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64
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려 산꼭대기 대전을 향해 걸음을 옮긴 후에야 청년은 목을 문지르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한제를 향한 그의 눈빛에는 경외심이 가득했다. 방금 전 청년은 죽음을 느꼈다. 상대가 원하기만 했다면 정말로 자신을 죽였으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바르르 떨던 청년은 얼른 한제의 뒤를 따랐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바람이 불어와 한제의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날렸다. 흙 향기가 어린 바람이 무척 편안했다.
‘이런 선기로 자양하니 선강 대륙의 모든 생명이 그렇게 건장하고 수련자는 강력할 수밖에⋯⋯. 심지어 초목도 영혼을 가지고 흉수도 사람이 될 정도니까.’
한제는 이 바람에 실린 선기와 향기가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진짜 선강 대륙에서는 바람 한 줄기에도 이런 선기와 향기가 어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길을 오를수록 하늘을 뒤덮은 어두운 구름은 더욱 짙어졌다. 구름들은 서로 뒤얽혀 충돌하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가 은빛 뱀처럼 구불거리며 뻗어 나갔다.
“비가 올 것 같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단을 따라 산꼭대기에 이른 한제의 눈앞에 웅장한 대전이 나타났다. 폭이 수천 척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대전은 우뚝 솟아 꼭 거대한 흉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대전 밖으로는 폭이 1만 척에 달하는 광장이 있었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향로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꽂힌 팔뚝 굵기의 향 아홉 개에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광장에는 이미 백 명에 가까운 수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제가 광장에 발을 들인 순간, 하늘에서는 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굵은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줄기는 장막을 드리우듯 쏟아져 내리면서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광장에 깔린 석판에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광장 바닥에 물이 고였다. 빗방울이 고인 물 위로 떨어지며 물결이 일어났다.
빗소리는 갈수록 격해졌지만 광장 중앙의 향로에 꽂힌 아홉 개의 향은 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푸른 연기도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비와 연기가 한데 어우러진 광경은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이때 누군가가 한제의 머리 위로 우산을 드리웠다. 바로 한제의 뒤를 따라온 청년이었다. 청년은 누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볼까 신경이 쓰이는 듯 난감해하면서도 한제를 위해 우산을 받쳐 든 채 그를 졸졸 따랐다.
광장에 모인 수련자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향했다. 그중 검은 도포를 입은 청년을 비롯한 몇몇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막 호통을 치려 했다. 그때 세 번째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 번째 종소리가 울린 순간, 향로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허공에서 약간 왜곡됐다가 빠르게 다시 응집돼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다. 이 회오리가 사방의 빗방울을 밀어낸 순간, 그 안쪽에서 흐릿한 인영이 하나 떠올랐다.
그 인영은 이내 회오리 안에서 걸어 나오더니 허공에 섰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사방에 모인 백여 명의 수련자가 일제히 인영을 향해 포권을 했다.
손바닥 뒤집기
회오리에서 나타난 사람은 중년 사내였다. 검은 머리를 어깨 위로 늘어뜨린 그리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매우 비범해 보였다.
허공에서 아래에 모여 있는 제자들을 슥 훑어보던 그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한제에게 닿았다. 한제 곁에 선 청년이 그를 위해 우산을 받쳐 든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는 이내 표정을 풀고 웃었다.
“소도영, 주립. 따라와라. 나머지는 물러가도록.”
중년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더니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곧장 저 옆의 대전으로 향했다.
막 한제에게 호통을 치려 했던 검은 도포의 청년은 엄숙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이내 돌아 서서 대전으로 향했다. 그 전에 한제를 잠시 노려보았다.
한제의 표정은 덤덤했다. 칠채선존의 어린 시절 기억 속 스승은 그에게 친절했다. 스승이 폐관수련을 하느라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지만 않았더라면 그가 종파 내에서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었다. 게다가 성격이 유약하면서도 자존심이 강했던 칠채선존은 괴롭힘에 대해 스승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스승이 함께 부른 주립은 칠채선존의 대사형으로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난 데다가 평소에는 온화했다. 하지만 칠채선존을 업신여겨 그가 괴롭힘을 당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한제는 주위 사람들의 시기 어린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빗속을 가로질러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은 중년 사내와 그 옆에 공손히 선 주립을 볼 수 있었다.
“난 곧 다시 폐관수련을 시작할 것이다. 그전에 너희에게 맡길 일이 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연 중년 사내는 주립과 한제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는 칠채선존의 세 번째 주혼을 통해 보았던, 낯익은 광경이었다. 그는 소도영의 스승이 자신과 주립에게 몇 가지 임무를 맡긴 뒤 신통술 하나를 전수해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신통술은 동림종 3대 술법 중 하나인 운도천술(雲道天術)의 입문 구결로 이것을 충분히 익혀야만 이 술법의 정수를 배울 수 있었다.
