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54
네모 형태의 탑은 위로 갈수록 가늘어졌다. 또한 이 기이한 탑의 가장 아래층 네 모서리에는 각각 한 구의 해골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둘은 하얀 도포를 다른 둘은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또한 이 해골들에서는 짙은 죽음의 기운이 풍겼다.
한제는 멍한 눈으로 탑을 올려다보았다.
‘천역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천역주를 얻은 순간부터 거의 3천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혀왔다.
일찍이 천역문을 살펴본 적도 몇 번 있으나 이런 탑과 해골들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한데 이 탑에는 문이 없었다.
한제의 눈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한참 뒤, 한제는 탑 쪽으로 신식을 뻗었다. 그리고 신식과 탑이 접촉한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는 쾅 하는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고 동시에 수많은 미세한 소리가 심신에서 피어올랐다. 너무도 다양한 소리라 한제로서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갓난아이가 태어난 순간 터뜨린 울음소리와 죽음 직전의 노인이 내뱉은 한숨 소리, 그 외의 구분되지 않는 수많은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처연한 비명도 부드러운 속삭임도 섞여 있었다. 마치 거대한 일반인 도시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이 수많은 소리는 웅 하는 소리와 합쳐지더니 한제의 심신과 귓가에 맴돌았다.
한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전보다 훨씬 높아진 지금의 수준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소리였다. 계속 들으려 한다면 원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더는 견딜 수 없을 경지에 이른 순간, 갓난아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한제의 심신을 파고들며 그를 깨웠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한참을 뒤로 물러난 한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제는 이내 몸을 홱 돌리더니 한 줄기 긴 빛이 되어 어디론가 나아갔다. 순식간에 탑에서 떠난 그는 그저 감응만을 따라 천역주에 잠들어 있는 이평과 그 아내의 혼을 찾았다.
한제는 말없이 혈육인 이평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를 깨웠던 갓난아이의 울음소리, 그에게 매우 익숙한 그 소리는 아직 원영(怨嬰)으로만 존재했던 당시 이평의 소리였다.
“그 탑은 대체 뭘까?”
한참을 고민하던 한제는 애정과 슬픔이 동시에 담긴 눈으로 이평의 잠든 혼을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는 그 기이한 탑 앞에 다시 섰다. 고개를 들면 실체와 허상을 오가는 탑의 흐릿한 꼭대기를 볼 수 있었다.
한제는 이내 이를 악물고는 몇 걸음 더 탑에 다가가 또다시 신식을 펼쳤다. 그리고 신식을 뻗음과 동시에 오른손을 들자 그의 손톱은 곧장 길게 자라났고 매우 날카로워졌다. 주먹을 쥐니 날카로운 손톱이 손바닥 살을 찔러 들었다. 그러나 한 층의 부드러운 빛에 가로막히면서 살을 뚫지는 못했다.
허나 이 부드러운 빛은 빠른 속도로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이 추세라면 열을 셀 정도면 완전히 사라져버릴 터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진다면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오면서 극심한 고통을 안길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부족했기에 한제는 곧장 탑으로 신식을 뻗었다. 순간, 아까 들었던 복잡하고 난잡한 소리가 다시 심신으로 전해졌다.
한제는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모든 이성과 지능이 복잡한 소리에 뒤덮여갔다. 바닷물과 파도에 금방이라도 침몰하려는 조각배가 된 것 같았다.
난잡한 소리에는 끝이 없었다. 온갖 소리가 뒤섞여 형성된 웅웅 소리는 심신에 울려 퍼지면서 그 어떠한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게 했다.
금(金), 천(天), 약(躍)!
시간이 흐를수록 한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고 두 눈의 초점은 흐려졌으며, 몸은 점차 심하게 떨렸다. 움켜쥔 오른손에서 발산되던 하얀 빛은 점점 흩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졌고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극심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 갑작스러운 고통에 한제는 퍼뜩 깨어났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는 여전히 들려오는 난잡한 소리 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나가 모자라.”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한제는 수천 척을 물러났다. 고작 열을 셀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방금 엄청난 위험에 봉착했던 터였다.
만약 처음 탑과 접촉했을 때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두 번째로 접촉하기 전에 충분한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난잡하고 복잡한 소리에 잠긴 채 자아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탑을 바라보는 한제의 눈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그는 여전히 이 탑의 정체가 무엇인지, 방금 전 정신을 차린 순간 들려왔던 목소리가 무엇인지도알지 못했다.
