼 예민했다.
투자자가 아니라 기업 사냥꾼에 가까운 장태산.
다른 투자자라면 이것저것 다 털어내고 알짜배기로 팔아먹을 생각부터 할 텐데 장태산은 반대로 규모를 더 키웠다.
직원 복지도 최상 수준이다.
적자 기업도 모두 다 흑자로 돌려놨다.
그러면서 절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 나이 때 남자라면 남들 앞에서 으스대고 자랑하는 맛에 더 얼굴을 내놓는 게 보통인데 장태산은 노회한 정치인처럼 굴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성동민도 장태산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
오정과 연대를 비롯해 엘자그룹까지 장태산과 끈끈하게 엮여 있다.
몇 번 만나고자 러브콜을 보냈지만 기회가 오지 않았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몸이 달아 있는 상황.
중국에 투자했던 쇼핑 쪽에 문제가 생기면서 벌어진 사태였다.
투입된 투자 자금이 상당한데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엮여 있던 공산당 당원이 부패 문제로 잡혀 들어가면서 일이 틀어졌다.
그 이후부터 사업체를 꾸리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하필 잡혀 들어간 자가 장택민 라인이었다.
센카쿠 열도 문제로 중국 공산당이 이번 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일본 기업이라 낙인찍히며 중국 인민들 사이에 불매 운동까지 일어났다.
한국 내에서도 일본 기업이라고 욕을 먹었다.
정작 일본에서는 한국계라며 손가락질을 당했다.
운명이라 여기고 받아들였지만 사업 영역에서는 괴로웠다.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라도 장태산이 필요했다.
‘설마 아버님이?’
성동민은 어쩌면 아버지가 자신을 믿지 못해 직접 나선 게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도 속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분이었다.
그 성품으로 일본과 한국 양쪽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어떤 면에서 성동민도 그런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형 성동국은 정치 가문의 딸인 엄마의 야심 가득한 성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윤 비서님은 뭐라고 하던가?”
“지금 연락이 없습니다.”
아버지 곁에 있는 최측근을 포섭했다.
형이 언제나 대놓고 무시했던 윤창호 실장.
한국인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그에게 수시로 내뱉었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벌어진 틈을 이용해 성동민은 그를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수시로 이런저런 보고를 전달받았다.
성경호 회장 주변에는 틈만 나면 빨대를 꽂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배다른 자식들도 몇이나 섞여 있다.
그들 모두를 물리쳐야만 진정한 권좌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럼…… 부탁해놔.”
“네?”
“장태산, 내가 만나고 싶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기회다!’
성동민은 확신했다.
그동안 연이 닿지 않았던 귀한 인연.
그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던 자신에게 오늘 하늘이 은혜를 베풀어 준 것만 같았다.
***
장태산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빙그레 웃음 띤 얼굴로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
‘허어. 내가 늙었어.’
성경호 회장은 속으로 한탄했다.
후계자 문제는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평생을 바쳐 죽을힘을 다해 완성해 놓은 랏데 제국이다.
배고픈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맨손으로 랏데를 세웠다.
속을 알 수 없는 일본인들에게 냄새나는 조센징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야쿠자들 손에 죽을 위기도 몇 번이나 넘겼다.
한창 껌 사업이 잘되던 때는 납치까지 당하기도 했다.
당시 돈을 투자해 인맥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오늘의 랏데 제국은 세상에 없었다.
그렇게 랏데를 세우고 보국의 이념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인생이 보답이라도 하듯 한국에서도 승승장구했고 오늘날에 이만큼 탄탄한 기업으로 만들었다.
경제 발전이 한창 이루어지던 시절이라 일본에서 습득한 사업 기술들이 속속 먹혔다.
쇼핑과 제과 음료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체가 됐다.
그 와중에 국가 권력자의 권유로 중공업 분야에 투자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재미를 못 봤다.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하게 짚고 멈출 줄을 알았다.
하지만 자식들은 또 달랐다.
더 큰 그림을 그렸다.
단단히 경고했지만 젊은 아들들의 야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엄마를 쏙 빼닮은 큰아들이 막무가내였다.
사업 수완은 제법 있었지만 운영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인의 피가 반절이나 흐르고 있건만 모든 걸 일본에서 습득한 문화와 방식으로 재단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밑에 두고 있는 직원들도 대부분이 일본인.
주 사업장이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큰아들은 마치 일본인처럼 굴었다.
그에 반해 둘째는 무척 계산적이었다.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은근 고집이 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일정 이상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마음먹은 대로 큰아들을 물리치고 둘째를 회장에 올렸다.
