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01
중년 시종은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한제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의 어린 주인과 똑같이 생긴 한제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지만 표홀한 움직임 또한 놀라웠기 때문이다.
배에 오른 한제는 말없이 청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청년은 한제를 몇 번이고 자세히 살폈고 그럴수록 두 눈에는 놀라움이 담겼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리에 앉더니 시종에게 술잔을 더 준비하라고 일렀다.
잠시 후, 깨끗한 술잔이 한제 앞에 놓였다. 청년은 그 잔에 술을 채우면서도 계속해서 한제를 힐끔거렸다.
“형님과 저는 매우 닮았군요. 저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나보았지만 이토록 닮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혹시 형님의 함자를 알 수 있겠습니까?”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한제는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조용히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그럼에도 청년은 개의치 않는 듯 한제의 빈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배는 다리를 지나 더 멀리 흘러갔다. 뱃머리에서는 여전히 무희들이 춤을 추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술잔을 비우는 동안 한제의 고민은 깊어졌고 술맛도 느끼지 못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무슨 시험이기에⋯⋯. 더구나 저 사람은 생김새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나와 똑같다.’
한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또다시 술잔을 비웠다.
그러는 동안에도 청년은 미소를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종들은 입을 비죽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소성의 계화주(桂花酒)가 얼마나 비싼 건데⋯⋯.’
시간이 흘러 곧 밤이 찾아왔다. 서늘한 강바람이 스쳤다. 무희들은 진즉 물러났고 남은 것은 한제와 청년, 뒤에 시립한 종까지 세 사람뿐이었다.
달빛이 드리운 강 위로 미풍이 불면서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잔뜩 골이 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리던 시종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리를 숙여 청년의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한제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럼에도 청년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시종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청년에게 속삭였다.
“도련님, 이러면 뱃삯을 더 내야 합니다. 그리고 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요.”
“그렇다면 내 술을 마시지.”
어느덧 눈빛이 또렷해진 한제가 오른손을 휘둘러 술동이를 소환했다. 물론 용의 피는 아니었다. 허나 제법 효능이 있어 일반인이라면 이 술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늘어나고 머리가 영민해질 터였다.
허공에서 술을 꺼내는 한제의 모습에 시종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기겁을 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주인을 재촉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잔을 채운 한제는 술동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곳은 조나라인가?”
시동 못지않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은⋯⋯ 선인이십니까?”
“아마 어느 산촌에서 태어나 자랐겠지. 아버님의 존함은 이 상자 재자. 형제 중 둘째로 목수 일을 하셨을 테고. 어머니는 주 영자 미자. 서당에서 몇 년 간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셨을 게야. 네게 글을 가르친 것 역시 어머니였을 테지.”
한제는 술잔을 쥔 채 혼잣말을 하듯 차분히 중얼거렸다. 허나 정작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숨쉬는 것도 잊은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한제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술잔을 내려놓더니 복잡한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네가 택한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거라.”
말을 마친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밝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흐릿했던 눈앞의 모든 것이 깨끗하고 명확해졌다.
이내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허공으로 나아갔다.
한쪽에서 사시나무 떨듯 서 있던 시종은 털썩 주저앉더니 멀어지는 한제의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진짜 선인⋯⋯ 도 도련님. 진짜 선인입니다. 도련님의 꿈이 정말이었습니다!”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보던 청년은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숙여 탁자 위의 술동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은 깨달음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하늘로 떠오른 한제는 저 아래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주작성의 조나라와 똑같은 대지였다.
‘천운성에서와 비슷한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곳에서는 도를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심마(心魔)와 맞서야 하는 것이었군.’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수련자로서의 삶을 후회하는 것일까? 그러지 않고서야 일반인의 삶을 택한 나를 만나게 됐을 리가⋯⋯.’
한제는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시 천운성에서 도를 찾았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나의 존재와 이곳의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 내가 영혼의 상태로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까지 알고 있다. 이제 슬슬 불을 붙이러 가야겠군.’
허나 한제의 눈빛에는 표현할 길 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이 흐릿한 세상을 본 순간부터 첫 번째 관문의 향이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불을 붙여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첫 번째 향에 불을 붙일 수 있을 터였다.
‘허나, 그전에 한 번만 보고 싶군. 그분들을⋯⋯ 그리고 그녀를⋯⋯.’
한제의 눈에는 짙은 외로움과 흩어지지 않을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는 이곳의 모든 것이 허상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역린과 같은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기는 힘들었다.
‘딱 한 번만 보고 곧바로 향에 불을 붙이는 거야.’
