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23
124. 드래곤이 새끼를 숨김 (1) >
엘라후-프라가 교단의 사제는 감동을 느꼈다.
그의 앞에는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 물결을 만들며 흘렀다. 영혼을 숭고하게 씻어 내는 듯한 격류였다. 보이는 모든 것이 신혈이었다. 불신자들이 달란트라는 거짓된 이름으로 부르는 물질. 교단이 섬기는 신의 증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세례를 받은 뒤 몇 번이나 봐 온 풍경이었지만 여기 올 때마다 그는 퇴색되지 않는 전율을 느꼈다. 지금은 영혼 상태라 불가능하나, 유체 이탈을 끝내고 육신으로 돌아가면 뜨거운 눈물을 터뜨릴 것이다. 그와 동료 사제들이 항상 그러하듯, 감격에 겨워. 목이 메서. 충만함에 복받쳐서 말이다.
‘아름다워.’
사제는 지금 교단이 그 이름을 따 온 장소에 있었다.
태초의 종족이 거한 곳.
엘라후-프라가.
‘갖고 싶다.’
사제는 홀린 듯 영체를 움직인다. 손을 뻗으려고 했다. 아득한 색채의 향연을 향하여.
하지만 안 될 일이다. 흐려지려는 정신을 단속했다.
‘당분간 신혈을 머금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죄인의 업보였다.
지구라고 불리는 차원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종말 후 영원을 갈망한 그는 교단을 배신했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많은 신혈을 이곳에서 채취한 것이다.
예측 대비 달란트 채굴량이 항상 부족한 것은 위원회에서도 인지하는 사실. 하지만 급격한 변화 때문에 그들은 기겁하여 각종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단은 한시적으로 신혈을 머금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 시점에서 위원회를 더 자극하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고, 그때 뭉텅이로 줄어든 달란트만큼 자연스레 생산량이 증가하면 위원회도 의심을 거둘 것이라 기대한 것.
‘어차피 그들은 이곳, 상류(上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고 알아낼 능력도 없으니.’
사제는 빛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았다.
저 아래, 신혈이 만드는 강의 하류(下流)를 따라가다 보면 간악한 불신자들이 지키는 문이 나온다.
불경하게도 채굴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곳이.
얼마 전 닦달을 당한 조폐국은 그 문을 넘어 수색대를 파견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 것. 압박감 때문에 그들은 긴 세월 항상 실패했던 시도를 되풀이했다. 어리석게도.
결국 그들 중 누구도 이곳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오지 못했다.
=사제님!=
그때, 자신을 부르는 정신파를 느꼈다. 고개를 돌리니 동족의 영체가 있었다.
=윰투스 사제!=
그가 여태 이곳에서 기다리던 상대였다.
위원회가 절대 도청할 수 없는 통신 방법을 궁리하던 그들은 이 방법에 착안했다. 유체 이탈 상태로 엘라후-프라가에서 접선하는 것.
=화신께서는 어떠하신가?=
윰투스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정신파에서 만족감이 묻어나왔다.
=그분은 나날이 위엄과 영광을 더하고 계십니다. 그 덕분인지 곁에서 모시는 저의 영혼도 충만해지는 느낌입니다. 참으로 복된 일이지요.=
=그쪽 세계 생활은 버틸 만한가?=
=버티다니요! 부끄럽게도 고난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매일매일 공부와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같은 신을 모시는 이종족들이 그들의 방법으로 신앙을 표하는 모습을 관찰하노라면, 머릿속 혼란함은 사그라들고 청명함이 차오르며 그저 감탄하게 됩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아니, 그쪽 신도들과 같이 예배라도 보는 겐가? 위원회 눈을 피해야 하니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화신께서 안배해 주신 덕분에 다양한 교보재와 종교 홍보물을 접하고 있습니다.=
=허, 죽은 죄인이 그래도 전도 활동은 게을리하지 않았나 보군.=
고향 차원의 안부까지 물은 뒤, 윰투스는 본론을 꺼냈다.
=그럼, 화신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상대는 영체 상태였지만 깊이 몸을 숙이며 예를 표했다. 경청을 시작한 그 앞에서 윰투스는 말했다.
=예정되었던 의식 준비는 잠정적으로 보류하라 이르셨습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추가적인 신혈 채취가 불가능했으니까.
=그리고 화신께서는 태초의 종족을 믿는 자들에게 한 가지 임무를 내리시려 합니다.=
=······?!=
사제의 두 눈이 빛났다. 화신은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뒤 그들 종단에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윰투스가 말했다.
