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90
그 순간, 결정의 빛이 더욱 눈부시게 번쩍이며 거의 형성되기 직전이었던 고마의 인영을 흩어버렸다. 동시에 선력이 주입되면서 흡입력은 더욱 증폭됐다.
한제는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오와 호연, 주일도 마찬가지였다.
청림의 마지막 수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한제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위는 검은 바다와 같은 곳으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고 바닷바람까지 불어왔다.
“깨어났구나!”
한제는 냉랭한 목소리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그리고 그 순간, 한제는 찬숨을 들이마셨다. 허공에 한 여인이 떠 있었는데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그녀는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짙은 한기를 풍기고 있었다. 곁에 있기만 해도 한기가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청림의 딸이자 우의 선계의 선군인 청상이었다.
“되살아나신 겁니까?”
한제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일시적으로는!”
청상은 짧고 냉랭하게 말했다.
한제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내 아버지의 의식의 바다다.”
청상은 덤덤하게 말하며 아래에 펼쳐진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두 줄기 푸른빛이 나타나더니 이오와 호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연은 청상을 보자마자 잔뜩 흥분하며 외쳤다.
“청상!”
이오 또한 그녀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이내 안심한 듯 웃었다.
“네 혼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구나. 그래서 스승님의 신통력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된 거야!”
청상은 냉랭한 얼굴에 살짝 미소를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언니. 언니가 살아 있어서 정말 기뻐요.”
그때 또다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곧 주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청상을 보자마자 멍한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잔뜩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못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정아⋯⋯ 정아야⋯⋯.”
주일의 눈빛에 청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서리가 낀 듯 차가운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누구더러 정아라 하느냐!”
주일은 흠칫 놀라며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아는⋯⋯ 이미 떠났구나⋯⋯.”
청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덤덤하게 말했다.
“난 네가 어떻게 새로운 우계의 검혼이 됐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미 검혼이 된 네 자격을 없앨 수는 없지. 허나 한 번만 더 그런 넋 나간 소리를 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주일은 몸을 바르르 떨며 넋이 나간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허나 이내 비참한 얼굴로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정아는 이미 모든 것을 잊었다. 당시의 정아는 한 줄기 잔혼이었을 뿐이고 지금 그 잔혼은 이미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것은 청상이지 그의 정아가 아니었다.
하지만 1천 년간 모든 것을 걸고 지켜왔던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참기 힘든 고통이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고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모든 체력을 잃고 점차 허약해졌다.
1천 년의 보호, 1천 년 동안의 기다림… 그 모든 것을 인내하고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지금 그와 청상 사이의 거리는 겨우 30척에 불과했지만 그에게는 우주 반대편보다도 멀게만 느껴졌다.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라고 해도 이보다 멀까? 이것은⋯⋯ 그래, 삶과 죽음이 아닌 망각으로 인한 거리다.’
한편, 청상의 반응을 본 한제는 싸늘한 얼굴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한데 그때 눈이 마주친 주일이 고개를 저었다.
주일은 정아를 탓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원해서 한 행동이었으니까. 2천 년 전, 한 구의 시체에 대한 집착으로 문파를 떠나면서 배신자가 된 것도 1천 년 전, 자신의 영혼을 불태운 것도⋯⋯.
지금의 그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눈앞의 정아는 이미 그에게 낯선 존재였고 앞으로는 절대 그때처럼 함께할 수 없을 만큼 신분의 차이가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여전히 2천 년 전 문파를 배신한, 1천 년 전 생명을 불태워 정아의 시신을 지켜낸 그 주일이었다.
한편, 주일의 씁쓸한 얼굴을 본 청상은 어째서인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얼른 그 고통을 억누른 뒤 다시는 주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오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찍이 이럴 줄 알고 있었지만 미리 주일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주일과 함께하면서 그의 과거를 알게 됐다.
“동생, 주일은⋯⋯.”
마음이 여린 호연이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아래 펼쳐진 검은 바다에서 성난 파도가 요란하게 몰아치면서 사방으로 끊임없이 퍼져나가더니 마기가 하늘로 솟구쳐 올라 온 세상을 휩쓸었다.
이 독한 마기는 하나로 응집하더니 거대한 고마의 모습을 이루었다. 이 고마는 한 손으로 하늘을 떠받칠 수 있을 만큼 컸고 끝없는 마기가 몸 주위를 마룡(魔龍)처럼 맴돌았다. 다름 아닌 타지아였다.
타지아는 두 눈이 새빨갛고 미간에는 흉터가 있었다. 마기는 그 흉터로 몰려들면서 치직 하는 소리를 냈다.
