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9
88장. 화려한 외출
‘아줌마들. 왜 벌써 쫄고 그래? 재미없게.’
부부동반 동창회 모임에 초대한 목적은 빤했다.
이런 동창회에 나오는 이들은 대부분 성공한 자들이다.
집이 부자거나 남편이 잘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찍어 누르지 못하자 순자 아줌마가 농사꾼인 아버지를 걸고넘어지려 수를 썼다.
굳이 아버지를 모시고 올 필요는 없었다.
착하기만 해서 아버지는 헤헤 웃고만 다닐 것이다.
내가 이 판에는 제격이다.
“효숙아, 20년 만이지?”
“어? 어……, 그쯤 됐네. 너 서울에서 사라진 뒤에 못 봤으니까.”
“세월이 무상하다. 너랑 학교 앞거리를 휩쓸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래. 마음은 항상 그때지만 나이가 많이 먹어 버렸다.”
‘저 아줌마는 순자 아줌마보다는 낫네.’
엄마가 손을 잡고 얘기하는 효숙이라는 아줌마는 그렇게 악한 분이 아닌 것 같다.
그에 반해 순자 아줌마는 얼굴이 썩어갔다.
“이, 이 차 뭐야? 렌트한 거야? 너 오랜만에 동창회 나온다고 무리하는 거 아니니? 렌트 비용 비쌀 텐데.”
허자 넘버가 아님에도 무식해서 자가용과 구별도 못 하는 순자 아줌마다.
문을 열고 내렸다.
“고객님, 주차해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지갑에서 10만 원짜리 수표를 꺼내 건넸다.
만 원이 기본 팁이지만 오늘은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수표를 받아들고 주차요원이 차에 탔다.
“순자 아주머니, 또 뵙습니다.”
“너, 너!”
차가 사라지고 순자 아줌마와 눈이 마주쳤다.
활짝 웃었다.
“이건 어머니 차입니다. 서울에서 장 볼 때 타고 다니는 차입니다.”
“무슨 소리야! 저 차가 얼마짜린데!”
“3억밖에 안 하던데요?”
“뭐, 뭐라고 3억???”
2008년도에 3억은 큰돈이다.
그런 돈을 주고 산 차가 장 보는 용도라고 말하자 눈이 뒤집어졌다.
“태산아. 학교 때 내 단짝 장효숙이야. 인사드려라.”
엄마가 다른 아줌마를 소개시켜줬다.
“처음 뵙겠습니다. 주설란 여사의 장남 장태산이라고 합니다.”
아주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 올렸다.
“어머. 정말 잘생겼다. 배우해도 되겠다. 대학생?”
“네. 올해 신입생입니다.”
“어디 대학교?”
엄마들의 관심은 언제나 똑같다.
“한국대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명함을 내밀었다.
“하, 한국대 법학과! 와, 너 공부도 잘하는구나! 설란아 축하해. 너 이제 고생 끝났다.”
“고생은 지금도 안 해. 아들이 너무 잘해주거든.”
우리 엄마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래 이 맛에 학교 동문회에 오는 거다.
아들 자랑 돈 자랑, 남편 자랑 그거 말고 뭐 있겠나.
“네,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
“왜 안 되나요? 아버지 회장단 연수 가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우리 주 여사님이 보시는 것처럼 연약하십니다.”
“…….”
회장단이라는 말에 주순자 아줌마가 놀라는 게 보였다.
거짓말하지 않았다.
면사무소 주동으로 마을 이장과 영농회장들이 농업 연수를 핑계로 놀러 가셨다.
“그래 아들이 뭐가 어때서~ 순자 너도 작년에 아들 데려왔잖아.”
“순자 아니고 서원이라니까!”
“어? 그랬어? 미안해. 순자라는 이름이 입에 배서 잘 떨어지지가 않네.”
장효숙 아줌마 거짓말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은 순자 아줌마를 경멸하고 있었다.
엄마를 만나 힘을 얻은 것 같다.
“흥!”
삐친 티를 팍팍 내며 주순자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설란아.”
“그래. 친구.”
두 중년 아줌마들은 대학시절처럼 팔짱을 끼고 앞장섰다.
