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22
123. Shock and Terror (21) >
***
공기가 얼어붙는다. 최판석의 눈은 당혹감으로 얼룩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 늙은 오크는 산전수전 다 겪은 국회의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요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지금쯤 블레이드에게 제압당했어야 할 남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엉뚱한 검을 들고, 원리를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그나마 목소리의 떨림을 가라앉힌 것은 연륜의 힘이었다.
“주다니··· 무얼 말씀이십니까?”
민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박혔다.
“정확히는 돌려줘야 할 것이 있군.”
자연스레 하대하고 있었지만 오크는 지적하거나 항변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가슴 타는 긴장 속에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까딱.
단검이 살짝 움직인다.
“나를 잘 이용해 먹었더군. 이제 살 만한가?”
마지막 말은 의원 뒤의 딸을 겨냥한 것이었다.
최선아는 여전히 예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발작에 가깝게 떨고 있다. 오크는 조심스레 몸을 움직여 그녀를 등 뒤에 놓았다. 그렇게 요원의 시선에서 가렸다. 소용없는 짓임을 알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설마··· 예지가 틀렸나?’
아무리 봐도 세뇌당한 것 같지는 않다.
눈동자에 일렁이는 조용한 분노는 요원 자신의 것이 분명했다.
‘계획이 탄로 났군.’
혈관이 수축되고 온몸에 싸한 기운이 맴돌았다. 오크는 더 이상의 발뺌을 포기했다.
“딸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리고 두 눈에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모든 건 저 혼자 꾸민 짓입니다. 선아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의원의 말을 들으며 민준은 생각했다.
과연, 그녀에게는 수형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범죄 기억을 깨끗하게 삭제당한 범죄자들 말이다.
하지만.
“그래?”
냉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
“기억을 지운다고 죄까지 사라지나?”
민준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800년 동안 잊었던 원죄를 생각했다. 다만 민준이 인지하는 그것은 위원회가 구형한 근거로서의 죄가 아니었다. 아시프-1를 창조한 행위에 대해 민준은 죄의식을 갖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죄는, 동족을 피 빨리는 가축 신세로 전락하게 유도한 것이다.
고의든 아니든 결과가 끔찍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죄인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죗값을 치를 작정이었다.
민준이 한 걸음 디뎠고 오크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온 힘을 다하여.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는요!”
인정에 호소하며 애절하게 외친다.
하지만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민준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상대의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자 국회의원은 피가 말랐다. 일부러 고성을 질렀지만 밖은 잠잠하다. 병실이 마법적으로 단절되었고 부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그는 알았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속인 것은 미안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치료해 주지 않을 거라고 딸이 예지를···!”
“내가 원래부터 절대 못 견디는 것이 있어.”
병실을 채우는 위압감.
오크는 가슴이 짓눌리고 숨통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누가 내 것을 건드리면 못 참겠더군. 내 영역에 멋대로 침범해서 난장을 피우는 놈들 말이야.”
그토록 견디기 힘들고 분노했던 이유를 이제 알았다.
이미 모든 것을 빼앗겨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귓가에 환청이 울려 퍼진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유를 선물합시다. 지배와 착취밖에 모르는 그 괴물들의 압제와 독재에서 벗어나, 모든 종족의 가능성을 꽃피우도록 도와줍시다. 긴 겨울을 끝내고 자유의 봄을 싹트게 합시다.
민준은 동족 모두를 좀 더 일찍 깨우고 싶었을 뿐이다. 그 소망이 상황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그러니 알려 주십시오. 당신들이 잠들어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동족들은 가장 소중한 것, 그들의 근원이 되는 피를 강탈당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강탈당하고 있다.
그것이 민준의 원죄다.
“그런데 또 하나,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게 생겼지.”
민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나한테 개목걸이 채우려고 달려드는 놈들.”
오크는 항변하려고 했다.
하지만 목덜미에 날아오는 검날이 더 빨랐다.
