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776
777장. 어전회의.
“끄으으으응……. 끄응.”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
전문구는 내색도 못 하고 끙끙 앓았다.
알량하게 남아 있던 자존심을 세우다 된통 당했다.
경고 한마디를 남기고 장태산은 사라져 버렸다.
한번 돌아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냉정한 투자가의 전형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회장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장주시까지 동행해 연구소 입구에서 대기 중이었던 정진환 부회장이 눈치를 살살 봤다.
지금까지 모신 경험으로 보아 현재 전문구 회장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걸 알아챘다.
“속이 안 좋아.”
“병원으로 모실까요?”
“그게 아니라……. 휴우.”
길게 한숨을 내쉬는 전문구.
‘병아리와 후라이라…….’
애들이나 사용할 법한 농담 따먹기처럼 흘린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운명을 스스로 깨트리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빗대어 말한 장태산의 발언.
전자의 경우에는 새로운 세상과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후자의 경우 타력에 의해 부서지는 동시에 먹잇감이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전문구와 연대자동차 그룹을 상대로 한 경고.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배가 고파 어느 때보다 맛있게 먹었던 육개장이 다시 넘어올 것만 같았다.
말 한마디가 남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귀신같은 녀석.’
장태산은 전문구의 이 같은 성격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세상에 실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걸 꺼려했던 전문구.
하지만 관상쟁이처럼 전문구의 성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장태산이었다.
이번에도 보란 듯이 패배를 맛봤다.
“연대해운…… 어떻게 생각해?”
조수석에 타고 있는 정진환 부회장을 향해 전문구가 넌지시 물었다.
“네? 해운요?”
“그래. 해운.”
앞뒤 없이 툭 던진 물음이었지만 뭔가 함축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질문이었다.
‘갑자기 해운은 왜…….’
정진환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간 연대해운 쪽에서 대출 관련해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요청해 왔다.
전문구 회장의 성격을 알기에 웬만한 건 모두 거절했다.
과거 연대그룹 핵심 사업 중 하나였던 연대해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폭풍을 만난 난파선처럼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돈 몇 푼 지원해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장기계약 맺은 용선료가 문제였다.
운임 단가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기름이 많이 드는 오래된 배들을 운행하면서 계속 적자가 누적됐다.
욕심 많은 거대 머스크와 MSC가 기회를 포착하고 물어뜯었다.
대형 컨테이너선을 투입해 저가 경쟁을 시작했다.
해양판 치킨 게임.
살아남는 자가 모든 걸 집어삼킬 수 있었다.
한국과 연대해운 경영주들이 그 싸움에 뛰어들기에는 능력도 자본도 받쳐주지 못했다.
물려받은 기업 가치도 모르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알짜 해운업의 장기 투자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불황의 파고와 대형 해운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만신창이가 됐다.
대주주들은 악성 루머가 퍼지기 전에 주식을 처분했다.
기본적인 상도의도 없는 사업주들.
직원들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무심하기는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회생보다는 파산을 바라는 경영자들은 회생을 위한 로비에 나서지 않았다.
유럽과 중국의 거대 해운사들과 경쟁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다.
레드 오션이라 판단하고 과감하게 버리려고 준비 중이었다.
국가적으로도 손해가 막심했다.
전 세계에서 수출입 물량 10위권 안에 드는 대한민국에 대형 해운사가 전무하게 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현재 이 상황에서 해운업에 뛰어드는 건 봉이나 하는 짓이었다.
법정관리 등을 통해 채무가 조정되어야만 그나마도 생각해 볼만했다.
정부도 미래 자산 가치를 아주 모르지 않은 만큼 어느 순간 이 판에 뛰어들 게 뻔했다.
“시기상조입니다.”
정진환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이 시점에서 전문구가 말을 꺼냈다는 건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형제간의 의리나 연대라는 이름으로 떠안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용선계약 해지와 새로운 상선 투입을 위한 선박 발주가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했다.
누가 봐도 최소 몇 년 동안은 적자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사업가라면 절대 이 판에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알아봐.”
“네?”
“채권은행과 정부 측 관계자들 만나봐.”
“회장님…….”
“나 배 아파. 그러니까 길게 말하지 마. 머리 복잡하니까.”
전문구는 인상을 팍 쓰며 눈을 감아 버렸다.
장태산은 분명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바로 승낙하지 못했지만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이거 영 창피해서……. 이 나이에 아직도 달걀 신세라니…….’
