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74
순간 한제는 눈 깜짝할 사이 빛의 장막 가장자리, 3촌도 되지 않는 거리에 이르렀다. 그러자 바깥에 있던 흐릿한 허상 역시 한제 쪽으로 다가와 빛의 장막으로부터 3촌 정도 떨어진 곳에 섰다.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6촌에 불과한 셈이었다.
그 얼굴에는 가죽이 없었다. 뭉그러진 피와 살점은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인영의 얼굴은 허상에 불과해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는 데 반해 왼손만은 굉장히 또렷했다. 마치 실체처럼 가죽도 있었다.
인영의 얼굴을 어렴풋이 확인한 순간, 한제의 두 눈이 바짝 졸아들었다. 마치 심신에 백만 개의 천둥번개가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기도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5척
가죽이 없는 흐릿한 얼굴은 두 눈을 기이하게 번득이며 달려들었다. 마치 빛의 장막을 뚫고 들어와 한제의 두 눈으로 파고들려는 것만 같았다.
쾅!
순간 한제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머릿속에 유일하게 남은 기이한 눈빛이 한 쌍의 눈으로 변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풍기며 한제의 심신에 울리는 목소리가 됐다.
“이리 와⋯⋯ 이리 와⋯⋯.”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한제의 체내에서는 쿵쾅쿵쾅하는 심장박동이 요란하게 터져 나와 그 목소리에 대항했다.
“정신 차려!”
한제는 귓가에서 울리는 해자 천존의 초조한 외침과 그녀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해자 천존은 이미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난 괜찮아.”
한제가 말했다. 지금 그와 빛의 장막 사이의 거리는 1촌에 불과했다. 한 발만 더 나선다면 빛의 장막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빛의 장막 너머 흐릿한 인영이 포효하며 빛의 장막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장막은 격렬하게 흔들리며 깜빡거렸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선조(仙祖)⋯⋯.”
한제의 시선은 흔들리는 빛의 장막 너머, 몸을 날리고 있는 인영에 닿아 있었다.
한제는 천우주에서 지화 주맥을 흡수했을 때 기이한 상태에서 선조(仙祖)가 천우를 봉인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눈앞의 모호한 얼굴은 그때 한제가 보았던 선조와 매우 흡사했다. 흐릿한 인영의 얼굴은 가죽 없이 피와 근육으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분명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인영의 격렬한 포효 속에 빛의 장막이 파문을 일으켰다. 한제가 뒤로 물러나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5백 척이었던 빛의 장막은 폭이 또 한 차례 줄어 이제 3백 척에 불과했다. 한제와 해자 천존 사이의 거리도 어쩔 수 없이 좁혀지게 됐다.
인영은 거의 반 시진 동안 빛의 장막에 몸을 던지고 나서야 서서히 진정하기 시작했다. 장막 안쪽의 한제와 해자 천존을 바라보며 뒤로 물러난 그는 어둠 속에 감춰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 빛의 장막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랫입술을 깨물며 위쪽을 올려다보던 해자 천존이 작게 중얼거렸다.
한제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방금 전 본 광경을 통해 그 잘린 손바닥 안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선조의 모습을 한 인영이 나타났겠는가?
“혹시 스승인 구제 대천존에게서 선조와 관련해 들은 이야기가 있나?”
한제가 눈을 번득이며 해자 천존을 바라보았다.
“선조?”
해자 천존은 한제를 바라보았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으로 느껴진 것이다.
“들은 적은 있어. 아주 오래 전, 선족이 오직 하나의 대륙만 차지하고 있었을 때, 선조께서는 천외에서 이곳에 온 영혼들을 하나하나 봉인해 지금의 72개 주를 만드셨다고. 일흔두 번째 영혼을 봉인한 뒤로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도 했지.
그의 후손 역시 오랫동안 그를 찾아왔지만 결국 찾지 못했대. 한데 스승님은 가끔 선조가 실종된 게 아니라 어떤 변고를 당한 것 같다고도 하셨어. 자세히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해자 천존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하자 한제는 또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어쩌면 저 손바닥은 선조의 것인지도 몰라. 정말 그렇다면 대체 누가 선조의 왼손을 자른 것일까? 선극검이 파괴된 데에는 수많은 소문이 있지. 혹시 그 원인이 잘린 손바닥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한데 저 손바닥은 왜 산해수에 봉인되어 있지? 그토록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다면 일찍이 대천존이 감지했을 텐데… 이곳은 도일 대천존의 구역이야. 그의 수준이라면 분명 잘린 손바닥의 존재를 느꼈을 텐데. 아니면 혹시⋯⋯?’
한제의 두 눈이 번득였다.
‘대천존들은 진즉 산해수 봉인의 기이함을 알고 있었을 거야. 심지어 실마리까지 파악했을지도… 그러나 경거망동할 수 없었던 건 아닐까?’
한참 고민하던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추측만으로도 심신이 진동할 지경이었다.
“해자 천존, 네 스승은 구제 대천존인데 왜 너를 그의 영역인 중주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산해에 머물게 한 거지?”
“나를 의심하는 거야?”
한제의 질문에 해자 천존이 싸늘한 눈으로 반문했다.
‘똑똑한 여자로군!’
한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 마디만 듣고도 자신의 생각을 눈치챈 그녀의 영민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제는 대답 없이 상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한참 뒤에야 고개를 번쩍 쳐들어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남주로 보내 산해에 머물게 한 것은 내 스승님이야.”