이내 한제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대제성. 수많은 이들의 시선은 거대한 거북이의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첫 번째 향의 아래, 한제가 향을 손으로 짚은 채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가벼운 바람이 살랑 불어와 그의 긴 머리와 옷자락을 흔들었다.
2대 주작은 초조한 눈으로 한제를 살폈다.
‘왜 이렇게 늦는 게냐. 첫 번째 향에 불을 붙이는 것 정도는 녀석의 수준이라면 벌써 끝내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기껏해야 2각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건만 벌써 반 시진이 되어가고 있잖아! 이곳에서의 반 시진은 그곳에서의 한나절… 설마 저 녀석, 수천 년간 수련해온 이곳에서의 삶을 버리고 그곳에 남을 생각인가?’
한편, 사묵자는 한제를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첫 번째 향에도 불을 붙이지 못하는 꼴이라니. 녀석은 절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 이리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면 저놈을 두둔한 첫 번째 소제도 망신이겠지. 크흐흐.’
그의 곁에 선 운락 대사는 미간을 찡그린 채 소매에 감춘 오른손을 빠르게 움직여 결인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제를 바라보고 있던 2대 주작의 눈이 굳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수련자들은 첫 번째 향에 손을 댄 한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혼이 고향으로 돌아갔구나. 슬픔에 가득 찬 영혼이 육신으로 돌아오려면 상심의 눈물이 흘러내리기 마련이지⋯⋯.’
한제를 바라보며 눈물짓던 남몽도존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인의 환계. 한제는 산 아래에 서서 작은 마을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의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화분국 낙하문 뒷산의 연단방. 한 아름다운 소녀가 미간을 찌푸린 채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단로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곁에 선 중년 여인의 단로를 연신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스승님, 모완이… 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알겠다. 매번 그렇게 일을 저질러 놓고서야 불쌍한 척을 하는구나. 약봉(藥峰)에 가서 수월초(水月草)나 따 오거라. 난 이 단약을 고쳐 쓸 수 있을지 확인해볼 테니까.”
중년 여인이 엄한 눈으로 소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귀여운 소녀는 혀를 쏙 빼 물더니 눈웃음을 치며 얼른 연단방을 빠져나갔다.
허상의 화염
양 갈래로 묶은 머리가 담황색 옷을 입은 소녀의 어깨에서 달랑였다. 발랄한 모습이 그녀의 귀여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오목조목 섬세한 소녀의 두 눈에는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고 그녀의 온화한 성품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연단은 정말 어려워. 온 정성을 다 쏟았는데도 매번 실패한단 말이지.”
산을 타기 시작한 소녀는 입을 비죽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오라버니의 자질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 종파에서도 힘을 쏟아 가르치고 있지. 나도 더 노력해야겠어. 오라버니께 얕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씩씩하게 걷던 소녀는 우뚝 멈춰 서더니 저 아래 어스름한 달빛을 내는 풀로 얼른 다가가 이파리 몇 개를 뜯었다. 그녀는 자신의 뒤에 나타난 한 외로운 사내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한제는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억 속 그녀와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그는 상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찌 잊겠는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한제의 마음 가득 외로움이 몰아쳤다.
뜯어낸 수월초 이파리들을 조심스레 저물대에 넣은 소녀는 갑자기 쪼그려 앉아 풀숲을 해쳤다. 그 안에는 작은 짐승 한 마리가 숨어 있었다.
다람쥐처럼 보이는 짐승은 거친 숨을 내쉬며 누워 있었다. 녀석은 오른쪽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어머, 어쩜 좋아. 괜찮니?”
소녀는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얼른 저물대를 뒤져 몇몇 약초를 꺼내 찧더니 짐승의 상처에 발라주었다. 허나 소량의 약초만으로 살리기에는 상처가 너무 심각한 모양인지 녀석의 눈빛은 점점 흐려졌다.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이었다.
소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짐승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빨리 연단방으로 돌아가 짐승을 치료할 작정이었다. 허나 몸을 돌린 순간…
“꺄악!”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나타난 한제 때문이다.
“내가 도와주지.”
깜짝 놀란 표정의 소녀를 보며 한제는 심신이 진동하는 마음에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어서 그는 손을 가볍게 휘둘러 하얗게 반짝이는 빛을 소녀의 품에 안긴 작은 짐승에게 불어넣었다. 그러자 짐승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고 흐려졌던 눈빛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멀쩡해진 짐승은 폴짝 뛰어 소녀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아름드리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중간에 잠시 멈칫하더니 인사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돌려 한제와 소녀를 번갈아 본 녀석은 다시 폴짝폴짝 뛰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이모완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혹시 스승님을 찾아오셨습니까?”
한제는 고개를 젓고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