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488
며칠 동안 예의 그 차가운 코웃음 소리는 한 번도 들려오지 않았다. 반면 살육의 기운으로 얻은 생기 덕분에 한제의 몸은 거의 회복된 상태였다.
원고 시대의 전장에 세워진 탑 안, 한쪽 팔을 잃은 갑옷 안에서는 어스름한 빛이 번득였다.
그 앞에는 검은 옷을 입은 한 노인이 꿇어앉아 있었다. 그는 당시 후포를 구해주었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네게 마갑(魔鉀) 세 부분을 주마. 그자를 막아라.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해라!”
신식을 통해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갑옷의 손목 보호대와 흉갑, 그리고 견갑이 날아들었다.
세 개의 갑주는 모두 새카맣고 얇은 선으로 변해 노인의 옷을 뚫고 들어오더니 그의 피부를 따라 돌며 한 갈래 한 갈래의 검은 줄무늬가 되었다. 순간 노인의 전신을 뒤덮은 검은 줄무늬는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쳤고 그 움직임을 멈추었을 때 노인은 검은 갑옷을 착용한 상태였다.
갑옷 안에는 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염이 가득 어려 있었다. 이 마염에는 팔뚝만 한 검은색 그림자도 하나 깃들어 있었는데 한제가 소멸시켰던 그 그림자와 생김새가 똑같았다.
그림자가 노인의 미간을 뚫고 들어갔다.
“크으으…”
노인은 이를 악물고 엄청난 고통을 참아냈으나, 비명이 세어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한참 뒤,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어스름한 눈빛을 번득이더니 공손하게 말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가라!”
갑옷에서 번득이는 어스름한 빛은 이전보다 어두워진 상태로 다소 기운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
노인은 곧장 탑 밖으로 향하더니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외쳤다.
“요위(妖衛), 앞으로!”
그 목소리에 돌연 광풍이 불었다. 소름끼치도록 서늘한 바람에 대지마저 그대로 얼어버릴 것 같았다.
이 기이한 바람은 노인 곁에서 맴돌다가 갑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여인의 얼굴에서부터 그려진 문신은 온몸으로 이어져 있었지만 갑옷에 가려져 있어 전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허나 그녀의 외모는 요장 사련과 무척 닮아 있었다.
여인은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요위 풍음, 여기 있습니다!”
뒤이어 대지가 진동하더니 연이어 펑펑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노인의 앞쪽으로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의 땅에 균열이 이는가 싶더니 시커먼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 곧 비쩍 마른 노인 하나가 그 안에서 기어 나왔다.
짐승처럼 바닥에 엎드린 그는 음산한 눈으로 씩 웃었다.
“요위 지마, 여기 있습니다!”
그때, 먼 하늘 끄트머리에서 수많은 혼백이 나타났다. 1억 개가 넘을 듯한 혼백들은 검은 구름이 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그 검은 구름이 깔때기 모양으로 변하더니 그 아래 지면에서 어두운 얼굴의 청년이 나타나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뒤로 대량의 혼백들이 포효하며 따라왔다.
“요위 후포, 여기 있습니다!”
★ ★ ★
만요산을 지난 한제의 앞에 끝없는 황야가 나타났다. 황야 곳곳에는 유해가 널려 있었고 지면은 말라 갈라졌으며, 고약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한제의 두 눈은 잔뜩 충혈되어 붉었다. 며칠 동안 승선과의 기이한 효과가 심신에 완벽히 침투해 감각이 평소보다 몇 배는 예민해진 상태로 약간의 자극에도 폭발할 듯했다.
번개처럼 몸을 날린 그는 황야를 질주했다.
그때, 돌연 황야의 지면에서 펑펑 하는 연이은 소리가 들려오더니 진흙으로 이루어진 황토색 가시가 불쑥 튀어나와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뒤이어 수많은 가시들이 속속 나타났다.
쉭! 쉭!
가시들이 잔뜩 독을 품은 예리한 침처럼 달려들면서, 한제의 전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시가 가득 박혔다.
허나 한제는 물러나지 않고 온몸의 선력을 폭발적으로 끌어 올려 회오리를 일으켰다.
콰오오!
회오리가 이리저리 휩쓸고 지나가자 가시들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그때, 비쩍 마르고 시커먼 인영 하나가 지면에서 훌쩍 튀어나와 가시에 올랐다. 그는 오른쪽 무릎을 가시에 얹은 채 개처럼 엎드려 고개를 살짝 틀어 수백 척 밖에 있는 한제를 음산하게 바라보다가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았다.
한제는 새빨간 두 눈으로 그 노인을 바라보며 몸을 날리더니 오른손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 순간, 적멸지의 바람이 나타나 검은 빛이 되어 그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노인은 적멸지를 앞에 두고도 소름끼칠 정도로 음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피하기는커녕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노인의 뒤에서 허상이 하나 나타났다. 높이가 약 1백 척에 달하는 거대한 허상은 새카만 고치 형태였고 안에 뭔가가 들어 있는 듯했다.