“크아아! 모두 죽여주마!”
타지아는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며 거대한 손으로 한제와 일행들을 움켜쥐려 했다. 엄청난 압력과 함께 끝없는 마기가 맴돌았다.
바로 그때, 해수면에서 성난 파도가 일더니 그 안에서 한 중년 사내가 걸어 나왔다. 푸른 옷을 입은, 무척 준수한 그에게서는 선인의 풍모가 느껴졌고 엄청난 위엄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스승님!”
이오와 호연이 감격한 듯 외쳤다.
“아버지.”
청상 또한 부드러운 표정으로 공손하게 말했다.
사내, 선제 청림은 신중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오른손을 휘둘러 바람을 한 줄기 일으켰다. 그 바람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면서 고마의 거대한 손과 충돌했다.
콰쾅!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고마의 손은 곧장 무너져 내려 수많은 검은색 기운이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청림이 쏘아 보낸 바람 역시 그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청림! 넌 이미 너무 허약해졌다. 한데 어찌 아직도 저항하려 하느냐? 내게 네 육신을 넘긴다면 네 생전보다도 더 큰 명망을 누릴 수 있다!”
타지아의 성난 외침과 함께 붕괴됐던 그의 손은 순식간에 회복됐다.
허나 청림은 고마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는 모종의 규칙이 깃들어 있는 듯 그는 한눈에 한제의 모든 비밀을 꿰뚫어보았다. 한제는 마치 벌거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 한제에게 익숙한 기운 한 줄기가 그의 미간을 통해 흘러들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상대에게 꿰뚫린 듯한 느낌이 사라졌다.
“네겐 이 청림의 전수를 받아 내 마지막 제자가 될 자격이 있다!”
말을 마친 청림은 한 줄기 푸른빛이 되더니 한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체내로 들어와 버렸다. 이어서 한제의 온몸에서는 펑,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위로 떠올랐다.
한제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때, 체내에서 청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영혼은 약하지 않다!”
그 순간, 한제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전에도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던 느낌이었다. 바로 산마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던 때였다.
허나 그 느낌은 당시보다 몇 배는 강렬했다. 몸은 갈가리 찢기는 듯했고 혼은 끊임없이 잡아 당겨지는 것 같았다.
“그저 수준이 부족할 뿐이지!”
청림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 순간, 한제의 오른손은 제멋대로 들어 올려져 이오를 가리켰다.
“이오, 이 스승은 네 수준이 필요하다!”
그러자 이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 줄기 긴 빛이 되어 달려들더니 한제의 체내로 녹아들었다.
“크아악!”
한제는 한층 더 커진 고통에 결국 포효를 내질렀다.
“호연, 청상, 그리고⋯⋯ 너!”
한제는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그의 오른손은 더없이 침착하게 주일까지 가리켰다.
“얼른 들어와라!”
청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에 따라 호연과 청상, 주일은 곧장 세 줄기의 빛이 되어 한제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더욱 격렬해진 고통에 한제는 견디기 힘들었다.
“난 네 몸을 점령할 수는 없지만 네게 힘과 규칙에 대한 이해를 그리고 내 모든 선술에 대한 기억을 줄 수는 있다. 그리고 네가 직접 그것을 발휘하게 하여 공열(空涅)급 전투를 행하게 할 수 있지! 네가 나를 구하려 한 것에 대한 대가다!”
청림의 목소리는 점차 흩어져갔고 거의 사라져가는 순간,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한제의 체내에서 폭발했다. 세상을 덜덜 떨게 만들고 우주 만물을 무너뜨릴 정도의 힘이자 쇄열기 수련자조차 굴복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크아아아!”
하늘과 땅마저 발아래 꿇릴 수 있을 법한 의지가 한제의 마음속에서 자라났다. 그의 체내에서는 여전히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한제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그는 평생 상상해본 적도 없을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됐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가서 싸워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노련한 목소리에 한제는 고개를 번쩍 들어 저 멀리 떨어진 고마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던 타지아의 눈에 두려움이 들어찼다. 그는 이제야 청림의 마지막 수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바로 도의 전수였다.
세상에는 영혼이 있고 모든 수련자는 각자의 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수련자들은 다른 영혼에게 자신의 도를 전달할 수 있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오른손을 들어 올려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대지!”
그 순간, 청림의 의식의 바다 안에 바람이 몰아치면서 한 줄기 규칙의 힘이 일어 모든 것을 파괴했다. 바닷물 역시 눈 깜짝할 사이 붕괴되면서 일대는 이미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 되어 있었다.
타지아의 표정이 다시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