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73
해자 천존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그때, 돌연 빛의 장막이 바르르 진동하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이 9만 척으로 줄어들었다. 동시에 빛의 장막 너머, 어두운 허공에서는 흐릿한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인영은 빛의 장막 속 한제와 해자 천존을 바라보고 잔인한 기운을 마구 뿜어내며 중얼거렸다.
“찾았다, 선강 대륙에 속하지 않은 영혼! 봉인!”
빛의 장막이 수축하면서 해자 천존 역시 어둠 속의 흐릿한 인영을 볼 수 있었다.
“폭을 1천 척으로 줄여!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어!”
한제 역시 서늘한 눈빛으로 그 인영을 바라보며 해자 천존에게 말했다. 동시에 그는 손을 휘둘러 해룡을 거두었다.
해자 천존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제와 마찬가지로 문어를 거둔 뒤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번득이던 빛의 장막은 순식간에 폭이 1천 척으로 줄어들었다.
이제 빛의 장막 안에는 한제와 해자 천존, 한 쌍의 남녀만 남게 됐다.
말없이 한쪽 구석에 앉은 해자 천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네 달, 여섯 달⋯⋯. 이제 그들이 이곳에 갇힌 지 1년이 넘어갔다.
1년이란 짧은 시간이지만 좁은 공간에 갇힌 한 쌍의 남녀에게는 매우 길게 느껴졌다.
한제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에게 외로움은 습관이었고 그동안 산해수의 영혼 두 개를 흡수해 나무의 본원을 키우는 데 집중했으니까.
반면 8개월 동안 침묵하고 있던 해자 천존은 복잡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여태껏 낯선 사람과 1천 척 이내의 공간에서 1년 동안 함께한 건 처음이야. 그런데도 너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이한제라는 이름뿐이지. 너, 어느 종파 출신이야?”
해자 천존이 조용히 물었다.
“종파라⋯⋯.”
좌선에서 깨어난 한제는 조용히 기억을 더듬었다.
“난 칠도종 출신이야.”
한참 뒤에야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칠도종?”
해자 천존은 잠시 생각했지만 인상에 남은 강력한 종파 중 칠도종이라는 이름의 종파는 없었다.
“동주 칠도종. 아주 작은 종파지.”
한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출신 종파에 대해 물을 때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난 종파가 없어. 어렸을 때부터 스승님을 따라 제산(帝山)에서 자랐지.”
해자 천존이 말했다.
“제산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매해 이맘때면 온 산이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낙엽으로 물들지. 나중에라도 기회가 되면 한번 가봐.”
두 사람이 조용히 담소를 나누는 동안 폭이 1천 척에 불과한 이 구역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너 정도라면 남주 도일 대천존의 제안을 받았을 텐데 응했어?”
해자 천존이 아름다운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
한제가 고개를 저었다.
“내 스승님은 굉장히 좋은 분이셔. 그분을 따르는 것도⋯⋯.”
해자 천존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지금은 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제는 완곡하게 답했다.
“수련한 지는 얼마나 됐어?”
해자 천존은 어째서인지 돌연 이런 질문을 했다.
“너보다 길지는 않을 거야.”
한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해자 천존은 한제의 답에 입을 가리며 간드러지게 웃었다. 함께해온 1년 동안 이런 웃음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에 갇혀 있으면서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걸 보면 아내는 없겠구나. 아내가 있었다면 이곳에 갇히게 되자마자 걱정부터 했을 테니까.”
해자 천존이 웃으며 말했다.
한제는 말없이 혀를 차고는 해자 천존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녀는 어딘가 전과는 좀 달라진 느낌이었다.
“이곳에 함께 갇힌 것도 인연일 테고. 날 구해준 은혜도 있으니… 어때, 좋은 여인을 소개해줄까?”
해자 천존은 장난스레 물었다.
“생김새는 보통이나 특유의 느낌이 있으니 그만하면 괜찮고… 수준은 평범하나 천존 수준의 전력을 가졌지. 이 정도면 꽤 훌륭한 편이야. 이렇게 할까? 이곳을 나가게 되면 아내로 삼을 만한 여인을 소개해줄게.”
해자 천존은 두 눈을 번득이며 입술을 요염하게 오므렸다.
그때였다. 한제가 냉랭하게 외쳤다.
“그만둬! 매혹 신통술 따위는 내게 통하지 않아!”