최측근에게도 쉬이 내뱉을 수 없는 비밀.
전문구는 생각할수록 장태산이 두려웠다.
KI그룹 다음 차례로 연대가 그의 타깃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장태산이 그리는 사업 영역이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재력은 평가 자체가 불가능했다.
연대자동차를 비롯해 계열사 주식을 해외 투자자들이 매집하고 있다.
그 무리에 분명 장태산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장태산 정도 되는 인물들은 허투루 말하지 않다는 걸 전문구도 잘 알고 있다.
다급하다 해도 자사주를 매입하기에는 여력이 없는 상황.
곧 있을 한전부지 입찰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재벌에 관한 제재 법규 때문에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꾸르륵 꾸르르륵.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전문구의 위장이 뒤틀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내장도 주인을 닮아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듯 편치가 않았다.
***
“갔어?”
“어.”
“욕심 많은 아저씨가 뭘 달라고 했을까?”
“궁금해?”
“당연한 거 아냐?”
“비밀인데.”
“우리 사이에~.”
또박또박 ‘우리 사이’를 강조하며 임윤아가 배시시 웃는다.
전문구 회장이 입맛을 다시며 돌아갔다.
주변을 산책하고 있던 임윤아와 다시 만나 한손에 커피를 들고 나란히 연구소를 걸었다.
뒷산과 성벽이 찬 겨울바람을 알맞게 차단했다.
따사로운 겨울 오후 햇살이 쏟아지는 연구소.
임윤아는 전문구 회장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내용이 궁금한 모양이다.
“해운업 매입하라고 했어.”
“해운업이면…… 연대해운?”
“맞아.”
“몇 년 동안은 답이 없어 보이던데……. 전 회장님이 구입할까?”
“그것도 알아?”
“태산 씨, 나 하버드 나온 여자야.”
그래, 잠깐 잊고 있었다.
임윤아가 나보다 훨씬 학벌이 좋다는걸.
“오정중공업 요즘 힘들지?”
“아마도 그럴걸. 갑작스럽게 해운업계 불황으로 수주가 많이 줄어들었어. 중국 쪽에서 워낙 저가로 후려쳐 운반선 쪽은 답이 없고.”
“시추선이 문제가 될 거야.”
“시추선?”
임윤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미래의 해운업계 흐름을 알고 있는 나.
곧 조선업계에 닥칠 시련이 훤히 보였다.
“오정중공업에서 계약한 드릴쉽들은 앞으로 처치 곤란한 재고가 될 게 확실해.”
“정말? 아직 유가가 안정적인데…… 과연 그럴까?”
오정중공업의 주력 상품 중 하나인 드릴쉽.
고유가 상태에서는 효자 상품일 수 있지만 저유가 시대에는 애물단지가 된다.
“오정에서 몇 년 사이 열 척이 넘는 드릴쉽 물량을 수주한 걸로 알아.”
“맞아. 나도 보고서 봤어.”
오너 일가 일원으로서 타 계열사 상황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는 임윤아.
한 척당 7000억 정도 되는 드릴쉽은 얼마 가지 않아 악성 재고가 될 것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유가는 수직 낙하할 거야.”
“유가가? 얼마나?”
임윤아가 크게 놀라며 물었다.
“드릴쉽 발주 물량이 작년 하반기부터 확 줄어들었을 거야. 선주들은 이미 고급 정보를 획득하고 있어.”
“흐음…….”
“계약을 맺은 만큼 어쩔 수 없이 진행해야겠지만…… 앞으로 저유가 추세는 계속될 거야. 아랍 쪽에서 사건이 터져도 과거처럼 석유파동은 오지 않아.”
“나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어. 미국에서 시작된 세일 가스는 앞으로 혁명이 될 거야.”
미국에서 공부하며 직접 보고 들은 게 있을 임윤아.
하버드 경영학과는 학벌 간판만 가져오는 게 아니었다.
수재들이 모여 함께 공부하는 만큼 미래를 보는 안목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오정중공업은 살아남을 거야.”
“그것도 확신이야?”
“드릴쉽 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투자를 게을리 하지 않잖아. 대덕연구단지를 비롯해 전체 매출액에서 1% 정도는 항상 투자하고. 그게 경쟁력이야.”
“그래도 연대중공업에는 밀려. 대웅이야 국가 회사니까 그렇다 치지만…….”