입문 구결은 길지 않았지만 독특한 데가 있었고 모두가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구결을 사용하면 구름이 일어나 주위를 감싸게 되는데 그 구름이 옅고 희박하면 이 술법을 익힐 수 없다는 뜻이었다. 구름이 짙고 빽빽해야만 이 술법을 익힐 수 있고 허상까지 나타난다면 금상첨화였다.
이 술법을 익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지난 세월 동안 동림종에서 이 입문 구결을 손에 넣어 익힌 이들 중 가장 빠른 자는 단지 일곱을 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고 반면 가장 느린 자는 무려 수 시진을 들여야 했다.
당시 칠채선존은 주입의 서늘한 눈총에 위축돼 망설이느라 스물을 센 후에야 겨우 익혔다. 반면 주립은 단 열하나를 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후 체내에서 구름이 피어오를 때도 주립의 싸늘한 눈빛에 겁을 먹고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에 칠채선존의 구름은 흐릿하고 희박했던 반면 주립은 구름 속에서 허상까지 나타냈다. 그리고 이 허상은 소도영이 피워낸 구름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당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칠채선존의 스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더는 소도영에게 동림성의 3대 신통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그 아래 등급이라 할 수 있는 칠채선술만을 가르쳐 주었다.
이 모든 기억은 한제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당시의 상황에 놓인 한제는 잠시 고민했다. 기억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 아니면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칠채선존의 기억을 그대로 따라야만 그 기억과 더욱 깊이 융합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칠채선존의 기억과 깊숙이 융합돼 상대가 설치한 진짜 문의 소재를 알게 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한제는 칠채선존의 세 번째 주혼과 융합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사청을 되살릴 수 없을 터였다. 한제와 세 번째 주혼이 융합한 순간 사청은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한제는 새로운 칠채선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술법은 우리 동림종 3대 신통술 중 하나인 운도천술이라 한다. 아직은 너희의 수준이 부족하니 일단은 입문 구결만 알려줄 것이다. 입문 구결이라고는 하지만 이 구결을 배우는 데에도 조건이 있다. 한 세대에서 오직 한 사람만 배울 수 있지. 오늘 나는 너희 둘 중 이 술법에 더 적합한 자를 찾아 선택할 것이다.”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그는 뒤이어 구름의 농도와 숙련에 걸리는 시간 등을 포함한 선택 기준에 대해 설명했다.
고개를 숙인 주립의 눈빛이 갈망과 욕망으로 번득였다.
“천도는 손상을 입은 상태로 당분간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중년 사내는 말을 이으며 구결을 알려주더니 오른손을 두 번 흔들었다. 그러자 두 줄기의 구름이 흘러나와 주립과 한제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구름이 체내로 스며들었으니 곧장 가부좌를 틀고 최대한 빨리 그 구름을 체내에서 한 바퀴 돌리면서 연구하도록 해라. 둘 중 먼저 끝내는 사람이 점수를 받게 될 것이다! 외부의 다른 요인으로 집중력을 잃어서는 아니 될 터!”
중년 사내의 말에 주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가부좌를 틀었다.
한제 역시 가부좌를 틀었다. 그가 막 호흡을 가다듬으며 체내의 구름을 돌리려는 순간, 곁에 있던 주립이 고개를 들어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음산하고도 위협적이었다.
중년 사내는 그 광경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저지하지 않고 그저 한제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상대의 눈빛은 당시의 소도영에게는 큰 위압감을 주었겠지만 그에게는 우스울 뿐이었다.
주립이 눈을 부라린 순간, 한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오히려 주립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한제의 눈빛에 한 줄기 살기가 심신으로 파고든 듯한 강력한 압박을 느꼈다.
이때 한제는 이미 두 눈을 감고 체내의 구름을 빠르게 돌리고 있었다. 주립도 허겁지겁 눈을 감고 연구에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제의 체내에서 돌연 대량의 구름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중년 사내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제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구름은 갈수록 짙어졌고 결국 대전의 절반을 뒤덮을 정도였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 속에서는 포효도 어렴풋이 들려왔다.
잠시 후에는 주립 역시 가까스로 체내의 구름을 한 바퀴 돌리면서 바깥으로 구름을 피어올렸으나 한제의 구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또한 그의 체내에서 구름이 막 피어오른 순간, 한제 주위로 짙게 퍼져 나간 구름 속에서는 우렁찬 포효와 함께 거대한 용의 허상이 나타났다.
“캬오오!”
