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84
284장. 인연과 악연 (1)
이게 말이 돼?
나는 아빠라고 부르며 나타난 여성을 보고 당황했다.
물 빠진 청바지에 하얀 셔츠를 대충 걸친 여인은 한눈에 봐도 외모가 출중했다.
이런 동네에 살만 한 미모가 아니다.
모델 같은 큰 키에 어울리는 적당히 마른 몸매, 거기에 질끈 묶은 머리칼.
살짝 그을린 피부에 얼굴선은 갸름했다.
다소 성격 있어 보이는 눈동자와 높은 콧대는 범접하기가 주저될 정도다.
누가 봐도 한국산 엘프다.
나이는 대충 30대 초반.
10대 때는 물론 최근까지도 날리고 다녔을 미모의 여성이다.
당장 강남 한복판에서도 보기 드문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빠 괜찮아요? 그 양아치 새끼들은 어딨어요? 다치지 않았어요. 별일 없는 거죠?”
“어떻게 알고 왔냐?”
“옆 공장 미숙 아줌마가 전화로 알려줬어요.”
“보시다시피 멀쩡하다.”
“아빠…….”
아빠를 부르며 눈가가 촉촉해지는 여인.
약간 혼란스러웠다.
드워프 사장님 딸이 엘프일 리 없었다.
유전자가 아무리 단숨에 진화해도 저런 극과 극 비율은 상상이 안됐다.
“태산 군 보기에 어때? 예쁘지? 한때 잡지 메인을 장식할 정도로 모델계에서 잘 나갔어~.”
역시 어느 잡지에서 봤던 모델이었다.
딸을 자랑하는 임해룡 사장님의 눈빛에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겼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세요?”
엘프 누나가 경계에 찬 눈초리로 날 봤다.
“나를 구해준 은인이다.”
“은인요?”
“공장에 물건 사러왔다가 깡패들 팔목을 똑 하고 분질러 쫓아냈다.”
“지, 진짜요?”
눈을 동그랗게 뜬 누님의 표정은 나이를 떠나 귀여웠다.
“나 안 닮았지? 우리 마누라 닮아서 예뻐~.”
임 사장님은 딸에 대한 칭찬을 계속 이어갔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갑자기 나이를 묻는 엘프 누나.
“올해 스물입니다. 이름은 장태산. 자그마한 투자회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날 지그시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사람 속을 들여다 볼 것처럼 그녀 눈동자는 맑았다.
천천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아빠 구해줘서 고맙다. 누나가 회에다가 술 한 잔 화끈하게 살게.”
말투가 공대녀 필이 났다.
청초한 외모와 달리 아빠의 피를 이어받은 드워프 가의 여식다운 면모를 보였다.
“별일도 아닌데 사주신다면 기꺼이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보기와 달리 싹싹하구나?”
“네?”
“귀엽게 생겼잖아~.”
이래서 나이가 인생을 가르쳐 준다고 하는 것이다.
서른 살이 넘은 여성에게 난 귀여운 어린놈일 뿐이다.
“혹시 영업과장님이 누나십니까?”
“어~ 맞아. 정식으로 소개할게. 내 이름은 임혜린. 영업과장이야.”
“공대 나오셨어요?”
“어? 어떻게 알았어?”
보면 그냥 느껴진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강한 여성의 향취가 진하게 났다.
“과장님. 견적 좀 뽑아주시죠.”
누나와 사담을 나누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상담을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가봐야 했다.
학교 음대 교수님이 급히 보자고 연락해 왔다.
“견적? 진짜 사업해? 그 나이에?”
“누나도 이 공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잖습니까. 그 얼굴에~.”
빈틈없는 대답에 혜린 누나 눈썹이 반달이 됐다.
예쁘다는 말 싫어하는 여성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괜찮겠어? 진짜 손목 분질렀어? 너무 강하게 나간 거 아냐?”
“막장 전문입니다. 아무리 동네 양아치들이라고 해도 이제 쉽게 사장님 못 건드릴 겁니다.”
“그놈들 아주 악랄해……. 이 동네 사람들 전부 알고도 당해.”
“제가 맡아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공장의 안전이 내 이익과 연결된다.
누가 봐도 착한 누나와 드워프 아저씨였다.