대한민국 3대 조선소 중에 가장 매출액이 떨어지는 오정중공업.
“자신감을 가져.”
“태산 씨가 도와 줄 거야?”
임윤아는 마치 나를 개인 수호신처럼 여기는 듯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한 남자에 대한 무한 신뢰.
“친환경과 스마트, 고효율 선박을 준비하고 있잖아. 중국이 저가 공세로 밀어붙여도 어느 순간 선주들은 알게 될 거야. 싼 게 비지떡이라는 걸 말이야.”
고부가가치 선박을 주문했다가 유럽 선주들은 중국 조선소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다.
배를 띄워도 고장으로 출항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발전이 무서워.”
“공산주의 국영 기업의 한계가 어느 순간 발목을 잡아. 중국 정부에서 밀어주지만 내부적 선견지명이 없다면 발전은 멈출 수밖에 없어. 조선업 10년 불경기 때문에 몇 년은 힘들겠지만…… 그다음에는……. 다시 부활할 수 있어.”
“그 예언…… 믿을게.”
예언이 아니다.
대한민국 자산인 인재들은 바보가 아니다.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LNG 선박으로 몇 년 뒤면 대박을 친다.
조선업 인프라가 뒷받침 되지 못한 중국 조선소들은 혹독한 구조조정에 빠진다.
세계적 경기 불황 때는 비로소 승자가 덩치를 키우는 법.
몇몇 인재들을 도둑질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고급 기술과 노하우는 그렇게 쉽게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날짜 잡아.”
“무슨 날짜? 우리 결혼식?”
“…….”
임윤아, 농담이 세다.
약혼도 아니고…… 결혼식이란다.
“헤에. 농담이야~.”
진짜 여우가 다 됐다.
“중공업 사장과 자리를 만들어봐.”
“왜?”
“배를 몇 척 주문할 거야.”
“누가? 태산 씨가?”
“그건 비즈니스 영역.”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임윤아.
“연대상선…… 내가 살까?”
임윤아가 전문구보다 똑똑했다.
내 투자 성향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
“오정은 오정이 할 일을 해야지.”
“뭐?”
“반도체.”
“그건 지금도 잘하잖아.”
“세상에 완벽하거나 영원한 건 없어. 2020년이 되기 전에 일본 반도체 사업은 모두 무너질 거야.”
“일본 반도체가?”
나도 믿기지 않지만 1952년 네덜란드 필립스로부터 기술을 들여와 반도체를 만들던 일본은 2019년을 기점으로 대부분 사업을 접는다.
가전사업 생산을 위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일본 전자 기업들.
한때 세계 시장 점유율 50%를 자랑하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2020년에는 5% 미만으로 하락한다.
이미지 센서를 공급하는 소니 정도만 살아남는다.
나머지는 모두 한국과 대만 기업의 가격 경쟁력에서 뒤지고 만다.
1등에 안주하다가 서서히 말라 죽는 일본 반도체 기업.
오정과 한국 반도체 업계가 그 뒤를 따라 무너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반면 상도덕도 모르는 중국은 겁도 없이 반도체를 노렸다.
무차별적인 그들의 테러 같은 기술 습득 능력.
고연봉을 따라 중국에 넘어갔던 반도체 연구원들의 영향이 크지만 그들도 업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기술만 쪽 빨리고 1년 만에 도망쳐 오듯 쫓겨나는 연구원들이 태반이다.
매국의 대가는 달콤하지만 스스로를 죽이는 독이 든 잔에 불과했다.
“중국을 잊지 마. 그들은…… 아귀들이야.”
“중국…….”
임윤아가 나의 말을 곱씹었다.
“긴장은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품지 않아도 돼. 오정 반도체 기술력은 세계 최고야.”
“맞아. 그건 나도 인정. 연구원들 실력은 진짜 대단해. 그리고…….”
말끝을 흐리며 임윤아가 날 바라봤다.
“태산 씨도 있잖아.”
깜찍한 임윤아의 말.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 말대로 내가 뒤에 있다.
오정의 최대 주주가 나다.
내가 먹으려고 물 부은 밥에 숟가락 담갔다가는…….
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
그때 북쪽 하늘에서 날아오는 몇 대의 헬기가 보였다.
“누구…… 초대했어?”
임윤아가 궁금한 듯 물었다.
“사장단 회의가 있어.”
“사장단???”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