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36
허나 그렇다고 상대를 얕잡아볼 수는 없었다. 천우 세 번째 혈을 이렇게 무사히 지켜온 것만으로도 그 실력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기 때문이다.
“천우 첫 번째 혈과 두 번째 혈, 일곱 번째 혈이 파괴됐네. 그곳의 천우사자는 모두 숨을 거두었지. 나는 극비 계획을 위해 천우 세 번째 혈의 천우사자를 전송진을 통해 귀일종으로 데려오라는 임무를 받았네.”
한제는 천우의 혈 세 군데가 파괴됐다는 소식에도 덤덤했다. 혼개와의 감응을 통해 그곳들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극비 계획?”
한제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난 그저 소집을 전달하러 왔을 뿐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네. 속히 전송진을 통해 귀일종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게야. 다른 천우혈들에도 소식을 전하러 간 사람들이 있네.”
구양진은 허공에서 옥패를 소환해 한제에게 건넸다.
“전송진의 구체적인 위치가 담겨 있고 그 전송진을 세 차례 사용할 수 있는 옥패일세. 최대한 빨리 움직이게. 난 다른 임무가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하네!”
그는 초조한 기색을 애써 숨긴 채 한제에게 포권을 하고는 이내 사라져갔다. 그 초조한 기색에서 한제는 천우주가 매우 위험한 상황에 몰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제가 손에 들린 옥패를 살펴보는 동안 지면에서 몇 갈래의 빛이 솟구쳐 올랐고 이내 그의 뒤로 염란을 비롯한 공겁기 수준 수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묵묵히 한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뒤, 옥패를 거둔 한제는 염란 등을 돌아보며 포권을 했다.
“도우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군. 혹 연이 닿는다면 다시 함께 싸울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잘들 있게!”
염란을 슥 훑어본 한제는 곧장 몸을 날리더니 이내 발아래 나타난 파문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염란을 비롯한 이들은 한제가 떠나 사라져간 곳을 복잡한 얼굴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지난 몇 달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터였다.
다음 날, 천우 세 번째 혈의 모든 수련자는 공겁기 수련자들의 안내에 따라 극천 초원을 떠나 천우주 깊은 곳, 구양진이 말한 천란산으로 향했다.
천우 세 번째 혈의 방어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 ★ ★
귀일종은 천우주의 2대 종파 중 하나로 동주 9종 13문 중 그리 강한 세력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약한 종파도 아니었다.
귀일종은 마치 거대한 회오리를 이룬 여러 겹의 고리 같은 구조로 천우주의 매우 넓은 구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이 산봉우리에 세운 수많은 건물은 옅은 안개에 휩싸여 있어 퍽 몽환적이고 탈속적인 느낌이었다. 제자의 수가 매우 많은 만큼 강자도 적지 않았다.
귀일종 동쪽으로 1만 리 떨어진 곳의 진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귀일종의 제자 수십 명이 곧장 그 진으로 향했다.
빛을 발산하던 진 안에서 왜곡과 함께 나타난 것은 한제였다. 귀일종에서 온 수련자들은 아직 인영만 어렴풋이 드러났을 뿐 생김새까지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는 한제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누구십니까? 옥패를 제시하십시오!”
서늘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공현기 후기의 중년 사내였다. 오행(五行) 도포를 입은 그는 차가운 눈으로 진에서 나타난 한제를 바라보았다.
주위의 수련자 십여 명도 오행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한제가 옥패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상대가 옥패를 꺼내지 않는다면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었다.
이윽고 한제의 모습이 완전히 또렷해졌을 때, 귀일종 수련자들은 한제의 오른쪽 얼굴의 천우 문양을 보고는 표정이 급변하더니 몇 걸음 물러났다.
그들은 한제에게서 풍기는, 그들의 심신을 진동하게 하는 천우의 혼의 기운을 똑똑히 느꼈다. 전날에도 이런 기운을 풍기는 사람을 둘이나 본 적 있었다.
“천우사자를 뵙습니다! 몇 번째 혈에서 오셨는지요? 또한 어느 종파 소속이신지 말씀해주십시오.”
서늘한 목소리의 중년 사내도 공손한 표정으로 얼른 포권을 했다. 곁에 있는 다른 귀일종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우칠혈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천우사자에게는 공손할 수밖에 없었다. 한제의 수준은 의외로 낮았지만 녹마주의 진격을 막아냈다는 것만으로도 뛰어난 능력은 입증된 셈이었다.
“대혼문의 이한제라 하네. 극천 초원의 세 번째 혈에서 왔지.”
한제 역시 귀일종 수련자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와 함께 가시지요. 종주께서 천우사자가 오시면 곧장 귀일종 중앙 대전으로 모시라고 명하셨습니다.”
중년 사내의 공손한 말에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리 떨어진 귀일종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동부계 풍의 선계 깊은 곳에 있던 통로를 통해 귀일종의 존재를 느꼈던 적이 있기에 크게 낯설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그의 벗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귀일종 광장
진 밖으로 나간 한제는 중년 사내와 귀일종 제자들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한데 잠시 후, 돌연 전송진에서 또 한 번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른 빛은 사방을 에워쌌다.
뜻밖의 상황에 한제와 귀일종 수련자들은 멈춰 서서 시선을 돌렸다.
중년 사내는 다시금 서늘한 표정으로 신중하게 진을 응시했다.
