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69
“내 위치를 정확하게 감지해낸 것도 목어 때문이겠구나. 목어 암수 간의 감응 능력을 내가 간과했어.”
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한제가 자신의 정체까지 알아냈다는 것은 그가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에 현라는 상당히 만족했다.
“내 말이 맞느냐?”
현라는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는 의아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이름만이 아니라 정체도 알고 있느냐?”
현라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지난 시간 동안 한제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그는 오랜만에 무척 즐거웠다. 심지어 한제가 조금만 더 늦게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생길 정도였다.
“선강 대륙 아홉 태양의 일인이자 도고 일맥의 대천존이시지요!”
한제는 오행성 귀일종 수련자의 분혼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받은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 한참이 걸릴 정도로 놀란 바 있었다.
“오행성 수련자가 세 번째 주혼과 그들의 목적을 포기한 것도 그들이 저를 도운 것도 선배님 덕분이었지요. 감사합니다.”
한제는 현라에게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현라는 무척 즐거워 보였다. 한제는 시험이 진행되는 내내 모든 방면에서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런 한제의 겸손한 모습에 현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더욱이 한제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다. 이에 현라는 한제를 자신의 유일한 제자로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와 함께 선강 대륙 도고 일맥의 영지로 가자. 그곳에서 이 현라의 유일한 제자가 돼 도고일맥을 지켜다오. 어떻게 생각하느냐?”
현라는 부드러운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후배를 대하듯 한없이 자상했다.
그러나 한제는 그 제안에 곧장 응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한제를 가까이서 지켜봐 온 현라는 상대가 깊은 고민에 빠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이는 한제 때문이 아니라 한제를 고민에 빠뜨린 문제 때문이었다.
“선강 대륙에는 동부계가 아주 많다.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종파라면 그들만의 동부계를 가지고 있을 정도지. 허나 단 한 번도 동부계 출신 수련자가 밖으로 나온 적은 없다. 동굴의 주인을 죽인 자라면 말할 것도 없지. 만약 칠채선존이 자신의 혼백을 찢어놓지 않았더라면 이곳에 봉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라는 한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인지 아느냐? 그것이 선강 대륙의 법칙이기 때문이야! 선강 대륙 수많은 동부계의 생명은 선강 혈맥이 없으면 선강 대륙의 규칙을 절대 통과할 수 없다. 이 규칙은 동부계에 가해지는 압력이라 할 수 있지. 이 압력 때문에 혈맥을 갖지 못한 동부계 생명은 그 밖으로 나온 순간 그대로 죽어버리고 말아!”
현라의 목소리에서는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런 선강 대륙의 규칙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안다. 동부계의 모두와 함께 선강 대륙으로 가고 싶은 거겠지.”
현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이곳을 떠나기를 원치 않는다면 저 역시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가고 싶습니다.”
한참 침묵하던 한제가 말했다.
“안 될 말이야. 너는 차치하더라도 네가 꿈에 그리는 모완이라는 아이도 절대 선강 대륙에 갈 수 없어!”
현라의 말에 한제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모완도 못 간다는 말씀입니까?”
그녀가 한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있는 현라는 복잡한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는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전에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선강 대륙의 누군가가 저를 초대해준다면 선강 대륙 법칙의 영향을 덜 받을 것이라고⋯⋯.”
“누가 그런 얘기는 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거짓말일 게다. 불가능한 일이야. 아홉 태양이 동시에 손을 쓰지 않는 한 선강 대륙의 규칙에 저항할 수는 없어. 이 규칙은 선조와 고조의 혈맥으로 결정된 것.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현라의 말이 끝난 순간, 한제는 온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간 듯 안색이 창백해졌고 비틀비틀 몇 걸음 물러나며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그 눈빛은 어두워졌고 밀려드는 절망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도 모완이라는 그 아이를 살펴보았다. 한데 그 혼이 불완전하더구나. 한 부분이 빠져 있어. 동부계 안을 뒤져보았으나 그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지. 그 혼이 완전하기만 하다면 내가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나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해. 그러니 일단 나와 함께 선강 대륙으로 가자. 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와 사라진 혼을 찾는 게…”
그러나 현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제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안 되는 겁니까?”
한제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저는 절대… 모완을 두고 떠날 수 없습니다. 제가 동부계의 문을 연 것도… 선강 대륙으로 가려 했던 것도 그녀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녀를 되살리기 위해서였다고요! 한데… 모완을 두고 홀로 선강 대륙으로 가 천년만년 사느니⋯⋯ 그녀와 함께 동부계에서 죽음을 맞겠습니다.”
한제의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혼백이, 원신이, 그 외의 모든 것이 슬픔과 절망에 빠질 때 흐르는 피눈물이었다.
한편, 남몽도존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딸이 연모하는 사내가 다른 여인을 향한 절절한 사랑과 아쉬움을 고백하는 데도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아내를 떠올리며 한제에게 동정심과 공감을 느낄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약속
현라는 한참이나 한제를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난 네가 선강 대륙의 법칙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돕고 천양윤회전세술(天陽輪回轉世術)을 발휘하겠다. 동부계를 떠나고 싶어 하는 네 친구들 역시 전세술 아래 환생을 통해 선강 대륙에서 다시 태어나도록 해주겠다. 이 술법을 통해 그들은 선강 대륙 사람이 되어 선강의 혈맥을 가지게 되겠지만 그전의 기억은 잊게 된다. 그러니 새롭게 태어난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 그들의 기억을 일깨워줘야겠지.”