요위(妖衛)
비쩍 마른 노인이 입을 쩍 벌리자 고치 형태의 허상에도 틈이 하나 벌어졌다. 이어서 노인이 숨을 들이마시자 적멸지의 검은 빛이 그의 입으로 흡수되었다. 노인은 음산하게 웃으며 그것을 꿀꺽 집어삼켜버렸다.
그 순간, 고치의 허상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꿈틀거렸다. 그러자 고치의 겉면에 나 있던 고름집이 터지면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고름이 분출되었다.
“키힛!”
비쩍 마른 노인은 요상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고치의 허상에서 분출된 고름이 그의 손에 응집되어 구체가 되었다.
노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한제를 주시하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좀 전의 그 빛, 아주 맛있구나. 그러니 나도 보답을 해야겠지!”
말을 마친 그는 고름으로 이루어진 구체를 땅으로 내던졌다.
파삭!
땅에 떨어진 구체는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고름이 흘러나와 대지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1만 척 반경의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대량의 고름이 지면의 틈에서 분출되어 눈 깜짝할 사이 하나의 고리를 이루었다. 이 고리의 바깥층을 이룬 고름이 벽처럼 하늘로 솟아올라 반경 1만 척에 달하는 우리가 만들어졌다.
노인은 입술을 핥으며 몸을 훌쩍 날려 그 고름에 녹아들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고름으로 이루어진 벽들이 사방에서 한제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콰드드!
위로는 하늘을 덮고 아래로는 땅을 가리는 고름 벽이 빠르게 수축되면서 거대한 구체를 이루었다.
구체 밖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낸 노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빠르게 수축하고 있는 고름 구체를 바라보면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풍음, 네가 할 일은 없다. 저런 수련자 한 명 정도야 나의 천농지창(天膿地瘡)으로 가둬버리면 끝이지!”
서늘한 바람이 불더니 노인으로부터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서 얼굴과 몸에 문신이 있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냉랭한 시선으로 이미 1백 척 정도로 크기가 줄어든 고름 구체를 바라보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주인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겠어?”
“과연 그럴까? 어디 저자가 벗어날 수 있는지 보자고. 크하하!”
비쩍 마른 노인은 유쾌한 듯 웃었다. 허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빠르게 수축하던 고름 구체는 30척 정도의 크기까지 줄어들더니 더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구체 안에서 미친 듯한 전의와 살기가 피어올라 그 밖으로까지 흘러나왔다.
순간 주위가 서늘해지면서 찬바람이 불었다.
살기에 섞인 전의를 느낀 순간, 비쩍 마른 노인의 두 동공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바로 그때…
꽝!
천둥소리와 함께 한 줄기 검광이 고름 구체를 가르며 튀어나왔다. 이어서 선검이 모습을 드러냈고 바로 옆에 또 하나의 보검이 붙어 있었다. 그 검에서는 검은색의 사악한 양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굽은 칼이 따라 나왔다.
세 자루의 검에 이어 긴 머리를 나풀거리는 한제가 둘로 나뉜 고름 구체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새빨간 그의 두 눈에서는 전의와 살기가 뒤섞인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비쩍 마른 노인은 한제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끔찍한 눈빛이군!’
한제가 나온 순간, 그의 앞에 있던 세 자루의 검이 빠르게 튀어나가며 세 개의 기이한 빛이 되어 노인과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은 차가운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나더니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그러자 검은색의 굽은 칼도 웅웅 소리를 내며 몸을 휙 틀어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하늘에서는 신음 소리와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노인은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린 뒤 손을 맹렬히 뻗으며 외쳤다.
“지창(地瘡)!”
대지가 진동하더니 노인을 중심으로 반경 1만 척의 지면이 휘청거림과 동시에 수많은 고름 덩어리가 나타났다. 고름 덩어리는 점점 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솟아올랐다.
“폭발!”
노인이 크게 외치자 그의 몸에서 강력한 기세가 피어오르면서 고름 덩어리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흥! 폭발은 개뿔!”
선검 안의 허이국이 모습을 드러내며 비쩍 마른 노인을 향해 욕설을 지껄이더니 곧장 노인을 향해 뻗어갔다.
노인은 불쾌한 표정으로 선검을 움켜쥐려 했다.
허나 허이국은 노인의 손을 피하기는커녕 속도를 약간 늦추어 상대가 선검을 잡기를 기다렸다. 속으로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있는 듯 킬킬댔다.
노인의 손이 선검에 닿은 순간, 선검이 휙 하고 휘둘러졌다.
“크아악!”
노인은 순식간에 손가락 다섯 개가 후두둑 잘려나가면서 참혹한 비명을 내질렀다.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이⋯⋯ 이게 대체!”
깜짝 놀란 노인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선검은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짝 뒤를 따랐다.
사악한 양의 형상을 드러낸 보검 역시 번개처럼 날아들어 뒤쪽에서 노인을 공격했다.
선력으로 가득 찬 한제는 공중에서 두 자루의 검과 싸우고 있는 노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노인은 이를 갈며 등 뒤에 다시 한 번 고치 형태의 허상을 만들었다. 한데 그것으로 또 한 번 신통력을 발휘하려던 순간, 한제가 사라지더니 노인의 상공에서 나타났다. 그는 새빨간 눈으로 그 허상을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살육의 기운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와 고치 형태의 허상을 뚫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