“하나가 모자라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제는 여러 개의 산 사이에 선 탑을 힐긋 바라보더니 그곳에서 떠나갔다.
★ ★ ★
녹마주, 마갈 사당이 있던 곳. 지금 이곳은 폭풍으로 휩싸여 있었다.
그 폭풍 중앙에 선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는 아직까지 깊은 두려움의 빛이 어려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한제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바닥을 통해 체내로 녹아들고 있는 천역주를 바라보았다.
“대체 네 정체가 뭐냐?”
한제가 중얼거리는 사이 천역주는 그의 체내로 완전히 스며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내 신식은 아직 충분히 강력하지 않다. 한참 부족하지. 허나 언젠가는 그 난잡한 소리를 이겨내고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똑똑히 들을 거야. 그리고 천역주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알아내주지!”
한제는 천역주에 대한 혼란을 애써 억눌렀다. 천역주와 거의 3천 년을 함께해온 만큼 답을 얻을 때까지 더 기다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신비로운 탑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천역주의 진정한 비밀에 매우 가까워졌다는 예감이 들었다.
한제는 마음을 다잡고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내다보았다. 도마종이 있는 곳이었다.
“도마종⋯⋯ 맹세대로 소멸시켜주마.”
이어서 한제가 소매를 휘두르자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폭풍이 더욱 빠르게 회전하며 거대한 검은 회오리를 형성해 그를 감싸더니 먼 곳으로 나아갔다. 어마어마한 재앙이 도마종의 코앞에 닥쳐 있었다.
녹마주 서북쪽, 끝없이 길게 이어진 연못가에 자리 잡은 도마종은 동주의 9종 13문 중 하나였다. 이는 곧 이 종파에 공겁기 후기 끝에 이른 수련자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는 드넓은 동주에서도 명성을 떨치기 마련이다.
선강 대륙에서 공겁기에 발을 들인 수련자는 대존으로 칭해졌다. 그중에도 공겁기 후기의 끝, 절정에 가까워지기는 했으나 아직 절정에 이르지는 못한 수련자는 금존(金尊)이라 불렸다. 만약 여기서 더 나아가 대천존 아래 가장 수준이 높은 공겁기 절정에 이르면 허천존(虛天尊) 또는 천존(天尊)이라 불린다.
대천존들조차 천존에 이른 수련자에게는 예의를 갖춰 대접했고 심지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지 않은 힘을 들이기도 한다. 그들은 대천존 아래 가장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천존이 되면 선강 대륙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명예와 지위를 누림과 동시에 대천존의 중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천존에 허천존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는 것은 천존과 대천존 사이에 모호한 경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천존(躍天尊)이라 불리는 이 경계에 이른 수련자는 공겁기 절정을 뛰어넘은 상태로 대천존이 거느린 이들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 사실 지금까지 약천존은커녕 천존에 이른 수련자도 드물었다.
대혼문의 나운해가 감히 도일 대천존에게 맞설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약천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오만하고 불손했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도일 대천존과 싸웠으나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의 혼만은 남아 대혼문으로 돌아갔고 도일은 그런 그의 재능을 매우 아까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로는 지금까지 천우주에서 나타났던 약천존은 나운해뿐이었다.
금존, 천존, 약천존, 대천존. 각기 다른 네 개의 지위는 네 종류의 절정의 힘을 상징했다.
대혼문은 당시 대천존에게 도전했던 나운해가 몸담았던 곳으로도 유명했지만 현존하는 청우 선조도 충분히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공겁기 후기 끝에 이른 금존인 데다가 진신을 가졌다. 게다가 대혼문의 기이하고도 신비한 신통술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혼문은 9종 13문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 귀일종에는 금존 수련자가 없다. 귀일종 종주조차 공겁기 후기의 대존에 불과했고 그 끝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한참 먼 상태였다.
그러나 귀일종에는 공겁기 후기에 이른 수련자가 다섯이나 됐다. 게다가 이 종파에는 매우 유명한 원시 갑옷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공겁기 후기 대존이 이 갑옷을 착용한다면 그 수준이 증폭하고 생명을 바친다면 금존과도 맞붙을 만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귀일종이 난감하고 어색한 위치에 오른 것도 바로 이 갑옷 때문이다. 허나 생명을 바치는 횟수는 세 번을 넘길 수 없다. 세 번을 바친 뒤에는 반드시 죽게 되기 때문이다. 허나 귀일종에서 이 갑옷을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이나 되기에 이 종파는 가까스로 9종 13문에 포함된 것이다.