“크억!”
한 점에 쏠리는 살기.
목이 꿰뚫리는 감각에 최판석은 비명을 질렀다.
“···허억!”
그런데, 죽지 않았다.
주륵.
검은 경정맥을 관통하는 대신 피부를 살짝 찢은 채 멈췄다. 피가 붉은 줄기를 그리며 흐른다. 오크는 숨도 쉬지 못하고 굳었다.
그 순간.
최판석의 눈이 흐릿해졌다.
“······!”
세뇌.
이것은 본래 블레이드가 사람을 홀리는 방식이다.
한편 최판석이 이지를 잃은 순간 민준은 느꼈다. 블레이드가 그림자 괴물 속에 심어 놓은 세뇌의 힘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군.’
민준은 융합된 파편의 능력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블레이드의 세뇌는 손잡이를 잡은 사람 한 명과 검에 상처를 입은 한 명에게 국한된다. 그래서 최판석을 세뇌한 순간 그림자 괴물은 정상으로 돌아간 것.
그걸 후라이팬 본연의 능력과 비교해 본다. 국회의원 스물아홉 명은 여전히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요리를 해서 먹여야 하는 복잡한 전제 조건이 있고 장악력도 검보다는 약하지만, 대신 더 많은 사람을 컨트롤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후라이팬은 본래의 능력에 더해 블레이드의 것까지 흡수했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유용하게 쓸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민준은 최판석의 기억을 살폈다. 창조물이 의원의 기억을 전달해 주었다.
그 속에서 민준은 반복되는 증오의 연쇄를 보았다.
-선아야! 정신 차려라··· 선아야! 거기, 거기 누구 없소?!
오크는 종족 차별주의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다. 그의 일생은 차별과의 싸움이었으며, 딸이 당한 일이 결정적이었다. 입양한 이유야 어찌 되었든 최선아를 아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능력이 강화된 딸이 도와준 덕분에 두 가지 방법이 도출되었다.
단기적으로는, 차별주의자들이 뽑아낸 그들의 대표를 오크의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이었다. 상상만 해도 통쾌한 일이었다. 유권자들이 종족 차별적 사상으로 국회를 오염시키기 위해 보낸 의원들을 오크가 조종하는 일.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이 아는 것을 모두 토해 내도록 해 테러 배후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제거할 계획도 있었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자기 파괴적 복수가 아닌 자기 발전적 복수를 계획했다. 그들이 멸시하는 동족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드는 형태의 복수. 그리하여 종국에는 누구도 오크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다른 종족 부럽지 않은 부를 몰아주는 것. 힘의 균형을 조금씩 오크 쪽으로 몰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디딤돌이 될 재개발 법안을 준비했다.
민준은 그의 기억 속에서 뒤틀린 적의를 보았다. 그리고 복수의 도구로 민준을 사용하려 한 사실을 확인한다.
요원은 날 끝만 살짝 찔러 넣었던 검을 뽑았다. 수양딸의 시선이 그것을 따라갔다. 밀랍 인형처럼 굳은 채 눈동자만 움직인다.
“당신, 정말 보기 드문 능력자더군.”
어느 정도냐면, 위원회가 알면 탐낼 수준이다.
“내가 말했지, 줄 게 있어서 왔다고.”
최선아는 민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에고 소드가 고민했던 것과 달리 민준은 선악의 기준에 대한 혼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행동 원칙은 훨씬 간단했다.
그들 부녀가 자신을 도구로 쓰려 했던 악의를 그대로 돌려준다.
“앞으로는 나를 위해 일해 줘야겠어.”
최선아 대신 오크를 세뇌 시킨 것은, 이지를 잃은 상태에서 예지 효율이 떨어지는 걸 알기 때문이다.
“·····.”
그녀는 방금 전 끔찍한 미래를 보았다.
