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64
163장. 오늘? 뭐?
챙!
투명한 와인잔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났다.
포도주는 오늘따라 더 붉다.
고급진 레스토랑답게 와인도 특별했다.
맛있는 요리도 입안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부드러운 재즈 선율이 따스하게 흘렀다.
결정적인 건 미녀와의 데이트다.
여행은 언제나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재주가 있다.
홍콩에서도 그랬다.
클라라와의 만남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렸다.
영혼은 삼십 대였지만 현실은 고등학생 신분이었다.
더욱이 클라라는 뭔가 감추려 하는 부분이 많았다.
100프로 그녀 마음이 나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좋아했지만 진실한 사랑은 아니었다.
느낌으로 알았기에 본능이 진도를 빼지 못하게 막았다.
차라리 하룻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면 더 과감했을 것이다.
미래를 약속한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성인이라면 이성과 그냥 함께하고 싶은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그랬다.
사라 요한슨과의 대화가 즐겁다.
요리가 나오기 전까지 농담과 정치 이야기까지 자유롭게 주제를 정하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막힘이 없었다.
성숙한 여인만이 풍기는 향기가 한가득이다.
아름다운 미녀가 친절하기까지 했다.
말도 잘 통했다.
몇 마디 말을 나눈 직후 그녀의 지적 매력을 알 수 있었다.
내 말에 귀 기울여줬다.
영특하게 빛나는 연푸른 눈동자가 매혹적이다.
붉은 입술과 은은한 화장품 향기는 심장을 뜨겁게 했다.
목소리는 뱃사람을 유혹해 죽음으로 인도하는 로렐라이의 노래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폴 세잔이 나에게 강림했었다.
잠깐이었지만 빙의 후유증 같이 뜨거운 열기가 남았다.
그림을 온전히 그리기 위해 폴 세잔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어느새 그림이 완성 됐다.
미친 듯이 그렸던 것 같고 그 사이 다섯 시간이 흘렀다.
화선이 삼촌 때와 비슷한 뜨거움이 은은하게 몸에 남았다.
와인도 진했다.
마셔도 갈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라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다.
그녀의 눈동자도 열기에 감염된 듯 뜨거웠다.
마음과 마음이 알아서 전달됐다.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견고한 이성이 자유로워진 마음의 흐름을 막았다.
허락되지 않은 행동은 예의가 아니다.
어제 처음 만난 여인이었다.
아쉬웠지만 이것도 일상의 인연이 주는 행복 중 하나라 생각했다.
낯선 인연과 짧은 순간 진하게 교감하는 에로틱함이 좋았다.
사라와 함께 하지 못해도 이 순간은 진실했다.
“샤토 무통 스타일답게 와인 맛이 풍부합니다.”
포도주의 요정 덕분에 써먹을 곳이 많았다.
귀신이 되어서도 와인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티가 났다.
눈으로 보고 맛을 보면 바로 포도주의 역사가 술술 흘러 나왔다.
“샤토 무통을 아세요?”
사라가 신기한 듯 날 봤다.
동양인들은 대부분 와인에 박식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안다.
미국이나 유럽 상류 사회에서는 와인만 가지고 하루를 거뜬히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동양인들이 상류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그 상식은 깨질 것이다.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와인이면 와인…….
난 그 방면에서는 신이다.
“2000년산 빈티지입니다. 새 천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조한 유명한 종이 레이블 대신 아우구스버그 양이 에나멜로 복제되어 있습니다.”
“정말요?”
“헨리 무어, 마르크 샤갈,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등이 샤토 무통의 레이블에 참가했던 것으로 유명했죠. 참고로 전 1987년 와인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하지만 먹어보지는 못했다.
머리에 이미지가 떠다녔다.
“맛이 다른가요?”
나도 모른다.
다만 입안의 혀가 제 멋대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스위스 화가 한스 에르니가 제작한 빈티지 레이블로 포도재배 1급지로 완성한 바롱 필립에게 바치는 마지막 찬사용입니다. 1988년 바롱 필립이 사망했기에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르도의 온난한 해양성 기후와 사력질 토양의 맛이 가장 깊게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해 태양은 뜨거웠고 바람은 거칠었으며 비는 목마르게 내려 포도들이 마지막 생명을 짜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 마셔보면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거친 생명력이 오롯이 와인에서 눈물처럼 묻어납니다.”
“아…… 그렇군요.”
오! 그렇구나!
나도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서야 이해를 했다.
“와인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아버지가 와인 애호가세요.”
“좋은 취미이십니다.”
“다니엘의 와인 품평은 시 같아요. 그래서 듣기 좋아요.”
사라가 웃는다.
블랙 카드 긁은 의미가 있다.
“특히 보르도 지방의 전용 와인 숙성통은 와인 맛을 배가시킵니다. 한번 향을 맡아 보십시오. 미디엄에서 풀바디까지 단단한 와인 구조가 맡아질 겁니다. 1년이 지나면 오디, 살구, 나무딸기 맛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익어갈수록 타닌이 부드러워지며 향의 범주도 다양해집니다. 이 녀석은…… 송로버섯 향이 좋군요. 숙성이 잘 됐습니다.”
와인을 마시며 나도 감동했다.
송로버섯은…… 아직 맛도 못 봤다.
상상으로 그리며 와인을 음미했다.
역시…… 소맥이 진리다.
그래도 이런 분위기 좋다.
“다니엘 덕분에 소원 풀었어요.”
“네?”
“이곳은 뉴욕에서도 비싼 곳이랍니다. 예약도 쉽지 않아요.”