한제는 여전히 피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어 현라를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환생하는 시기도 장소도 사람마다 다른 법. 1천 년이 넘도록 환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 넓은 선강 대륙에서 그들 하나하나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어지는 현라의 말에도 아직까지는 가장 기다리던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지 한제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한데 그때, 그가 그토록 기다린 이름이 드디어 현라의 입에서 나왔다.
“모완이라는 아이는 혼이 완전치 못해 환생도 불가능할 터. 허나 이 역시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선강 대륙의 규칙에 저항하는 순간 너는 그녀를 선강 대륙에 안전히 데려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허나 성공 가능성은 절반에 불과해! 실패하면 너와 그녀는 함께 죽게 된다! 자 선택해라!”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라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세상에 대가 없는 도움은 없다. 한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시의 둔천도 지금의 현라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의 제안에도 분명 사심이 있다. 허나 그럼에도 한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또한 한제는 은혜에 대해 결코 모른 체하지 않는다. 당시의 둔천에게 그러했듯, 지금의 현라에게도 그리 할 것이다.
한제는 금색 문 너머의 익숙한 우주를 바라보았다.
현라의 말은 오래도록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 말을 통해 선강 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그 안에 들어간 뒤로 어떤 결과를 맺게 될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환생이라⋯⋯.”
그가 중얼거렸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수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동부계에서 나가기를 원하지만 선강 혈맥을 갖지 못한 이들은 환생을 거쳐 선강 대륙의 곳곳에서 새롭게 태어나겠지. 난 그런 그들을 찾아내 일일이 전생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줘야 하고⋯⋯.’
한참 뒤, 고개를 든 한제는 현라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는 선강 대륙의 법칙을 깨기 위해 현라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 대가는 작지 않을 것이다.
“동부계를 떠나고 싶은 자가 몇 명이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선배님의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한제가 공손히 절을 하는 사이 그와 현라 사이에는 한 줄기 연계가 생성됐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연계가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또한 모완과 함께 살 수 없다면 동부계 밖에서 함께 죽더라도 후회 없습니다!”
한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후회 없다는 그의 말은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그 말에서는 2천 년 이상 수련해온 한제의 도심이 드러났다.
오래전 수마해에서의 운명적 만남을 떠올리게도 했다. 또한 그 말에는 모완에 대한 한제의 사랑과 그리움, 슬픔이 담겨 있었다.
한제가 2천 년이 넘는 세월을 지켜온, 눈 감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사랑이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와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함께 죽기를 택할 터였다.
허나 그 말에 남몽도존은 약간 어두워진 눈으로 선계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현라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환생을 통해 선강 대륙의 규칙에 저항하려면 내게도 준비가 필요하다. 동부계를 떠나기를 원하는 이들을 데리고 한 달 후에 이곳으로 와라. 내 이곳에서 전세술을 발휘하겠다. 그리고 너는⋯⋯ 이게 네 선택이로구나.”
현라는 더는 한제를 설득하지 않았다. 한동안 지켜본 바, 한제가 얼마나 결단력이 강하고 단호한 사람인지 현라도 알게 됐다. 한제는 한 번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좀처럼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한제, 내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녀석이야. 오랜 세월 기다려서라도 옛 친구들의 기억을 되살리겠다는 것을 보면 의리도 있고 다른 이들을 이끌려는 것으로 보아 인자한 면도 있다. 또한 사랑하는 여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을 아는 자야. 이런 자는 먼저 은혜를 베풀면 원망도 후회도 없이 우리 도고일맥을 지키려 할 것이다!’
현라는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두 눈을 살짝 번득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제는 그런 현라를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다가 세 번째 절을 올리더니 곧장 돌아 서서 자리를 떴다. 남몽도존이 그의 뒤를 따랐다.
탁삼은 환생을 통해 동부계를 떠나야 할지 고민하며 망망한 우주 끄트머리를 배회했다.
총총히 박힌 별이 반짝이는 무한한 우주는 퍽 아름다웠지만 한제는 그 광경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참 뒤에야 우주에서 시선을 거둔 한제는 긴 빛을 그리며 동림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동림성은 당시 무너져 내리면서 균열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얼음으로 봉인된 두 번째 꽃 안으로 통하는 균열이었다.
한제에게는 떠나기 전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약속을 지켜야 할 때였다. 한제는 은라라는 여자 고신에게 그곳에서 나가도록 돕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 ★ ★
무너진 동림성은 금색 문과는 정반대편에 있었다. 문과의 거리도 어마어마했지만 그럼에도 문에서 번득이는 금빛에 뒤덮여 있었다.
얼음으로 봉인된 세상의 보일 듯 말 듯한 균열은 우주에 생겨난 한 줄기 상처처럼 흐릿했고 이따금 그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균열 밖 허공이 왜곡되더니 그 안에서 한제가 나타났다. 형형하게 번득이는 눈으로 균열을 바라보던 그는 도고의 기운을 활성화해 두 손에 응집시켰다. 그리고 이내 강력한 힘이 담긴 두 손으로 시천술을 발휘해 그 균열을 죽 찢었다.
콰쾅!
거대한 굉음과 함께 균열은 반 정도 찢어졌다. 대량의 한기가 뿜어져 나오는 균열 너머로 안쪽의 광경이 들여다보였다.
두 번째 꽃 안의 세상은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공간이었다. 얼음으로 단단히 봉쇄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균열 밖에 선 한제는 신식을 쏘아 보내 은라에게 목소리를 전했다.
얼음으로 봉인된 세상 속의 거대한 바위. 한제의 목소리를 들은 은라는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뒤이어 눈을 감은 그녀의 미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전방의 얼음층 안쪽으로 사라졌다.
연기 형태가 된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천성역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한제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