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15
다만 이 도술은 너무도 장엄해 한제라 해도 절대 깨달을 수 없었을 터였다. 도경에서 큰 도움을 받은 후에야 한제는 이 도술과 몽회원고를 융합해 몽도라는 신통술을 창조해냈다.
운해성역 요종의 균열에서 이 술법을 아주 살짝 발휘했던 한제는 천쇠에 이르러 있던 요종의 장로가 눈치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의 도심을 거의 무너뜨렸다. 만약 한제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장로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 도심으로 인해 결국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몽도는 사실 일종의 심마와 같았다. 상대의 도념을 심마로 바꾸고 심마로 도의 기초를 무너뜨려 상대를 소멸시키는 방법인 셈이다.
경지를 갖지 못한 수련자라도 심마를 가질 수는 있는데 그 심마는 곧 한제였다.
도술은 매우 현묘한 술법으로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수련자라 해도 도술을 깨달은 이는 매우 드물었다.
큰 행운이 따라야만 겨우 하나를 가질 수 있을까 말까라 남몽도존조차 도술은 단 몇 개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몽회원고는 상대를 기억 속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비록 봉멸족 노인처럼 도를 흩어버리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한제는 이 술법을 이용해 상대의 기억 속에 거짓 기억을 심어놓을 수 있었다.
이 거짓 기억은 상대의 심신에 영원히 남아 절대로 지워지지 않고 결국 진짜 기억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심마가 되는 것이다.
한제가 토해낸 숨결은 그가 가진 도의 정수로 이 숨결은 천황로에 떨어지자 빠르게 그 안으로 녹아들었다.
한편 누군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사묵자의 눈에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를 본 사묵자는 놀라고도 기쁜 기색이었으나 이내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상대는 수만 년을 함께 지내면서 삶의 일부가 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 죽은 그녀는 사묵자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고통이었다.
하얀 비단 천은 그녀가 지니고 있던 것이었고 그 위에 매화처럼 흩뿌려진 피는 그녀를 잃은 슬픔과 고통에 사묵자가 토해낸 것이었다.
사묵자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멍해진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짐승 뼈조차 아예 잊고 말았다. 그 무렵 미간의 작은 빛은 더욱 격렬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너… 네가 말한 것이냐⋯⋯?”
사묵자는 눈앞의 여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물이 부옇게 어려 시야가 흐려졌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봐봐! 여기 보라색 난초가 꽃을 피웠어!”
“오라버니는 정말 잠꾸러기야. 오늘은 나랑 놀기로 약속했잖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운해성역의 대륙 위, 일반인들의 마을에서 예닐곱 살쯤 된 여자아이가 입을 비죽이며 낮잠을 자는 남자아이를 계속해서 흔들고 있었다.
“난이야, 조금만 더 잘게. 어젯밤에 범수랑 허 씨 아저씨네 달걀을 훔쳐 오느라 피곤하단 말이야.”
여자아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여덟아홉 살 정도 된 남자아이는 졸음 가득한 눈을 힘겹게 뜨며 몇 마디 중얼거린 뒤 다시 잠들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오라버니! 오늘 범수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나, 나한테⋯⋯ 몰래 입을 맞췄어!”
마을의 오솔길, 전보다 조금 더 자라난 남매는 석양을 등진 채 걷고 있었다. 그들의 앞쪽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약초 광주리를 등에 진 소년은 걸어 나가며 하품을 했다.
곁에서는 잔잔한 꽃 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은 열서너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잡초 한 줄기를 쥔 채 종알종알 떠들며 손에 쥔 풀을 흔들었다.
“오라버니, 내 말 듣고 있어?”
여자아이는 소년을 힘껏 노려보며 소리쳤다.
“듣고 있어, 듣고 있다니까. 난이야, 아버지 어머니가 없는 우리한테 범수의 고모님이 얼마나 잘 대해주셨니? 내가 보기에는 범수 그 녀석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고 너도 이제 어리지 않으니 아예 범수한테 시집가는 게 어때?”
소년은 길게 하품을 하며 고개를 돌려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오라버니 같은 사람은 없을 거야! 오라버니가 홍아 언니 좋아해서 그러지? 홍아 언니의 남동생인 범수한테 날 시집보내고 그걸 빌미로 홍아 언니와 더 가까워지려는 거 모를 줄 알고? 오라버니가 제일 나빠!”
여자아이를 발을 탕탕 구르며 소년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약간 붉어진 소년은 겸연쩍게 웃으며 황급히 화제를 바꾸었다. 곧 두 사람은 키득키득 웃으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사묵자의 기억
세월은 다시 흘러갔고 남매의 모습에서는 앳된 티가 사라졌다.
“오라버니, 홍아 언니한테는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대.”
어느새 열여섯이 된 소녀는 물기를 흠뻑 머금은 꽃처럼 아름다웠다.
소녀는 자신의 앞에 있는 허약한 소년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소년의 몸은 비쩍 말라 있었다. 키도 작았고 낯빛이 칙칙해 척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두 눈만큼은 매우 밝았다.