큐레이터 박봉에 미슐랭 쓰리스타 레스토랑에 출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장죠셉이라 불리는 이 레스토랑은 미슐랭 쓰리스타급이다.
센트럴파크 옆 라인에 위치한 이곳은 맨해튼의 성지라고 로버트가 알려줬다.
간격 넓은 탄탄한 하얀 기둥과 중세 왕이 거주하는 성 같은 공간은 여성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곳곳에 장식된 꽃들은 모두 생화로 싱싱했다.
비싸니까 저 정도는 당연했다.
1인당 가장 저렴한 코스 요리가 200불이다.
예약은 생각보다 쉬웠다.
블랙카드 사에 전화하니 바로 VIP석을 잡아줬다.
“오늘 어떻게 된 거예요? 그 그림 정말…… 다니엘이 그렸어요?”
사라는 그게 정말 궁금한 것 같다.
관장을 비롯해 수석 큐레이터, 로건 타일러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인정했다.
나도 똥 이야기가 입에서 터져 나올 때 식겁했다.
폴 세잔이 내 몸에 내려 그려냈다.
아무리 트집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수전증으로 인한 둘둘셋 붓 터치 기법은 획기적이었다.
좌삼삼 우삼삼이라는 전설의 수법을(?) 세잔도 아는 것 같았다.
관장과 수석 큐레이터, 로건 타일러는 급히 의논할 게 있다고 사라졌다.
로버트도 웃음을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쿨하게 그림을 기증한다는 말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때 사라가 나를 잡았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싶다고 붙든 것이다.
마침 배도 고팠다.
그리고…….
나도 내심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레스토랑에 오면서 대화를 나눴다.
사라는 미술사학사 전공이라고 말했다.
지적인 여인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분위기, 말투와 행동 모두 흠잡을 데가 없었다.
모든 말과 행동이 남성 못지않게 당당했지만 때로는 여성스러웠다.
지금처럼 맛있는 와인과 요리를 맛볼 때는 소공녀처럼 기품이 넘쳤다.
손가락이 길었다.
웃을 때마다 가지런한 치아가 빛났다.
매력이 곳곳에서 넘쳤다.
특히 맑게 빛나는 연푸른 눈동자.
퐁당 빠지고 싶었다.
그리고 사라의 깊숙한 눈동자에서 정체모를 뜨거운 에너지가 꿈틀거렸다.
미술관에서 보았던 눈빛과 달랐다.
연인에게 보내는 따뜻함이 가득했다.
사라는 신비스러웠다.
“보고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더 증명해야 할까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코올 때문만은 아닌 듯한 뜨거움이 심장에서 느껴졌다.
“수많은 미술 전공자도 감정사도 그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구요? 그것도 폴 세잔의 작품이 없는 한국에 살면서 말입니다.”
사라가 대답대신 미소를 지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말했듯이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위작자의 채색과 붓, 터치감은 완벽했지만 화폭에 담긴 그림에 대한 애정은 거의 없었습니다.”
“애정요?”
“쉽게 설명하자면…… 사라 요한슨 양…….”
“사라라고 불러주세요.”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했다.
친한 사람에게나 허락되는 애칭 겸 이름이었다.
“영혼이 타락하지 않은 자가 아니라면 모두 다 느낄 수 있습니다. 애정 없는, 그야말로 욕망만 가득한 그림이 풍겨내는 거짓의 가면…… 은 매혹적이지 못합니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그렸던 그림에는 애정이 담겨 있나요?”
“제 눈에 해답이 있습니다.”
사라의 나를 보는 눈이 이글거렸다.
아! 신들을 잘못 만난 나의 이 주둥이와 영혼이여!
“아…….”
사라가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손님. 관자요리가 나왔습니다.”
때마침 요리가 서빙 됐다.
미슐랭의 위엄은 거짓이 아니었다.
잠시 대화가 멈췄다.
요리들이 입속에서 녹아내렸다.
상큼한 소스와 어울려진 광어 요리가 이어 나왔다.
“흐음…… 살짝 아쉽군요.”
“네?”
“자연산 광어가 주는 건강한 맛이 부족합니다. 양식이 품고 있는 기름진 풍미도 좋지만…… 하니 레몬 소스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미슐랭 쓰리스타라고 하지만 대장금님 요리에는 발끝도 못 따라왔다.
“제 아시는 스승님이 계시는데…… 요리 솜씨가 정말 대단합니다. 신들도 감탄할 정도입니다.”
“네? 신요?”
신이라는 말에 사라가 의아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엽다.
“아쉽습니다.”
진심이다.
이번 생에 오늘처럼 뜨거운 적이 없다.
“요리가요?
사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오늘따라 시간이 더욱 빨리 흐르는 것 같습니다.”
메인 요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와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어디 가세요?”
“내일 일정이 끝나면 한국에 돌아가야 합니다.”
학교 가야 한다.
돌아가서 팰 놈도 줄 쭉 서고 있다.
“안타깝네요. 다니엘과 그림에 대해 좀 더 대화하고 싶은데…….”
사라의 말에 가슴이 허해졌다.
이런 기분 낯설었다.
나도 대화를 더 나누고 싶었다.
밤새도록 그림과 와인 이야기만 나눠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았다.
마음이 통하는 낯선 여인과의 조우.
그래도 어쩌랴.
내가 노바 형도 아니고 어제 만난 여인과……어찌.
“다니엘…….”
“???”
갑자기 사라가 날 부른다.
뭔가 결심한 눈빛이다.
“오늘……”
오늘? 뭐?
“……와인 한 잔 더 마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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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