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27
이어서 한제는 속신결을 연구하는 데 집중했다. 매우 극단적인 이 신통술의 주요 원리는 체내에 아홉 개의 신맥(神脈)을 뚫는 것이었다. 신맥이 한 줄기 늘어날 때마다 신통술을 발휘하는 속도가 크게 높아지는데 허덕재는 일곱 갈래의 신맥을 뚫은 상태였다.
신맥이란 체내에서의 순환이 빠르게 이루어지게 하는 특수한 방식의 봉인을 뜻하는 용어였다.
“한 수련자의 원신을 체내에 봉인해 회오리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이 술법은 분명 고족의 어느 신통술과 상당히 비슷한데⋯⋯.”
속신결을 연구할수록 이 생각은 또렷해졌다.
“이 신통술은 고족 수련자의 몸으로 발휘할 때 그 위력이 더욱 무시무시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아쉽게도 내게는 남은 원신이 없는데⋯⋯.”
고민하던 한제는 속신결을 완전히 외우고 깨우친 뒤 일어나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지면이 바르르 진동하면서 호리병이 튀어나왔다. 그 안에는 아직도 3천만에 가까운 도혼이 남아 있었다.
뒤이어 하늘에 펼쳐두었던 남색 우산을 거둔 한제는 흡혈마수와 이사까지 저물공간에 거두어 넣었다. 안개 속에 숨어 허덕재의 팔과 융합한 이사는 모습이 다시 온전해진 상태였다.
정리를 마친 한제는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때가 됐군.”
이내 몸을 훌쩍 날린 그는 모습을 감췄다.
★ ★ ★
안개에 뒤덮인 극천 초원에서는 며칠 동안 살육이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준 높은 수련자들만 살아남은 탓에 싸움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안개 속 깊숙한 곳.
장씨 노인과 조씨 노인이 여문염을 비롯한 천우주의 공겁기 초기 수련자들에게 포위된 채 맞서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염란과 대혼문의 장로 허동덕이 녹마주의 공겁기 초기 수준인 두 여자 수련자와 싸우는 중이었다.
녹마주는 두 명의 공겁기 초기 수련자를 잃은 까닭에 전력이 상당히 깎인 상태라 장씨 노인과 조씨 노인의 부담이 더욱 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녹마주의 두 공겁기 중기 수준 수련자는 만신창이가 됐고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전투는 첫 번째 전투보다 인원이 적었기에 전장의 범위는 불과 수백 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장으로부터 수만 리 떨어진 곳에도 안개는 여전히 깔려 있었다.
그렇게 전장에서 한참 떨어진 안개 속, 잡초와 진흙탕 사이에 놓인 평범한 돌에서 어스름한 빛과 함께 한제가 나타났다.
하늘은 안개로 뒤덮여 어둑했다. 며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많이 약해져 지금은 거의 그친 채 안개와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공간석을 주워 들어 저물공간에 넣은 한제는 이내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간석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어.”
곧이어 몸을 날린 한제는 발아래 나타난 파문과 함께 사라졌고 전장으로부터 1천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전장에서 전해져오는 어렴풋한 파문과 함께 은은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대적인 살육에 권태와 환멸을 느낀 한제는 이 전쟁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는 소속감도 들지 않았기에 피 흘려가며 싸울 생각도 없었다. 대혼문에게서 받은 세 가지 선물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해 그저 청우 진인이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완수하고 싶을 뿐이었다.
‘중상을 입은 공겁기 수준 수련자가 있다면 일이 수월해질 텐데⋯⋯.’
눈을 번득이던 한제는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안개에 녹아든 채 전장을 향해 질주했다. 전장에 가까워질수록 신통술의 파동과 죽음의 기운은 강렬해졌고 비명과 고함, 법보와 신통술이 충돌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전장은 속신결을 수련하는 데 필요한 원신을 수확하기에 좋은 장소지!’