=저희는 지금부터, 모차원 제단에 모아 놓은 신혈을 그분에게 전할 방법을 궁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준이 전한 과제였다.
사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만큼 많은 신혈을 도약선으로 운반했다간 발각될 것이네.=
=네, 불신자들이 눈치채겠지요. 그러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사제들을 동원해서 유체 이탈로 옮기는 방법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한 사람 영혼에 담을 수 있는 양이 한정되니까요. 무시하고 한꺼번에 많이 옮겼다가는 그 죄인처럼 되겠지요.=
=아니면, 화신께서 우리 차원에 강림하는 방법은 어떤가? 제단이 있는 장소에 말이야.=
윰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그분은 지금 다른 차원으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 하십니다.=
현재 그들의 모차원은 제한적으로 락다운을 풀긴 했지만 통행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들 동족이 아닌 누군가 그곳에 진입한다고 하면 위원회가 주목할 수밖에 없다.
=어려운 문제군.=
문제는 한 가지 더 있었다.
화신의 존재가 신학적으로는 입증되었으나, 교단 대부분의 사제들은 아직 그의 실체를 직접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민준을 위해 교단이 오랜 세월 축적한 신혈을 모두 넘기라는 명령에 분명 반발하는 사제들도 나올 것이다.
=최선을 다해 보겠네.=
사제는 무거워진 마음과 함께 돌아갔다.
***
“선아야, 시간이 되었다.”
최선아는 파리해진 얼굴로 양부를 보았다. 최판석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온화한 표정이었다. 처가 죽은 뒤로는 오직 그녀 앞에서만 보여 주는 얼굴.
“그분께서 시키신 일이 있지 않니? 지금쯤이면 다시 예지가 가능할 것 같은데. 어서 해 보자꾸나.”
말투는 평범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상한 점을 찾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말의 내용은, 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절대 뱉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분을 실망시키면 안 되니 최선을 다하는 게 좋겠다.”
양부는 여전히 그 남자에게 세뇌당한 상태다.
최선아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동료 의원이나 보좌관 등 주변인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예민준과 관련 없는 영역에서 그의 언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일과를 처리하는 데에도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둘만 남았을 때, 오크는 수양딸의 감시자가 된다. 그를 세뇌한 남자의 충실한 종이 되어.
최판석은 민준에 대한 무조건적이고도 비이성적인 신뢰를 품고 있었다. 최선아는 그 태도가 신실한 종교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소름이 끼쳤다.
“···네, 할게요.”
착잡한 심정을 억누르며 눈을 감는다.
며칠 전 더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음을 안 최선아는 민준의 명령에 수긍했다. 그가 원하는 건 특정 조건이 실현되는 미래를, 거기까지 도달하는 경로를 찾는 것이었다.
최선아는 민준에게 설명했다. 그런 조건은 매우 간단하고 직관적이어야 한다. 그녀가 ‘자신이 생존할 수 있는 미래’를 시뮬레이션한 것처럼.
그 말을 들은 민준은 조금 고민했다. 최선아의 능력은 만능이 아니었다. 그가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잡는 미래까지는 봤지만 그다음 파국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그녀가 살기는 했지만 해석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교함을 더하기 위해서는 다각도로 실험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떤 미래를 찾아내도록 시킬 것인가?
‘민준이 승리하는 미래’, 혹은 ‘동족들이 모두 깨어나는 미래’ 등을 떠올렸지만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았다.
고민 끝에, 민준은 명령했다.
-위원회의 몰락을 내가 지켜보는 미래를 시뮬레이션해 봐.
그런 사건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어차피 태초의 종족이 깨어나야 한다는 계산을 하고 시킨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최선아가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대체 저 남자는 뭘 위해 움직이고 있는가? 그런 미래를··· 왜 봐야 하는가?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부녀가 살 수 있으니까.
“······.”
양부의 시선을 받으며, 최선아는 예지에 집중한다.
이미 몇 차례 시도했지만 또렷한 영상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단순히 능력 통제에 실패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런 미래가 절대 오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지를 멈출 수는 없었다. 민준에게는 기억을 읽는 능력이 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걸 들킨 순간 대가를 치를 터다. 그 남자가 필요하다고 여긴 순간 얼마나 잔혹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최선아는 알았다. 이미 예지했으니까.