아! 보기 참 좋다.
그런 엄마와 친구분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오늘 준비한 사건이 몇 개 있다.
사뭇 기대가 됐다.
***
“오랜만입니다. 장 교수님. 이번에 정교수 되신 거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언제 시간 내서 라운딩 한 번 하시죠. 김 대표님.”
“남는 게 시간인데 그럴까요?”
얼굴을 아는 남편과 남자 동창들이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지지배. 너 보톡스 맞은 거야? 얼굴이 왜 이리 탱탱해?”
“소리 낮춰. 이거 안 맞으면 이제 낯짝 들고 다니기도 힘들어~.”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다니…….”
“세월을 어떻게 이기냐. 그냥 돈으로 처발라서 반항이라도 해봐야지.”
“호호. 그건 그래.”
여자 동창생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며 놀았다.
“수준 떨어지게…….”
“그러게 말입니다. 남편 잘 만나서 다들 팔자가 좋아요.”
남편이 회화과 출신인 부인들은 자기들끼리 뭉쳤다.
서울 팰튼 호텔 소연회실 아르망고에서 파티가 한창이다.
소연회실이라 불렸지만 100인 넘는 인원이 모여도 부족하지 않은 공간이다.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가 은은하게 빛났다.
통유리 너머로 서울 야경이 완벽한 배경그림이 됐다.
중앙 무대에는 현악 4중주의 라이브 음률이 조용하고 나직하게 흘렀다.
10여 개의 대형 원형 탁자 위에는 과일과 케이크, 과자 종류가 안주로 준비되었다.
그 주변에 앉거나 서서 대화하는 이들이 50명이 넘었다.
다섯 명의 남녀 호텔리어들이 각종 와인을 들고 부지런히 서빙을 했다.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10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홍인대 회화과 84학번 부부동창 모임은 규모가 컸다.
당시 홍인대 회화과 졸업생 40명 중에 30여 명이 회원이었다.
남녀 동창생들은 각각 사회적 기반을 어느 정도 잡았다.
당시에 홍인대 미대에 다닐 정도라면 집안이 어느 정도 살아야 가능했다.
부모의 부를 바탕으로 어렵지 않게 상류층에 도달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소식 들었어?”
“뭐?”
“설란이 오늘 온다잖아.”
“설란이라면……, 주설란?”
“어머머머. 웬일이니. 설란이가 온다고?”
회화과 여자 동창생들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학교 다닐 때 넘사벽의 위치였던 친구다.
가문에서 축출당한 후 평범한 회사원과 결혼해 시골로 내려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순자가 우연히 만났는데 불렀나 봐.”
“이거 빅뉴슨데. 설란이 하면 목매던 남자들이 저기 있잖아.”
회화과 남자 동기들을 바라보며 과거를 생각하는 여자 동기생들이다.
“나이 먹고 설마 옛날 미모 나오겠어? 시골에 살아서 얼굴도 타고……, 그리고 이 자리가 어딘데 오겠어. 괜히 망신살 뻗치지.”
“그래도 보고 싶다야. 설란이가 성격은 착했는데…….”
“착하면 뭐 해. 집에서 쫓겨나고 남편 잘못 만나 인생 망쳤는데.”
질투하는 이들이 태반은 넘었다.
그 정도로 당시 주설란의 인기는 탑이었다.
“어! 저기 순자 온다!”
“있을 때는 서원이라고 불러라. 순자라 부르면 성격 나온다.”
그때 씩씩거리며 주순자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곧바로 주순자가 여자 동창들 사이로 직진해 왔다.
“뭐야? 화난 거야?”
“순자 남편 이 변호사가 성격이 까칠하다던데……, 한 판 했나?”
“그 집안 남자들이 다 그래.”
뒷담화를 까는 사이 주순자가 다가와 와인 한 잔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무슨 일 있어?”
“흥! 재수 없어…….”
“뭐, 뭐라고?”
“너 말고 그 계집애!”
순자는 그대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누구?”
동기들이 묻는 사이 갑자기 입구가 술렁거렸다.
“어?”
“헛!”
가장 먼저 반응하는 이들은 회화과 동기 남자들이다.
