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28
멀리 떨어진 곳에서 봉멸족 소녀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짙은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저자는 방금 전 나를 죽일 수 있었으나 은혜를 베풀었다.’
네 번째 천쇠 수준의 노인이 경외심 어린 눈으로 한제를 힐끔거렸다.
한편 백의의 여인 역시 묵묵히 한제를 바라보았으나 잠시 후 시선을 돌렸다. 덤덤한 그녀의 표정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주위는 점차 고요해졌고 부글부글 요동치던 안개도 잠잠해졌다.
짧은 회복을 마친 수련자들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암석 조각 위에 놓인 거대한 머리 앞의 법보로 다가갔다.
한제 역시 두 눈을 뜨며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고신의 머리 앞에 꽂혀 있던 30척 길이의 깃발이 그의 손으로 끌려왔다.
‘고신의 법보지만 썩 훌륭하다고 할 물건은 아니로군.’
한제는 말없이 깃발을 저물공간으로 거두어 넣은 뒤 일어섰다.
한데 그때,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콰르릉!
“캬아아아!”
스물여덟 개의 암석 조각이 진동했고 어두운 하늘에서는 다시 한번 포효가 울려 퍼졌다. 이어서 온 하늘을 찢어발길 듯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뒤이어 수련자들의 표정이 급변하던 순간, 스물여덟 개의 암석 조각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콰르르르!
갑자기 암석 조각들이 하강하기 시작했다. 수련자들이 반응할 틈조차 없이 엄청난 속도로 눈 깜짝할 사이 10만 척 이상 하강했다. 동시에 수련자들은 온몸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남은 자들은 하나같이 영민하고 강력한 이들답게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 앞에서도 침착했다.
어느새 암석 조각들은 안개에 완전히 휩싸였다.
한제는 암석 조각이 마치 지옥으로 떨어지듯 끝없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신중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콰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암석 조각이 하강을 멈추었다. 사방이 안개로 자욱한 데다가 칠흑처럼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한제는 어떤 위기감을 느끼고는 몸을 홱 돌렸다. 동시에 손을 뒤로 휘두르자 쾅 하고 뒤편의 안개가 나가떨어졌다.
수련자들 중 누군가가 기습을 당한 것인지 멀지 않은 곳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안개가 걷히자 흉측한 얼굴의 흉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 가득 고름집으로 뒤덮인 흉수는 인간처럼 두 팔과 두 다리가 있었고 손톱은 길고 날카로웠다. 한제에게 공격을 당한 녀석은 다급히 뒤로 물러나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이 흉수를 알고 있었다. 겉모습은 조금 달랐지만 녀석은 요령의 땅에서 본, 고신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기이한 생명체와 똑같은 느낌을 풍겼다.
한제는 두 손을 휘둘러 사방의 안개를 흩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련자들도 각자 신통술을 발휘했고 금세 반경 10만 척을 뒤덮었던 안개가 밀려나면서 시야가 트였다.
스물여덟 개의 암석 조각 중 세 곳은 텅 비어 있었다. 허나 그 너머는 여전히 안개로 짙게 뒤덮여 있었다. 그 안개 속에서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잠시 후 그 너머로 기이한 흉수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도우들, 이제 우리는 물러설 수 없는 위기를 만나게 됐네. 나는 여러 고서를 통해 이 오래된 무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지금 이곳은 그 가장자리에 불과해. 시험에 통과한 자만이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갖게 되지.”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정신을 나가게 했던 녹색 도포의 노파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사방의 안개 속에 숨어 있던 흉수들이 울부짖으며 뛰쳐나와 살아남은 스물다섯 명의 수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수가 무려 수천에 달했다.
허나 한제는 침착했다. 흉수들의 체내에서 날뛰고 있는 감정을 파악한 것이다. 그 감정은 허상의 화염의 도화선이 되어줄 터였다.
허상의 화염의 수련자는 매우 드물지만 워낙 강력한 존재이기에 수많은 소문이 있었고 이곳에 모인 이들은 수준 높은 수련자들인 만큼 그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아는 허상의 화염의 수련자는 손짓만으로도 천군만마를 단숨에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고 눈빛만으로도 일곱 종류의 감정에 불을 붙이기 때문에 저항할 수조차 없으며, 심신에 숨어 있는 악몽처럼 감정에 불을 질러 상대를 완전히 불살라버린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여기 모인 사람 중 허상의 화염을 다루는 수련자를 직접 목격한 이는 드물었다. 단 한 명, 봉멸족 소녀를 제외한다면…
수천 마리의 흉수를 눈앞에 둔 수련자들은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녀석들의 험악함과 가공할 속도 끔찍한 외형이 강력한 기세가 되어 훅 끼쳐왔다.