최선아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었다. 기억을 잃은 뒤 처음 행한 미래 예지에서 어떤 길을 택해도 부녀는 처참한 말로에 이르렀다. 아까는 이성을 잃고 도망치라고 소리 질렀지만, 사실 출구는 없었다. 어떤 길을 택해도 파국이었다. 엿보기만 해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잔혹한 미래가 펼쳐졌다.
그런데 그중 딱 하나, 부녀가 그나마 나은 형태로 살아남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시··· 시키···.”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문장을 완성한다.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세뇌당한 양부는 인질이다.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건물 밖으로 뛰어내릴 터. 최판석의 목숨은 요원에게 달려 있다.
최선아는 도망갈 수 없는 덫에 걸린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동안 최판석을 위해 발휘한 예지력을 앞으로는 오로지 눈앞의 남자를 위해서만 사용하게 될 것도.
민준은 그를 종으로 부리려 음모를 꾸몄다가, 반대로 그의 종으로 전락한 부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 하신 말씀 중에··· 요원님이 저를 만드셨다고요?=
워낙 벌여 놓은 일이 많았기에 모두 마무리하는 데에는 반나절 넘게 걸렸다.
집에 온 뒤 후라이팬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본래 형태로 돌아갔다. 비록 블레이드의 능력과 기억을 흡수했지만 전면에 나와 있는 것은 800년 유지된 에고 후라이팬의 자아였고, 정체성은 여전히 조리 도구에 가까웠다.
민준도 비슷했다. 기억의 일부를 되찾는 중이지만 그는 여전히 그였다. 다만 잊었던 정체성이 점차 섞이고 물드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민준은 알게 된 것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난 뒤 마도구는 충격에 빠졌는지 한참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파를 흘리며.
=···음, 그, 정리해 보면 저는 요원님이 동족들을 깨우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라는 거군요?=
다소의 의문이 묻어 나왔지만, 곧 나름의 결론을 낸 것 같았다.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를 구원하고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일 테고요? 그렇지 않으면 제게 그런 사명감이 왜 깃들어 있는지 설명할 수 없으니 말입죠.=
그것을 카바이트는 세계의 멸망으로 해석하는 모양이었지만, 민준은 구태여 그 이야기까지 언급하지는 않았다. 아시프-1을 탄압하고 검거하기 위한 구실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시작부터가 거짓으로 점철된 짐승들이다. 요사스러운 망언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 생각하는 와중 후라이팬이 한마디 덧붙였다.
=음,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요원님은 형님이라고 부르기 꺼려졌습죠.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손에만 쥐면 나이 가리지 않고 남자는 형님, 여자는 누님으로 불러 댔지만 정작 바뀐 주인인 민준은 절대 그렇게 부르지 않았던 것을 그는 기억해 냈다.
뭐, 우연이겠지만.
=그렇다면.=
후라이팬의 정신파에 갑자기 진중한 감정이 섞인다.
=이쯤 되면 요원님과 저 사이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민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소리야?”
=저··· 그러니까.=
잠깐의 침묵 뒤, 후라이팬은 아주 어렵게 의미의 뭉치를 굴렸다.
=···아빠?=
“······.”
공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후라이팬은 관계 재정립은 나중으로 미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첫 만남 때처럼 바닥에 집어 던지지 않는 것만 해도 엄청난 관계 개선이다. 그 사실에 실망감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후라이팬은 더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더 많은 달란트가, 더 많은 파편이 필요해.”
종국적으로 그가 꿈꾸는 것은 아시프-1을 처음 창조했을 때의 계획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족을 깨우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위원회 놈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으니까.”
물론 동족의 피나 아시프-1의 파편을 냉큼 제출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민준이 목표로 하는 노선은 명확하게 바뀌었다.
=무엇을요?=
쉽지 않을 것이고 오래 걸릴 것이다.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민준은 고대 종족으로부터 받은 것을 그대로 갚아 주려는 의지를 단단히 새겼다.
태초의 종족은 800년의 간극을 넘어 다짐한다.
“충격과 공포를.”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