한편, 도마종은 종주가 공겁기 후기 끝에 이른 금존으로 동주 전역에 그 이름을 떨쳤다. 허나 같은 금존임에도 진신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는 청우 진인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도마종이 9종에서 약한 축에 속하지는 않았다. 이 종파에는 네 명의 공겁기 대존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려 천존에 이른 선조도 있었다. 이 선조는 도일 대천존의 부탁에 1만 3천 년 전 그의 휘하로 들어간 상태였다.
이런 어마어마한 수준의 선조 덕에 도마종의 이름은 동주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고 녹마주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다. 다만 그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도마종에 대한 애착이 많이 희미해진 선조는 도마종의 소소한 싸움이나 갈등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도마종의 도통을 훼손하려 든다면 직접 나서서 그 일을 해결하려 들 터였다.
이 모든 사항과 정보는 청우 진인에게서 받은 거북이 등껍질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동주 전역을 통틀어 천존에 이른 자 가운데 살아 있는 사람은 일곱 명. 지금 내 수준에 천우의 혼개까지 착용한다면…?”
한제는 시커먼 폭풍에 휩싸인 채 돌진했다.
“금존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어. 그렇다면 천존은? 아마 붙어볼 만은 할 거야!”
한제는 소매를 휘둘러 하얀 도포로 얼굴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백발까지 숨겼다.
★ ★ ★
녹마주 서북쪽 도마봉은 짙은 안개에 뒤덮여 있어 그 안쪽까지 또렷하게 살필 수는 없었다.
이곳은 본디 10만 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던 종파였다. 허나 1백여 년의 전쟁 때문인지 지금 남은 수련자는 3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마종의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공겁기에 이른 네 명의 대존 중 둘은 천우주에서 전장을 휩쓸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이곳에 남아 종파를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종주는 1백여 년 전부터 줄곧 폐관수련을 이어왔다. 천존으로 돌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 전쟁으로 많은 제자를 잃은 도마종은 안개 진을 가동해 종파를 보호하고 혹시 일어날지 모를 뜻밖의 사태에 대비했다.
도마종을 세웠을 당시 이 거대한 연못에 산을 집어넣어 선산(仙山)들을 만들어냈다. 이후 그들은 산에서 취한 돌을 판판한 청석으로 만들어 연못을 채웠다. 이에 도마종 내의 제자들은 연못의 수면을 평지처럼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도마종은 수많은 산봉우리와 누각으로 둘러싸인 팔괘진의 형태였다. 이 팔괘진은 도마종의 중앙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렇게 보호받고 있는 중앙에 있는 것은 연못이 아니라 호수였는데 그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한데 그 바닥에는 선수(仙獸)가 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따금 파문이 일어나곤 했다.
호수 깊은 곳에는 작은 섬이 있었다. 도마종 종주가 폐관수련을 하는 곳이자 도마종의 신통술을 숨겨놓은 대전이었다.
도마종을 뒤덮은 안개 너머, 하얀 도포를 입은 한제가 허공에 서 있었다. 도포는 그 얼굴을 가렸지만 서늘한 눈빛까지는 덮지 못했다.
도마종을 바라보던 한제의 눈빛에서는 점차 살기가 피어올랐다.
“한 종파의 도통을 파괴하는 것은 오랜만이 되겠군.”
한제는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평생 어마어마한 살육을 벌여오긴 했지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누군가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 먼저 공격하려 들지도 않았다.
허나 지금 그는 살기를 숨김없이 풍기고 있었다. 도마종은 한제가 녹마주를 떠나는 것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극천 초원에서 싸웠던 천우주 수련자들의 머리를 던지며 조롱했다. 오로지 한제를 자극하기 위해 그들을 죽인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남아 있던 절망적인 표정이 눈에 선했다.
“수련자의 머리를 잘라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더냐? 도마종에서 너를 위해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이다!”
당시 도마종 수련자들이 이죽거리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머리라… 좋아하지. 아주 좋아해.”
뒤이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제는 살기가 가득한 두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