잠시 후, 한제는 전장에 들어섰다. 귓가를 스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고 법술에 의한 파문과 오색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원래 7천여 명이었던 양측의 병력은 이제 4천 명도 되지 않았다. 허나 이들은 눈을 벌겋게 뜬 채 맹렬히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한제는 그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양측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지만 끼어들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천우주나 녹마주나 똑같았기에 이 전투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빠르게 전장 깊은 곳으로 향하던 그는 우뚝 멈추더니 몸을 홱 틀었다.
꿈틀거리는 안개 속에서 두 명의 수련자가 싸우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궁지에 몰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은 녹마주의 공현기 중기 노인이었다.
‘저자다!’
한편, 수세에 몰린 수련자는 한제가 처음 극천 초원에 왔을 때 마주친 바 있던 백발의 노인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노인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가로는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단호하고 진중했다.
둘의 싸움을 잠시 살피던 한제는 이내 눈을 번득이며 몸을 날렸다.
백발노인을 추격하는 녹마주의 노인은 낮게 기합을 내지르면서 두 손을 휘둘러 거대한 두 개의 허상을 소환했다.
“노인네가 끈질기구나. 이제 그만 좀 죽어라!”
뒤이어 그는 차게 외치며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앞을 가리켰다. 그러자 양옆의 거대한 허상들이 포효하며 천우주의 백발노인에게 돌진했다.
이에 백발노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삶과 죽음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이 전투에서 수많은 죽음을 봐온 그는 이제 자신의 차례임을 직감했다. 그러자 슬픔과 함께 일종의 해탈감도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노인은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자폭을 준비했다. 이는 천우주 수련자인 그가 자신의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난 천우주에서 태어나 천우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니 내 목숨을 천우주에 돌려주더라도 후회는 없다!”
덤덤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자폭을 하려는 순간, 돌연 백발노인의 두 눈이 바짝 졸아들었다. 자신과 녹마주 노인 사이로 돌연 한 줄기 인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나타난 백의백발의 수련자 한제는 왼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콰쾅!
격렬한 소리가 울리며 사방의 안개가 마구 꿈틀거렸고 백발노인을 향해 달려들던 두 개의 거대한 허상은 바르르 경련하다가 무너져 내렸다.
허상이 붕괴하자 녹마주 수련자는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가 자신의 신통술을 가뿐하게 파괴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현겁!’
이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녹마주 수련자는 머리가 저릿해졌고 망설임 없이 물러나 도망치려 했다.
“인사도 하지 않고 가려 하는가?”
한제는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단숨에 수만 척을 이동했고 도망치던 노인의 코앞에 나타나 또다시 가볍게 손을 휘둘러 상대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쾅!
짧은 굉음과 함께 녹마주 수련자는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고 원신 역시 강력한 힘에 휩싸여 그대로 뽑혀 나왔다.
상대의 원신을 쥔 한제는 곧장 결인을 그려 대량의 문양을 소환하더니 자신의 가슴팍에 찍었다. 그러자 원신은 흩어져 사라졌지만 한제의 체내에는 회오리가 하나 생겨났다. 그리고 이 회오리는 속신결의 구결과 방법에 따라 한제의 체내에 한 줄기 신맥을 형성했다.
눈 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에 백발노인은 한제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긴 한숨을 토해냈다.
“대혼문의 그 장로로군!”
지하 궁전에서 한제를 본 적이 있기에 노인은 상대가 대혼문의 장로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만 백의와 백발, 그리고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어쩐지 낯익었다.
격변
한편, 한제는 안개 속을 질주해 공겁기 수련자들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중간중간 공현기 수준의 수련자가 보이면 곧장 공격해 원신을 거두어 신맥을 공고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속신결의 원리에 따르면 끊임없이 원신을 봉인해 그들을 회오리로 만들면 그 회오리의 회전에 따라 신통술을 발휘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또한 이 속도는 원신을 많이 봉인할수록, 그 원신의 수준이 높을수록 배가된다.