그 많은 수 앞에서 스물다섯 명의 수련자는 바다 앞의 냇물만도 못해보였다. 금방이라도 밀려오는 바다에 잠겨버릴 것 같았다.
흉수들의 수준은 각기 달랐다. 세 번째 천쇠에 이른 녀석이 있는가 하면 쇄열기 절정에 불과한 녀석도 있었다. 어떤 녀석이건 따로 떼놓고 보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수천 마리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하나가 강자에 속하는 이 스물다섯 명의 수련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신통술과 법보로 공격을 퍼부었을 뿐이다.
한제 또한 덤덤한 얼굴로 천만 개의 검기를 소환했다. 검기는 곧장 폭풍을 형성해 사방을 휩쓸었고 가까이 달려드는 흉수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한데 이 소름 끼치는 흉수들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 자폭하면서 붉은 빛을 번득였고 검기의 폭풍에 휘말려 박살이 난 상태에서도 파멸적인 힘을 폭발시켰다. 그 위력은 녀석들이 직접 가하는 공격보다 월등히 강력했다. 특히 동시에 여러 마리가 자폭하면서 일으킨 위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한제의 검기에 죽임을 당한 수십 마리의 흉수가 동시에 자폭했다. 그 위력은 다섯 번째 천쇠에 이른 수련자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 비할 만했다.
한제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하얀 빛을 소환했다. 곧 그의 몸 주위로 거대한 하얀색 빛 덩어리가 형성되더니 눈부신 빛을 발하며 흉수들의 자폭으로 형성된 위력과 충돌했다.
꽈릉!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빛 덩어리는 빠르게 왜곡됐다. 하지만 결국 버텨냈고 오히려 빛이 전보다 증폭되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흉수들의 자폭으로 인한 파멸적인 힘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캬오오오!”
또다시 한제에게 달려들던 흉수들은 그렇게 반사된 힘에 눈 깜짝할 사이 소멸됐다. 하지만 녀석들도 소멸의 순간 자폭을 했고 그 위력도 곧장 한제에게 되돌아왔다.
한데 파멸적인 힘이 더욱 강력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한제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흉수들 중 자폭을 할 틈도 없이 죽은 녀석들에게서 한 줄기 백색 기운이 흘러나와 그의 체내로 흡수된 것이다. 이는 일종의 생기였다.
이 기운은 한제의 부상을 치료해 주었다. 수련자를 삼키는 것보다 훨씬 치유력이 뛰어났다.
‘그렇다면…’
한제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암석 조각을 벗어나 흉수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사이 몇몇 수련자는 부상을 입은 듯 피를 토해냈고 뒤로 물러나다가 흉수들에게 포위되기도 했다. 그들을 포위한 흉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폭을 했고 이에 포위된 수련자들은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가장 여유가 넘치는 것은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무슨 신통술을 발휘하는 것인지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선 그녀에게 접근한 흉수들은 까만 연기를 피워 올렸다. 동시에 칠규로 피를 토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한제가 갑자기 흉수들 사이로 파고들자 나머지 수련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한제는 곧장 한 무리의 흉수들에게 다가가 손을 휘둘렀다. 그 손짓에 따라 천만 개의 검기가 녀석들의 육신을 파고들었고 일부는 자폭하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자 하얀 기운이 줄기줄기 그에게 흡수됐다.
흘러넘칠 듯한 생기가 원신에 흡수되면서 몸이 빠르게 회복됐다. 이에 한제는 피식 웃더니 다시 몸을 훌쩍 날려 한 무리의 수련자를 포위한 흉수들에게 접근했다. 동시에 한제는 오른손으로 그중 한 마리의 흉수를 두드려 파멸시키더니 곧장 다음 흉수에게로 향했다.
소문의 수련자
콰쾅! 쾅!