지난 세월 오라비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소녀는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오라비는 어떻게든 구해다 주곤 했다.
소년은 이가 드러나도록 씩 웃었다. 하얀 치아가 드러나자 상태가 조금은 좋아 보였다.
소년은 오른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할 것 없어. 네 오라비는 생각만큼 약하지 않아. 내 꿈은 선인이 되는 거야. 네가 범수와 혼례만 올리면 난 이곳을 떠나 선인이 되기 위한 수련을 시작할 거야.”
순간 얼굴이 붉어진 소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범수는 성가시기만 해. 벌써 걔한테 말도 다 해놨는걸. 만약 홍아 언니가 오라버니한테 시집을 오지 않으면 나도 걔한테 시집가지 않을 거라고.”
소년이 부드럽게 웃었다.
“다 큰 처녀가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투정 부릴래? 난 정말 선인이 되고 싶어. 이렇게 평범하게 살다 가고 싶지는 않아.”
소년은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사마묵의 삶은 절대 이렇게 평범하게 끝나지 않을 거야. 난이야, 기다리고 있어. 내가 선인이 되면 너와 범수가 장수할 수 있도록 해줄게. 어쩌면 그때쯤이면 조카가 몇 명 생겼을지도 모르겠네. 하하하!”
소년이 크게 웃었다.
소녀는 그런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모가 병들어 죽은 뒤로 자신을 지켜준 것은 오라비였다.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소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라면 분명 성공할 거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좋아, 그럼 네 결혼을 위해 혼수품을 장만해야겠구나. 빈손으로 시집보낼 수는 없으니까.”
소년은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며칠 뒤, 흥겨운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나 조용하던 마을 안, 혼례복을 차려입은 소녀가 꽃가마에 올랐다. 가마 너머 밖을 내다보는 소녀의 얼굴에서는 초조한 빛이 드러났다.
‘오라버니는 어디 있는 거지? 왜 아직도 안 오는 걸까⋯⋯?’
혼례에 이웃이 모두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꽃가마 주위를 맴돌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노인들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들 중 누구도 열 마리가 넘는 말과 그 위에 올라탄 험상궂은 사내들이 마을로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진동시키며 점점 마을에 가까워졌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는 산이 하나 있었다.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어 선인이 살고 있다고 소문난 그 산 위에서는 비쩍 마른 소년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띤 채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등에 진 약초 바구니에는 인삼을 포함해 수많은 약초가 가득했다. 갓난아이 팔뚝만 한 인삼에서는 영기가 뿜어져 나오기도 했다.
“1백 년은 되었겠어. 이걸 찾겠다고 고생한 게 며칠인지. 이거면 난이 혼수품을 살 수 있을 거야.”
소년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산허리를 가로질러 마을 쪽을 내려다본 순간,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표정 역시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산 아래 마을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삽시간에 차가워진 소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황급히 산 아래로 달려갔다.
산을 오르는 것은 어려웠지만 내려가는 것은 더 어려웠다. 구르고 넘어지고 부딪힌 소년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렀지만 그는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냥 불이 난 것뿐이야. 그런 거여야만 해! 절대로 다른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소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격렬하게 뛰느라 약초 광주리에서 적지 않은 약초가 떨어졌지만 소년은 신경도 쓰지 않고 죽기 살기로 내달렸다.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벌떡 일어났다. 오른쪽 허벅지에는 나뭇가지에 베인 긴 상처가 생겼지만 소년은 다쳤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의 두 눈에는 온통 초조함뿐이었다.
한참 후, 소년은 산 아래에 이르러 거친 숨을 헉헉 몰아쉬며 마을로 달렸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별일 없을 거야. 그래야만 해!’
소년은 속으로 외치고 빌었다. 땀과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다.
소년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린 끝에 마을 밖 큰길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1리를 더 가야만 마을의 모습이 제대로 보일 터였다.
허나 이미 넘실거리며 피어오르는 불길이 눈에 잡혔다.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비명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난이야!”
지쳐 쓰러질 듯했던 소년은 다시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때, 큰길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저 앞에서 열 마리가 넘는 말이 나타나 달려왔다. 그 말들을 몰고 있는 것은 험상궂은 인상에 지저분한 옷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하하, 이렇게 작은 마을에 예쁜 계집들이 꽤 있군. 주인님이 시킨 일만 없었다면 몇 명 사로잡아 갔을 거야.”
“맞아, 특히 그 신부는 정말 예쁘더군. 흐흐흐.”
여러 마리의 말이 다가오자 소년은 앞을 막아섰다.
“이 미친 놈! 감히 우리 마방(馬幇)의 길을 막아? 썩 꺼져라!”
선두의 사내가 채찍을 내리쳐 앞을 가로막은 소년을 후려쳤다. 그러자 소년은 곧장 길 한쪽에 처박히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고 끔찍한 고통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말발굽 소리와 사내들의 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오자 서늘한 한기에 소년은 바들바들 떨며 눈을 떴다. 눈빛은 멍했고 얼굴은 잿빛처럼 창백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소년은 중얼거리며 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