용은 두 눈을 거칠게 번득이다가 주립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그러자 피워올렸던 구름을 전부 용에게 빼앗긴 주립은 왈칵 피를 토해내더니 순식간에 몰골이 초췌하게 변했다.
기억이 바뀐 순간이었다.
이때 대전 밖 광장 너머 동림종의 산맥 전체가 왜곡됐고 저 멀리 하늘과 땅 역시 뒤틀렸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붕괴되고 와해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기억의 변화로 인해 나타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좋다! 소도영, 네가 이 계에서 두 번째로 운도천술을 배울 것이다! 하하하!”
중년 사내 역시 왜곡됐으나 그는 호탕하게 웃더니 곧장 돌아 서서 충격에 빠진 주립에게 말했다.
“주립, 너는 더 이상 운도천술을 배울 자격이 없지만 내 너를 위해 칠채선술을 알려주마!”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한제는 돌연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또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칠채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팔문의 기운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곧 흩어져 사라졌다. 뒤이어 왜곡되던 풍경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으며 본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무렵, 한제의 마음에는 거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알았다! 칠채선존의 기억을 바꾸고 그 기억에 모순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면 어지러워진 기억을 통해 팔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어. 혼란과 모순이 클수록 그 느낌은 또렷해질 터.’
한제가 애써 기쁨을 억누르는 동안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도영, 넌 며칠간 이 술법을 더 익히도록 해라. 다섯 달 후, 동림종내 너희들 세대의 시합이 열릴 것이다. 10위 안에 드는 자는 동림지에 들어가 수련할 기회를 얻게 될 터. 그때 네가 동림지에서 수련을 하게 된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바뀌어 있었고 한제는 고개를 홱 쳐들었다.
칠채선존 세 번째 주혼에는 다섯 달 후에 열릴 시합에 대한 기억이 깊게 남아 있었다. 당시 그 시합에서 주립은 대사형인 데다가 운도천술의 수련 자격을 얻었다. 처음부터 10명 안에 뽑혔고 최종적으로는 9위로 시합을 마쳤다.
반면 소도영은 운도천술을 익힐 자격을 잃으면서 더 소심해졌고 심지어는 점차 그늘진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러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소도영의 성격이 더욱 그늘지게 변한 것이 바로 이 시합에서 좌절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몇 년간 소도영은 좌절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다른 이와의 교류도 거의 하지 않고 그저 혼자 틀어박혀 폐관수련에만 집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사조를 만나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두각을 드러내게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좋은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동림종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그 이후 소도영은 더 이상 동림종 제자가 아니었고 그 또한 원한과 불만으로 잔인하고 포악해졌다. 그리고 칠도종의 종주 칠채선존이 됐다.
칠채선존이 도를 완성한 날, 그는 주립을 사로잡아 잔인하게 죽였다.
이 모든 기억이 한제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산봉우리 중턱, 한제는 구불구불 흐르는 강가에 걸터앉아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강에 흐르는 것이 강물이 아닌 기억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도영이 스승으로부터 운도천술을 전수받은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스승은 이미 다시 폐관수련을 시작해 버렸다. 주립 역시 폐관수련을 통해 몸 상태를 회복하는 중이었다. 본래도 주립은 칠채선존이 되기 전의 소도영을 매우 싫어했지만 지금의 소도영, 정확히는 한제에 대해서 사무치는 원한을 품은 상태였다.
강물이 콸콸 흘러가는 동안 한제의 머릿속에서는 세 번째 주혼의 기억이 천천히 흐릿해져갔고 이내 운도천술의 구결이 떠올랐다.
동림종은 선강 대륙 9종 13문의 하나였다. 자양종만큼 강력하지는 않았고 제자들은 외부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으나,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온 이 종파의 3대 신통술은 선강 대륙에서 매우 유명했다.
3대 신통술 중에서도 특히 운도천술은 더욱 심오했다. 대도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변화무쌍한 구름에 집중한 이 신통술은 구름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구름을 빌려 모습을 갖추며 구름의 힘을 흡수해 그것을 자신으로 삼는 술법이다.
그중 구름을 응집시켜 만들어낸 자신의 흉수로 구름을 삼키고 안개를 토해내게 하는 것이 이 신통술의 첫 번째 능력이었다. 이 능력은 입문 구결에 숨겨져 있어 입문 구결을 완벽하게 익힌다면 발휘할 수 있었다.
보통은 이 운도천술의 구결을 완전히 익히려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겠지만 한제는 당시의 주립이나 소도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게다가 그는 일곱 가지 본원을 스스로 깨달았을 만큼 깨달음에 대한 자질은 뛰어났다. 그런 그에게 운도천술의 입문 구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드러난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