하지만 한제가 공현기 수련자 아홉 명을 봉인한 후로는 봉인을 더 이어나가도 두 번째 신맥은 형성할 수 없었다. 이는 속신결에도 설명되어 있는 현상으로 속신결의 한계이기도 했다. 두 번째 신맥을 형성하려면 보다 높은 수준의 원신을 봉인해야 하는 것이다.
허덕재처럼 공열기 수준 수련자부터 봉인할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속신결의 위력은 대폭 줄어들었을 것이다. 현재 한제가 공현기 수준 수련자의 원신으로 형성한 회오리 하나가 당시 허덕재의 회오리 네 개보다도 강력했다.
‘현겁에 이른 수련자를 죽여 봉인해야만 두 번째 신맥을 형성할 수 있겠군. 허나 이 전장에 있는 이들 중 현겁에 이른 수련자는 매우 적다.’
한제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전방의 안개 속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두 명의 공겁기 수준 수련자를 바라보았다.
‘저들 중 누군가가 중상을 입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군. 녹마주 수련자들은 대체 무슨 단약을 먹었기에 이 안개에 대항하면서도 저토록 빠르게 회복하는 걸까? 이리 된 이상 일단 현겁에 이른 수련자를 찾아야겠군.’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뒤로 물러나 막 자리를 뜨려 했다. 한데 그 순간, 그는 돌연 표정이 급변하더니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꽈광!
30척도 채 벗어나기 전, 한 줄기 녹색 빛이 달려들어 방금까지 한제가 있던 곳에 떨어졌다. 대지가 진동하면서 거대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고 주위의 안개 역시 흩어질 조짐을 보였다.
“큭!”
거센 파도와 같은 충격에 한제는 멀리 밀려났다. 만약 조금만 늦었어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한 줄기 신식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감지한 한제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곧장 발아래 나타난 파문과 함께 세상에 녹아들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봉인!”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세상이 봉인됐고 한제는 축지성촌을 발휘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공겁기 중기의 수련자다!’
단박에 상대의 수준을 파악한 한제는 곧장 흡혈마수를 소환해 등에 올라타더니 도망쳤다.
방금 전까지 여문염 등 천우주의 여러 공겁기 수준 수련자와 싸우던 장씨 노인이 도망치는 한제를 싸늘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는 수세에 몰려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재빨리 한제를 뒤쫓았다.
“이 장도종, 네 녀석을 며칠이나 기다렸다! 네놈을 죽여 유지원의 원수를 갚고 종주의 분노를 잠재울 것이다!”
흡혈마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순식간에 10만 척을 이동했다. 하지만 장도종은 엄청난 속도로 따라붙어 단숨에 1천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렀다.
선강 대륙에서도 공겁기 중기 수준은 한 지역의 패주가 되어 종파를 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당시 칠채선존도 공겁기 중기에 종파를 열었고 대혼문 역시 그 정도 수준의 수련자에게는 공손히 대했다.
한제는 공겁기 초기 수련자와는 가까스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칠채선존의 전성기 시절과 비슷한 수준의 상대 앞에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홉 개의 본원을 갖추었다고는 해도 공겁기 중기 수준 수련자와 맞서려면 적어도 공현기 후기에는 이르거나 도고 유산의 마지막 손겁을 통과해야만 했다.
한제는 평생 수많은 위기를 넘겨온 사람이고 승패란 오로지 수준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 외의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한제는 아무런 준비도 해두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장도종에게 따라잡힌다면 죽은 목숨이다.
위기의 순간, 한제는 온 힘을 흡혈마수의 체내에 녹여내 녀석의 속도를 증폭시켜 도망치는 데 집중했다.
장도종은 철천지원수를 마주한 듯한 살기를 감추지 않고 추격해왔다.
“어디 이번에도 도망칠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보마!”
장도종은 유지원의 죽음을 종주에게 감히 고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한제의 함정에 빠지기까지 했기에 분노와 원한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자신이 자리를 비운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실 그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녹마주에서 한제를 붙잡기 위해 세운 계획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