40여 명 중 남자는 10명 정도밖에 안 됐지만 모두 다 사랑했던 한 여인.
세월의 강을 건너뛰고 나타났다.
변한 건 거의 없었다.
다른 여자 동기들은 애를 낳고 펑퍼짐하게 몸매가 변하고 얼굴에 보톡스를 맞을 정도로 변했건만 그녀는 그대로다.
이제 30대 중반을 갓 넘은 것 같은 피부에 얼굴은 과거처럼 고결한 품격이 흘렀다.
입가에 피어난 미소는 소녀와 같았다.
쿵! 쿵! 쿵!
동기 남자들은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심장이 뛰었다.
여자 동기들 남편들의 충격은 더했다.
자기 와이프들이 갖추지 못한 품위를 갖춘 여인의 등장은 눈을 멀게 만들었다.
“서, 설란아…….”
홍인대학교 회화과 교수 장찬우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두 눈동자는 고정된 채 주설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이든 흔적보다 시간의 원숙함만이 더해진 홍인대의 여신 주설란.
꿈에서도 가끔 보이던 그녀가 눈앞에 진짜 나타났다.
“찬우?”
주설란이 알아봤다.
“어, 나……, 장찬우야.”
장찬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를 처음 본 그날처럼 심장이 미칠 듯 뛰었다.
“알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예전 분위기 그대로야.”
“너야말로 그래. 설란이 넌 지금도 여신이구나.”
장찬우는 툭 하고 진심을 뱉었다.
“여신은 무슨……, 애들 키우느라 아줌마 다 됐어.”
“무슨 소리야! 넌 아니야. 특별해!”
장찬우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외쳤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진심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집중된 시선에서 그의 외침은 어떤 선언과도 같았다.
찌리리릿.
그때 등 뒤에서 강력한 살기를 느꼈다.
‘젠장…….’
그때서야 장찬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학교 이사장의 손녀인 호랑이 같은 마누라가 뒤에 있다는 걸 잠시 잊었다.
“설란아! 반갑다! 나 영호야!”
“야! 이게 얼마만이야? 나 혁찬이야. 설마 나 잊어버린 건 아니지?”
장찬우가 주춤거리자 다른 불나방들이 달려들었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다들 반가워.”
주설란은 자신을 반겨주는 남자 동기들의 환호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남자들 표정 모두 황홀하게 변했다.
주설란은 나이 먹은 동기 남자들의 모습에 과거 흔적을 찾았다.
이제 주름이 지고 뱃살이 늘어난 동기들이다.
남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84년도 대학교 첫 입학했을 때 느꼈던 청춘의 여운을 느꼈다.
오랜만의 화려한 외출이다.
“니들은 나는 보이지도 않지?”
효숙이 남자 동기들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봤다.
“어? 넌 자주 보잖아.”
“됐어. 이 화상들아. 니들 마누라들 눈에 불났다.”
효숙은 메롱거리며 주설란의 팔짱을 끼고 이끌었다.
남자 동기들은 아쉬운 눈빛만 가득 담았다.
“설란아. 애들이 기다려.”
여자 동기생들이 멍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주설란을 바라봤다.
자신들과 완벽하게 다른 외모와 품격은 절로 겸손한(?) 마음가짐을 갖게 만들었다.
재학 중에도 감히 주설란을 어찌하지 못했다.
집안은 빵빵했고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실력은 뛰어났으며, 미모는 학교를 뒤흔들었다.
그런 주설란이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모두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일어났다.
인상을 팍팍 쓰며 딴 곳을 바라보는 순자만 외면했다.
“다들 잘 있었지? 진짜 오랜만이다. 친구들.”
주설란은 진심으로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바, 반가워. 설란아…….”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부럽다.”
친구들이 주설란을 부럽게 바라봤다.
옷차림도 한눈에 봐도 최고급 명품 브랜드였다.
발끝 구두부터 머리끝까지, 시계와 액세서리 모두 평범함을 거부했다.
화사하게 웃는 주설란.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인 듯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홍인대 회화과 84학번의 전설의 여왕이 귀환했다.
한없는 찬양과 거대한 질투를 동시에 받으면서…….
# 89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