커다란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한제가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마리의 흉수를 죽이자 녀석들에게 포위되어 절망에 빠져들고 있던 몇몇 수련자가 감격한 눈으로 한제를 보았다. 물론 한제는 그들의 눈빛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자기 할 일을 하기에 바빴다.
가는 이동하는 곳마다 수많은 흉수가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그때 왼손에는 술동이를 오른손에는 장검을 든 중년 수련자가 검광을 번득이며 한 마리 흉수의 미간을 꿰뚫더니 그 뒤로 달려드는 백여 마리의 흉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한데 그가 술동이를 입가에 기울이며 막 신통술을 발휘하려 한 그때, 눈부신 빛이 번득이더니 순식간에 날아든 한제가 백여 마리의 흉수 중 절반 이상을 죽였다.
뒤이어 한제는 죽은 흉수들로부터 생기를 흡수하더니 곧장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중년 수련자는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 중얼거렸다. 한데 그 순간, 그는 뭔가를 발견한 듯 눈빛이 굳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다른 수련자들 또한 비슷했다.
‘흉수들을 자폭하기 전에 죽이면 생기를 얻을 수 있다! 이 생기는 부상을 치유해줄 뿐만 아니라 수준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되지. 며칠간 호흡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이득과 비슷한 정도야!’
허나 그들이 아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한제가 1천 마리가 넘는 흉수를 죽인 후였다. 여기에 자폭으로 이미 소멸된 녀석들을 제하면 남은 것은 겨우 1천 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지금도 한제는 흉수들 사이를 바삐 오가고 있었다.
감히 암석 조각 위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봉멸족 소녀와 덤덤한 백의의 여인을 제외한 수련자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들 눈에 남은 흉수들은 훌륭한 단약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긴 빛을 그리며 흉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름 모를 도우, 우리 모두 같은 처지인데 어찌 자네 혼자 모든 걸 가지려 하는가!”
“어이, 흰머리! 내 몫으로 3백 마리는 남겨 달라고!”
스무 명 정도의 수련자가 순식간에 따라붙었으나 한제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흉수들에게 달려들었다. 미간에서는 고신의 반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번득였고 그중 첫 번째 반점은 어스름한 빛을 발산했다. 동시에 그는 결인을 그린 두 손을 크게 휘둘러 천황로를 소환하더니 남은 흉수들을 전부 가두었다.
천황로가 나타난 순간, 오래된 기운 한 줄기가 피어오르며 회전해 회오리를 형성하더니 사방을 휩쓸었다.
“제련!”
한제는 다른 수련자들이 다가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낮게 외쳤다.
콰쾅!
천황로가 크게 울린 순간, 그 안에 갇힌 흉수들은 요란하게 포효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자폭할 틈도 없이 서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천황로는 실체를 가진 듯 또렷해지는 대신 줄어들더니 끝내 한 줄기의 어스름한 빛이 되어 한제의 미간으로 사라졌다.
이 두려운 광경을 목격한 수련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단번에 모든 흉수를 처리한 것이다.
뒤이어 한제는 가볍게 자신의 암석 조각으로 돌아갔다.
흉수를 처리하려 했던 스무 명의 수련자는 분노했으나 감히 누구도 한제를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때, 봉멸족 소녀의 눈빛이 번득였다.
‘기회다! 저자와 다른 자들을 이간질한다면 내게 큰…’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봉멸족 소녀가 막 행동에 나서려 한 순간, 한제의 냉랭한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봉멸족 소녀는 근원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잠시 후, 모든 수련자가 하나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허나 분이 풀리지는 않은 듯 가끔 날카로운 눈으로 한제를 힐끔거렸다.
그 와중에 오직 백의의 여인만이 호의적인 눈으로 한제를 보았다.
그때, 수련자들을 태운 암석 조각들이 바르르 진동하더니 잠깐 멈추었다가 이번에는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암석 조각들은 엄청난 속도로 전방의 안개를 뚫고 나갔다.
‘조금이라도 빨리 부상을 회복해야 한다. 누구에게도 흉수들을 빼앗길 수는 없지!’
한제는 무표정했으나 두 눈에서는 서늘한 빛이 번득였다. 미간의 천황로에서는 생기가 끊임없이 체내로 흘러들면서 부상을 빠르게 치료했다. 동시에 한제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왼쪽 눈동자에서 불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글거리더니 점차 밝게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