그녀는 그림 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는 말에 한제는 눈을 번득였다. 만약 정말 그의 생각대로라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산해에 산해수의 영혼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었지?”
이때 해자 천존이 물었다.
“무봉 대천존 휘하의 천존으로부터 들었어. 산해수에는 나무 속성의 영혼이 있다고⋯⋯.”
한제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전에도 산해에 마련한 동굴에 온 적이 있었어. 하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지. 한데 2백 년 전, 스승님이 갑자기 내게 이곳에 머무르라고 하셨어. 한데 내게 이곳에 산해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무봉 대천존 휘하에 있고 이곳은 도일 대천존의 영역⋯⋯.”
해자 천존의 표정 역시 묵직해졌다.
한제는 미소를 지었다. 해자 천존의 말을 통해 그녀 역시 이상한 점을 파악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승님은 나를 미끼로 산해수 봉인의 힘 중 그 잘린 손바닥을 끌어내려고 하셨던 거야!”
해자 천존은 눈을 감더니 한참 뒤에야 말했다.
“이건 이해할 수 있어. 스승님은 나를 키워주셨고 가르침을 주셨으니까. 나를 미끼로 삼은 것 정도로는 아무런 불만도 갖지 않아. 한데 이상한 건 어째서 무봉 대천존이 너를 끌어들였냐는 거야. 너를 교묘하게 이곳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뭐지?”
그녀는 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제는 짐작하는 바가 있었으나 그저 고개만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의 수련자들은 내 내력을 파악하지 못해. 천존이라 해도 쉽게 간파하지 못하지. 허나 대천존이라면 다르다. 무봉 대천존 휘하의 천존이 내게 이곳을 가르쳐 준 것은 내 신분과 내력을 검증하고 구제 대천존과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겠지!
무봉 대천존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를 미끼로 삼아 잘린 손바닥을 꾀어내려 한 거야! 그들은 내 출신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아. 오직 내가 고국 수련자라는 것을 신경 쓰는 거겠지.’
한제는 여러 단서를 한데 모아 진상을 밝혀내는 데 능했다.
‘허나 이 상황에서 도일 대천존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스승님께서는 귀일종에 내가 고국 수련자임을 알리면서도 걱정하지 않으셨어. 그들이 그 사실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으리라고 자신하셨던 거지. 그들 외에는 내가 현라 대천존의 유일한 제자임을 아는 사람은 없어! 내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지. 조금 더 기다려보자. 어쨌든 모든 건 내 추측일 뿐이니까.’
한제는 고개를 들어 해자 천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이 아름다운 여인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구제 대천존이 이 여인을 미끼로 삼은 것이 사실이라면 분명 이 여인에게도 뭔가 있다는 뜻이겠지.’
한제는 이전까지의 추측들을 통해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했다. 다만 잘린 손바닥과 선족 사이에 대체 어떤 비밀이 있기에 대천존들까지 이 일에 끼어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내 시선을 거둔 한제는 두 눈을 감고 다시 산해수의 영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자신의 전력과 수준을 높여야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 ★ ★
시간은 그렇게 흘러 또다시 3년이 지나갔다. 한제와 해자 천존이 이곳에 갇힌 지도 무려 7년이 지났다.
이 3년 동안 잘린 손바닥에서 생겨난 흐릿한 인영은 총 아홉 차례 나타났고 그때마다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빛의 장막에 몸을 날렸다. 이에 빛의 장막도 총 아홉 차례 수축했다.
쩌적!
마구 뒤흔들리던 빛의 장막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폭이 30척까지 줄었다. 이제 한제와 해자 천존의 거리는 지척이라 상대가 풍기는 체향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해자 천존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이 상황이 불편한 듯했고 한제를 향한 눈빛도 조금 더 복잡해진 상태였다.
‘너무 좁아. 무슨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빛의 장막은 곧 파괴될 거야. 여기에서 한 번이라도 더 줄어든다면⋯⋯?’
해자 천존의 복잡한 눈빛에는 분노와 부끄러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제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평생 단 몇 명의 여인 외에는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접한 여인이 없었기에 그 역시 불편하고 어색했다. 상대에게서 자꾸만 풍기는 짙은 체향 때문에 더욱 그랬다. 더욱이 상대는 모은미에 비견할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가?
그때였다. 빛의 장막은 수축하다 못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허상의 인영이 또다시 격렬하게 충돌해오면서 더 많은 균열이 뻗어 나갔고 빛의 장막은 또 한 번 수축했다.
5척!
폭이 5척으로 줄어들자 해자 천존과 한제는 찰싹 달라붙게 됐다. 옷자락 너머로 따뜻한 온기까지 느껴졌다.
그제야 잘린 손바닥은 공격을 멈추었다. 고요한 가운데 해자 천존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이한제⋯⋯.”
어둠 속에서 해자 천존이 조용히 한제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 한제의 뺨에 닿았다.
“조용히!”
불쑥 입을 연 한제가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들었다. 빛의 장막 너머 인영으로 나타난 잘린 손바닥이 보였다.
“장막은 곧 무너져 내릴 거야. 그러니 봉인을 파괴하고 그 기세를 이용해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해. 밖으로 나가자마자 가장 강력한 신통술을 발휘해.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네 스승은 이미 근처에 와 있어!”
한제는 장막 너머의 흐릿한 인영을 살피며 해자 천존에게 신식으로 말을 전했다. 해자 천존은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응 하고 답했다.
한제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해자 천존이 내쉰 숨결과 체향이 느껴졌지만 이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한제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고 해자 천존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며 빛의 장막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