“태산아. 쉽지가 않아…….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그놈들 독하고 징한 놈들이야.”
“잘 나가는 변호사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지방 변호사들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인맥이니 제외하겠습니다.”
“네가 아는 변호사가 있어?”
“물론입니다. 사업하다 만난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말만 하면 다 아는 그런 변호사들이다.
대한민국을 암중에서 움직이는 능력자들을 주변에 포진했다.
“그 방법을 나도 생각 해봤었는데 그 새끼들 토착 조폭이야.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시청, 경찰서까지 줄이 닿아 있어.”
엘프 혜린 누나가 걱정스럽게 봤다.
지긋지긋하게 당해온 것 같다.
“걱정 마십시오. 저도 줄이 짱짱합니다.”
“그렇지! 남자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클클클.”
임 사장님은 처음 만난 나를 흐뭇하게 봤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보디가드도 보내 드리겠습니다. 공장 경비가 엉망입니다.”
“그래주면 고맙겠지만……. 지금 사정이…….”
망하기 일보 직전인 회사에 여유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나이 드신 경비원을 고용하기도 벅차 보였다.
“투자하겠습니다.”
“응? 투, 투자?”
“네. 정식으로 투자 의향서를 작성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
말을 잇지 못하는 혜린 누나.
갑작스럽게 나타나 아빠를 구해주고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말에 놀라는 눈치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제안하는 내 정체가 궁금할 것이다.
“과장님. 물품들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죠. 제가 좀 바쁩니다.”
“그래 뭐가 필요해? 말만하면 누나가 다 구해 줄게!”
활짝 웃는 혜린 누나와 드워프 임 사장님.
– 대장장이 조상들이 당신에게 카르마 포인트를 지급했습니다.
***
또로로로록 통.
“X발! 오늘따라 공이 왜 이따구야?”
동해 캐피탈의 주인 남학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젯밤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다.
커다란 호랑이가 자신을 통째로 잡아먹는 꿈이었다.
사무실에서 골프채로 퍼팅 연습하는데 번번이 공이 옆으로 새 실패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남학수.
“사,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그때 밖에서 부두목 만석의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야!”
덜컹 문이 열리며 장만석이 새파랗게 얼굴이 질린 채 들어왔다.
“이, 인터넷에……. 터졌습니다.”
“이 새끼가 뭔 말을 지껄이는 거야. 인터넷에서 뭐?”
“다옴 나고라에 우리 동해파 이름이…….”
“뭐야? 다옴 나고라!”
남학수는 빠르게 인터넷을 클릭했다.
인터넷 여론이 무섭다는 걸 촛불 집회를 통해서 배웠다.
지역 국회의원의 부탁으로 자신도 조직원들을 동원해 여론몰이를 했었다.
“헉!”
남학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강릉 동해파 협박 사건…….”
남학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여러분. 세상에 아직도 이런 악마 새끼들이 살고 있습니다. 전 강원도 강릉에서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세상 정직한 분의 딸입니다. 사업 위기로 급하게 사채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놈들은 악마였습니다. 이자와 원금을 다 받아가고도 하루에 원금 같은 이자를 내놓으라고…….]그렇게 시작된 내용에는 놀랍게도 임해룡 사장 협박 사건의 전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첨부된 음성 파일.
병원에 입원한 조직원들이 씨불여 놓은 말들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이중 계약서로 협박하는 음성은 모든 이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 와아! 아직도 세상에 이런 놈들이……. 숨 쉬고 살아있네요……. 도대체 강릉 경찰서는 뭐하는 곳이랍니까?
↳ 조폭 새끼들 싹 쓸어서 바다에 쳐 넣어야 합니다!
↳ 헐? 이거 진짜임? 개쩐다……. 정부는 뭐하는 거임?
↳ 〈그것이 알고 싶은가〉 제작진입니다. 010-90xx-1238로 연락 주십시오. 사건 전반을 취재하고자 하오니 연락 주십시오.
↳ 동해파! 저 알아요. 강릉 양아치들이 못 들어가서 환장하는 조폭 집단이에요. 동해 캐피탈에 우리 아버지도 이자 엄청 뜯겼어요.
↳ 죽여 버려! 쌩 양아치들!
인터넷 여론이 순식간에 들끓었다.
빼도 박도 못한 증거들이 제공되자 국민들이 분노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남학수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서장…… 님.”