몇 번 실패한 그녀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위원회의 붕괴라는 사건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민준이 붙인 조건이 하나 더 있다. 그가 그 상황에 건재한다는 조건이. 적어도 그 장면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최선아는 머릿속에 주사위를 한 개 더 굴린다. 인과를 잇는 실이 한 줄기 더해졌다. 이런 식으로 조건이 늘어날수록 예지는 힘들어진다. 하지만 그만큼 구체화될 것이다.
위원회의 붕괴.
예민준.
이 두 가지 요소를 굴리며 미래를 응시한 순간.
“크윽!”
그녀는 입술 사이로 신음을 흘렸다. 오크가 당황한다.
“괜찮니, 선아야?”
목소리에 실린 애정과 걱정은 진실이었다. 세뇌를 당했으나 감정까지 통제된 것은 아니었기에.
“···으으윽!”
그녀의 이마에 실핏줄이 돋아났다.
“이, 이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꺄아악!”
“선아야!”
비명이 공기를 찢는다. 오크 앞에서 수양딸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눈이 뒤집힌 채, 귀신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선아야, 정신 차려라. 선아야!”
이런 반응은 벌써 두 번째였다.
양부의 품 안에서 예지능력자는 몸을 떤다. 금이 가고 반쯤 부서져 내린 듯한 표정으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아빠.”
예지 능력으로 본 미래는 해당 사건을 인지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선명해진다.
예를 들어 내년에 단 한 사람만 알게 되는 개인적인 일보다, 그때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일이 더 잘 보이는 것.
그리고 지금 최선아가 본 미래는.
“···너무, 많아요.”
“그게 무슨 말이니?”
방금 응시했던 미래의 정보는, 그녀의 인지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했다. 폭력적으로 뇌를 짓누르던 무게. 지나치게 선명해서 오히려 많은 것을 놓쳤다.
두려움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마도.”
잠시의 망설임.
음울하게 읊조린다.
“이 미래가 정말 실현되면··· 차원계의 모든 사람이, 모든 종족이 영향을 받게 될 거에요.”
오크는 그것이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위원회의 붕괴라는 대사건이니까.
그런데 왜 이리도 딸이 힘들어하는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
“저를 이번 용족 회의에 초대한다고요?”
배석한 블레어를 의식하며 민준은 말을 높였다.
갑자기 젠킨슨 타워로 와 달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이거였다. 긴 공백을 끝내고 마침내 재개될 드래곤의 회의. 그곳에 민준이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블레어를 통해 전달된 드래곤 로드 비서실의 메시지였다.
폴리모프한 젠킨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지금 안건으로 올리려는 사건 대부분에 자네가 깊이 관여했지 않은가?”
젠킨슨이 말하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용이 용족을 말살하기 위한 바이러스를 개발한 사건.
그 바이러스를 보관한 용의 레어가 털린 사건.
용이 용을 살리려고 용을 납치한 사건.
용과 외계 거미가 섞인 괴물이 발견된 사건.
모두 용족과 밀접히 연관되었으며 심각도가 높다. 당연히 회의에서 언급되어야 할 안건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 사건이 전부 민준에 의해 해결되었다는 점이다.
젠킨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나도 아네. 이 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이 다른 종족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
민준은 지구에 온 뒤도 이리저리 용족과 엮였다. 덕분에 그들의 모임에 초대받은 경험이 없지는 않다. 다만, 그중 가장 성대하고 큰 행사라고 해 봤자 드래곤 로드의 이혼 축하 파티다.
용족 회의는 그런 것과 차원이 다름을 여기 모두가 알았다.
말 그대로, 지구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드래곤이 모인다.
극동아시아 재벌 총수가 된 드래곤부터, 히말라야에서 은둔 생활을 즐기는 드래곤까지. 엘더 드래곤 사이에서도 나이 때문에 존경받을 정도로 오래 산 용은 물론, 막 헤츨링 티를 벗은 젊은 용까지 아우르는··· 그들 모두가 말이다.
그 장관을 상상한 민준은.
“······.”
저도 모르게 가슴 속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든든하다. 그것은 일종의 향수(鄕愁)였다.
상상해 본다. 큰 용, 작은 용, 굵은 용, 가느다란 용, 늙은 용, 어린 용, 뿔 달린 용, 날개 없는 용, 땅 파는 용, 지느러미 달린 용···.
그 모두가 무리 지어 모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
‘그래, 난 너무 오랫동안 그런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어.’
그리 생각하며 말한다.
“전 괜찮습니다. 참석하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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