이내 진 안에서는 보라색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나타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뭇 사내들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였다. 정갈한 느낌이 마치 선녀 같았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 오른쪽 뺨에는 천우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 문양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깎아내리기보다는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었다.
“휴생문의 당지아라 하네. 창명(滄溟) 산맥에 있는 천우 여섯 번째 혈에서 왔지.”
여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리며 한제와 귀일종 수련자들을 훑어보았다. 그 침착한 눈빛은 잠시 한제에게 머물기도 했다.
한데 당지아를 본 순간 한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저 여인으로부터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허나 그 익숙함의 정체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당지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침착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도우는 몇 번째 혈에서 왔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세 번째.”
한제는 짧게 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기이한 기시감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한 것은 그녀가 동부계의 누군가가 환생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허나 상황을 알 리 없는 당지아로서는 한제의 그런 시선이 무척 불쾌했다. 초면에 여인의 몸을 샅샅이 훑다니,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에 그녀는 또다시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질책하듯 물었다.
“도우, 혹시 나와 구면이라도 되는 건가?”
여인의 냉랭한 질문에 한제는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실례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한데 왠지 모르게 낯이 익긴 하군.”
한제의 대답에 당지아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저런 비슷한 말을 평생토록 수도 없이 들어봤기 때문이다. 수많은 호색가들이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마다 했던 말이었다. 이에 그녀는 한제 또한 호색가라 못 박았고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리고는 귀일종으로 향했다.
한제 역시 자신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중년 사내의 눈빛을 무시한 채 코를 긁적이며 뒤를 따랐다.
이들은 곧 귀일종에 도착했고 중년 사내의 안내에 따라 진을 통해 중앙 대전으로 향했다.
당지아는 귀일종에 방문한 것이 처음은 아닌 듯 곧장 중앙 대전으로 나아갔다.
★ ★ ★
반 시진 뒤, 거대한 광장이 눈앞에 나타났다. 광장 상공에는 거대한 종이 하나 거꾸로 매달린 채 묵직한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종 아래로 두 명의 수련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그는 주위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노인의 오른쪽 뺨에서는 천우의 문양이 짙은 기운을 발산했다.
다른 한 사람은 청년이었다. 나른한 표정이었지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의 두 눈에서 밝은 빛이 번득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터였다. 그의 오른쪽 뺨에도 번득이는 천우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당지아가 먼저 도착했을 때, 이 청년은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슥 훑어보았다. 허나 다음 순간, 놀란 얼굴로 몸을 바르르 떨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허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당지아가 아니라 그녀 뒤쪽, 여러 수련자의 안내에 따라 도착하고 있는 백의의 사내, 한제였다.
한제 역시 그런 청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당지아는 청년의 격렬한 반응에 흠칫 놀랐다. 그녀는 상대의 정체와 천우주에서 그가 차지하는 지위까지 잘 알고 있었다. 허나 항상 고고하고 도도했던 그가 저토록 놀라는 것은 그녀로서도 처음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당지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백의백발의 사내였다.
“이 형! 정말 반갑소! 아하하하!”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강렬한 수준을 발산하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몸을 훌쩍 날려 순식간에 한제 앞에 이르렀는데 어느새 칼이 된 오른손을 곧장 휘둘렀다.
하늘마저 가를 듯이 강력한 칼의 위력에 사방의 선기가 급속도로 응집됐다. 마치 온 세상을 다 삼킬 것만 같은 위력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제를 안내한 중년 사내와 귀일종 수련자들의 표정이 급변했고 곧장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당지아는 칼로 변한 청년의 오른손이 휘둘러지는 것을 바짝 졸아든 눈으로 응시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저 청년의 모습과 더 가까웠다.
‘천우의 혼개를 활성화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저 칼에 대항하지는 못할 터!’
당지아는 아직 여덟 번째 현겁을 통과했을 뿐 공겁기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 상태였다. 아홉 번째 현겁을 마저 통과해 진정한 공겁기 초기에 이르고자 부던히도 노력하는 중이었다.
한편, 종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노인도 눈을 번쩍 떠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은 노인은 아마도 공겁기 중기에 이르러 있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칠채선존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것으로 보아 곧 후기로 돌파할 것만 같았다.
한제는 청년이 휘두른 금빛 칼이 가까이 이를 때까지 덤덤한 얼굴로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눈을 번득이며 금빛 아래 숨겨진 청년의 두 눈을 응시했다.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전방을 가리켰다.
그 순간, 온 세상이 멈췄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산하던 금빛 칼은 그대로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여전히 굳어져 있는 청년을 지나 한제는 광장 상공에 걸린 종 아래에 내려섰다.
당지아는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기이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공겁기 중기 노인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한제를 훑어보았다.
정신술의 위력이 유지되는 시간은 한순간에 불과했기에 청년 역시 이내 움직임을 회복했으나, 쓴웃음을 지으며 금빛을 흩어버리고는 돌아 섰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는데 잠시 후에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듯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이 형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 난 여전히 적수가 되지 않고…”
청년은 귀일종의 운일봉이었다.
“인사법은 바꿔보는 게 좋을 것 같군.”
한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운일봉은 호탕하게 웃으며 한제 곁에 내려섰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두 사람은 동부계에서 적으로 만나 여러 일을 겪으면서 벗이 된, 다소 복잡한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