– 남 사장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요? 지금 경찰서 홈페이지가 난리가 났어요! 지방경찰청장님이 싹 잡아들이라고 엄포를 놨어요! 빨리 애들 몇몇 추리세요……. 사무실 비우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남학수는 혼이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평소 알고 있던 임 사장답지 않게 일을 크게 만들어 버렸다.
더군다나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있기에 폭탄이 떨어졌다.
“사, 사장님.”
장만석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야! 도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썅!”
콰앙!
책상을 후려치며 남학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여기를 떠야 했다.
서장이 직접 전화해 말할 정도라면 정치계 쪽 라인의 도움을 받기는 힘들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법.
“죄송합니다! 형님!!!”
책상에 머리를 피가 나도록 때려 박은 장만석.
“애들 입단속 철저히 시켜. 그리고 변호사 불러 서류상 착오였다고 발뺌해. 임 사장 그 새끼 대출은 완납 처리해! 개 썅!”
“바,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이거 냄새가 나. 뒤를 캐봐. 그리고 잡아봐. 그놈은……. 반드시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남학수는 급하게 명령을 내리고 부리나케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삐뽀 삐뽀.
잠시 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경찰차 몇 대가 동해 캐피탈 사무실 쪽을 빠르게 달려왔다.
***
“오랜만이네……. 강릉.”
AT 씨큐리티 대표 한진웅은 강릉을 보며 감회에 빠졌다.
늦게 만난 첫사랑 그녀와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던 강릉 앞바다.
그녀를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 믿었다.
누가 봐도 예뻤고 성격도 싹싹하고 괜찮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사정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문자 하나 남기고 떠나버렸다.
붙잡을 수 없었다.
챙겨야 할 부하들이 눈에 밟혀 사랑을 지킬 수 없었다.
부웅 부웅.
한진웅의 차가 미끄러지듯 주소에 찍힌 공장으로 진입했다.
대표의 명령을 받았다.
급하게 요인 경호가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
차를 몰고 강릉에 도착했다.
후발대도 곧 뒤를 따라 올 예정이었다.
‘중요한 공장은 아닌 것 같은데…….’
한진웅은 평범한 주물 공장임을 확인하고 의문을 품었다.
그것도 대표의 사업 투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규모 공장이었다.
밤이 늦은 시간.
따다당 땅땅~♬.
공장 안 사무실에서 냄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
한진웅은 살짝 열린 공장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두만강~ 푸른 물에~♪~”
귓가에 구성진 노랫소리가 들렸다.
“노 젓는 뱃사공~♩.”
“아빠! 귀 아파요! 레퍼토리 좀 바꿔요!”
“이 정도면 가수급이지~ 그런 너도 나만큼 하잖아. 크크크.”
“아빠! 이건 민폐라고요!”
“내가 왕년에 한 곡 땡기면 동네 처자들이 다 쓰러졌어. 네 엄마도 이런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잖아~.”
“와아아……. 아빠 거짓말이 수준급이네. 강릉 바다 보러 놀러온 순진한 엄마 야간 버스 끊기게 만들고 작업했잖아요.”
“그게 다 그거지~ 흐흐흐흐.”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가 한진웅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한진웅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입가에 싱그럽게 미소가 번졌다.
누구나 누려야 할 소소한 행복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계십니까!”
한진웅은 큰 목소리를 내고 컨테이너 사무실 밖에서 사람을 불렀다.
“누, 누구세요!”
“장태산 대표님 부탁으로 경호회사에서 나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끼이이익.
공장 안 컨테이너 사무실 문을 열었다.
‘족발 파티네. 훗.’
사무실 회의실 탁자 위에 족발과 비어버린 막걸리 몇 병이 보였다.
소파에 앉아 있는 작은 키에 빨간 코 중년 남자가 보였다.
“어? 곰이 왔네?”
사람 좋은 중년 남자가 한진웅을 보며 스스럼없이 곰이라 불렀다.
“처음 뵙겠습니다. AT 씨큐리티의…….”
들어서며 인사를 하던 한진웅.
중년 사내 옆에 서 있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한진웅은 화들짝 놀랐다.
조용하게 말없이 서 있는 그녀.
“혜, 혜린 씨!!!”
# 285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