이어서 한제의 두 눈이 돌연 금빛을 뿜어내며 강한 위압감을 발산했다. 그러자 해자 천존은 입을 다물게 됐다.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하나 찾아주지!”
한제는 뒤이어 천둥번개의 진신을 소환했다. 진신은 한제의 체내에서 걸어 나오더니 그와 해자 천존 사이에 가부좌를 틀었다.
“심심하면 내 분신과 얘기해. 더는 내 수련을 방해하지 마!”
한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벌떡 일어나 먼 곳에 다시 가부좌를 튼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산해수의 세 번째 영혼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해자 천존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제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한 것이다.
그녀는 짙은 살육의 기운과 천둥번개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는 진신을 보고는 차게 코웃음을 치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해자 천존, 뭔가 이상해!’
눈을 감고 좌선을 시작한 해자 천존을 보며 한제 본체의 눈동자가 살짝 졸아들었다.
‘그전에는 그저 저 잘린 손바닥이 그저 가까이 있는 저 여인을 먼저 공격한 거라고 생각했지. 한데 이제 보니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아.’
해자 천존의 변화는 기이했으나, 한제로서는 그녀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방금 전 선극검 조각이 깃든 눈빛으로 상대를 살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자 천존이 맨 처음 보였던 태도나 감정은 정상적이었어. 허나 좀 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지.’
한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고 산해수 영혼을 흡수하는 데 몰두했다.
★ ★ ★
또다시 시간이 흘러 3년이 지나갔다.
이 3년 동안 한제는 해자 천존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산해수의 영혼을 흡수하는 데만 집중했다. 덕분에 나무 본원의 힘은 꾸준히 늘어났고 네 개의 영혼을 흡수한 지금은 소기의 완성을 거둔 상태였다.
수많은 녹색 무늬가 한제의 피부 위에 나타났다. 식물의 잎맥 같은 어렴풋한 문양들이 한제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고 기이해 보이게 했다.
그동안 해자 천존 또한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좌선에 집중했다. 무슨 신통술을 수련하는지는 몰라도 이따금 표정이 변하기도 했다.
또한 이 3년 동안 밖에서는 먹먹한 쾅, 쾅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기도 했다. 강력한 힘이 빛의 장막을 때리는 것 같은 이 소리는 점점 강력해졌고 또 잦아졌다.
1천 척이었던 장막의 폭 역시 그동안 조금씩 줄어들 조짐을 보였다.
3년 하고도 네 달째 되는 어느 날이었다. 돌연 빛의 장막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우렁차고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한제는 수련을 멈추고 두 눈을 번쩍 떠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는 표정이 급변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빛의 장막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이 줄어들기 시작해 절반인 5백 척으로 좁아졌다. 해자 천존 역시 좌선에서 깨어나 얼른 옆으로 이동했다.
콰쾅! 쾅!
굉음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다가 무려 반 시진 뒤에야 천천히 줄어들었다. 5백 척이라는 비좁은 공간에 함께하게 된 한제와 해자 천존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빛의 장막은 1백 년도 채 못 버티겠군. 3년밖에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줄어들다니⋯⋯. 만약 미리 줄이지 않고 10만 척 그대로 두었다면 진즉 파괴되고 말았겠어.”
해자 천존의 표정과 말투는 모두 예전의 상태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마 머지않아 더 줄어들 거야. 완전히 무너져 내릴 때까지⋯⋯.”
해자 천존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위쪽을 올려다보았고 어둠 속의 흐릿한 인영은 여전히 그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한제는 심신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빛의 장막 너머 인영의 눈빛에 깃든 기이한 힘이 심신을 빨아들이고 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가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제는 얼른 두 눈에 금빛을 번득이며 정신을 차렸다.
“저들은 늘 우리를 지켜보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어. 지난 몇 년 동안 그랬지.”
해자 천존은 두려움이 어린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저건 잘린 손바닥이야!”
한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저 손바닥의 주인은 누구지?”
그 순간, 한제는 흠칫 놀란 해자 천존을 두고 곧장 위로 날아올랐다.
한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해자 천존 역시 뒤를 따르려 했다.
“오지 마! 만약 내가 뭔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면 곧장 알려줘야 해!”
한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신식을 통해 해자 천존에게 말했다.
이에 움찔 멈춰선 해자 천존은 멀어져가는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그 뒷모습에서 이곳에 갇히기 몇 년 전, 상대가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그 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