큰아들이 어린 애처럼 씩씩대며 화를 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국말도 제대로 못 하는 큰아들이 회장으로 앉게 되면 국민 정서에도 맞지 않고 용납되지도 않았다.
그토록 한국어를 배워 두라고 했음에도 열등민족 언어라며 무시했다.
뼈대 있는 정치 가문의 여식인 엄마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였다.
그것만 생각해도 성경호는 마음이 아팠다.
장자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뒤에 측근들과 주주들의 반발이 거셌다.
자신이 반기를 드는 모습에 화가 났다.
회장 자리에 둘째를 앉혔다.
일종의 테스트 기간.
실수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진행됐다.
문제는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는 것과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는 것.
부쩍 자신의 기억력이 감퇴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걸 다 챙겨 먹었지만 세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알츠하이머 진단이 떨어졌다.
자칫 잘못된 판단에 욕심을 부렸다가는 제국이 무너질 수 있었다.
갈등하고 있을 때 인사차 찾아온 전문구 회장에게서 운 좋게 조언을 들었다.
장태산의 의중을 들어보라는 말이었다.
과거 한 차례 만난 인연이 있었다.
당시 두 번은 랏데를 살려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장태산.
애써 기억에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최근 들어서 장태산에 대한 칭찬과 시기 질투에서 나온 엇갈린 말들이 귀에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그를 불렀다.
오늘따라 정신이 유난히 명료했다.
“말해보게. 늙은이 속 터지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성경호 회장이 재촉했다.
뭔지 모르지만 흡족한 대답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간단합니다. 추장은 ‘네가 먹이를 주고 싶은 놈’이라고 답했습니다.”
“뭐라고? 먹이를 주고 싶은 놈?”
“네.”
“…….”
생각보다 간단한 대답에 성경호 회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곱씹을수록 명쾌하고 쉬운 답이다.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았다.
“회장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까?”
장태산이 웃음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무서운 녀석이야.’
다시 한 번 장태산이 두려운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성장해 있었다.
자신의 아들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그릇이 돼 있었다.
솔직히 욕심이 났다.
번뜩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
장태산을 품으면 랏데는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 괜찮지 않나?”
“네?”
“여기 말이야. 서울에서 제대로 된 명당자리라네.”
창밖을 손으로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말이 쉽겠군.”
“제가 매입할까요?”
“매입? 이걸 사고 싶나?”
“회장님이 원하시면 매입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잠실 쪽으로 이사 갈 계획이시지 않습니까.”
“사서 뭐하게?”
“저도 타워 하나 세울까 생각 중입니다.”
“벌써?”
“나이가 문제겠습니까. 의지와 돈이 문제지.”
“그렇지! 의지와 돈이 문제지.”
대화가 길어질수록 흡족함은 더했다.
자신 앞에만 서면 언제나 벌벌 떠는 하룻강아지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선했다.
“파신다면 시가대로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욕심이 많군.”
“회장님만 하겠습니까.”
“난 죽도록 배가 고파서 그랬어. 죽을 때까지 배부르게 사는 게 내 이번 생 목표였네.”
“성공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욕심이 더 생겼어.”
“어떤 욕심 말입니까?”
‘이 녀석 설마 짐작하고 있는 거야?’
빙긋 웃는 장태산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어서 보따리를 펼쳐 보라고 말하는 손님 같았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그에게서 흘렀다.
과연 이런 것이 바로 사는 맛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사업을 해오면서 수없이 경험한 배팅의 순간보다 더 큰 판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네.”
“그게 무슨…….”
“장태산 자네가 욕심이 난단 말이야.”
다소 어눌하게 나왔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며 말투가 빨라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흥분에 기가 회동하며 기운이 샘솟았다.
일생일대 마지막 순간의 딜 같았다.
“저 비싼 거 아시나 모르겠습니다.”
“내 막내딸을 주지.”
“네?”
“뭘 그렇게 놀라. 내 귀여운 막내딸을 주겠다고. 요즘 애들하고 달라. 지 엄마를 닮아 얼굴도 봐줄 만하고 아주 순종적이야.”
그야말로 생각지 못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집안과 아들들의 반대를 꺾고 정식으로 호적에 입적해 놓은 막내딸이다.
공식적으로 통계에 들어가지 않은 재산이 꽤 많았다.
특히.
“일본에 있는 랏데그룹 지주회사 지분 반절이 그 녀석 것이야.”
아무도 모르는 비밀까지 꺼내놓았다.
차명으로 관리되어 확인하려 해도 드러나지 않는 정보였다.
“그 말씀은…….”
“자네, 랏데 주인 한번 해볼 생각 없나?”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