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40
141.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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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는 쇼핑광이다.
그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별일 없을 때나 오만 것들을 오만 경로로 사들이기를 즐겼는데 요즘은 특히 슬픔과 우울 때문에 충동구매가 잦았다. 자신의 고용주가 정말 은퇴를 고려하는 것인지 걱정될 정도로 이민국 일에 건성이기 때문이었다. 입으로는 일하기 싫다고 연신 투덜거리지만, 일단 착수하고 나면 워커홀릭에 가까웠던 민준이 말이다.
그가 은퇴하면 두 사람의 고용 관계 역시 종료될 확률이 높았다. 둘을 연결 짓는 고리가 그만큼 약해지는 것이다. 그런 가능성에 착안하고 의기소침한 캐시는 요즘 부쩍 쇼핑에 쓰는 돈이 늘었다. 그 과정에서 분풀이를 하듯 별 쓸모 없어 보이는 것도 잔뜩 사들였는데, 얼마 전 술에 잔뜩 취한 채 살아 있는 알파카 한 마리를 샀다가 다음 날 문 앞에 배달된 짐승을 보고 기겁한 이후로는 자중하던 참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쇼핑의 메카, 홍콩에 와 있었다.
“여기 너머로는 차가 못 들어갑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택시 기사에게 지폐를 건넨 후 캐시는 차에서 내려 걸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의욕이 넘치는 상태였다. 남의 돈으로 쇼핑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좀처럼 없기는 하다. 캐시가 홍콩에서 살 물건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캐시는 민준의 지시한 무언가를 구매하기 위해 며칠째 홍콩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중이다.
그녀는 좁은 골목을 걸었다.
침사추이의 화려한 명품 거리에서 몇 발짝 떨어지자마자 분위기가 급격히 변했다. 가짜 롤렉스 시계를 손목에 주렁주렁 매단 오크가 다가와 어설픈 영어로 판촉을 한다. 그녀가 사야 하는 건 물론 이런 게 아니었다. 무시하고 쭉쭉 나아간다. 주말에는 집 밖으로 쫓겨나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입주 가정부 발리엔들이 박스를 깔고 모여 앉은 장소를 지나고, 가로등이 대폭 줄어든 골목에 진입하자 분위기가 한 번 더 변했다.
소음은 줄어들고 음침한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길가에 쓰러져 있던 주정뱅이들과 거지들이 이젠 보이지 않았다. 그런 자들이 견딜 수 없는 거리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노점상들 눈빛이 더 흉흉해졌고 파는 물건 역시 엉터리 최음제와 성분을 알 수 없는 발기 부전 치료제 따위에서 더 위험해 보이는 하얀 가루 같은 것으로 변했다. 매대를 펼치는 대신 은근히 다가와 품에서 꺼내 보인다.
캐시는 그들 역시 무시하고 계속 나아간다. 미궁에 가까운 골목을 관통했다. 복잡한 거미줄처럼 얽힌 거리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어이, 뭘 찾아?”
악취 가득한 골목에서 막 코너를 돌던 순간 누군가 그녀를 막아섰다. 여기부터는 사람 하나가 변을 당해 시체로 실려 나가도 경찰이 추적할 수 없는 구역이라는 뜻이었다. 캐시는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동시에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바빠.”
눈동자에 욕망이 번들거리는 젊은 인간들. 한눈에 봐도 그저 그런 애송이들이었다.
이 거리를 장악한 조직의 실세들은 캐시 같은 이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 이런 위험한 곳을 여자 혼자 돌아다닌다는 건 둘 중 하나였으니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살 기도자이거나,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거나. 어느 경우라도 영양가 있는 표적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저들은 그 정도 분간할 머리도 없는 머저리들이라는 뜻이다.
“나는 시간 많은데.”
놈들 중 하나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겨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한 것이다. 우습게도.
그들이 퇴로를 막으며 캐시를 둘러쌌다.
“이 시간에 혼자 이런 데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아무도 안 가르쳐 줬어?”
“멍청하면 몸이 고생이지. 아니면, 이런 고생을 즐기는 편인가?”
“자, 일단 가진 것 다 내놓고···.”
키득거리며 말을 잇는다.
“그 다음에 뭘 할지는 천천히 의논해 볼까?”
뒷배도 없으면서 생각보다 더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캐시는 그들의 얼굴에서 마약 중독자의 특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애초에 지갑을 던져 준다고 순순히 보내 줄 작정도 아니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캐시는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방금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바빴다.
“······!”
그녀의 입술이 열리고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를 이는 없었다.
민준은 캐시의 마법이 보잘것 없다고 평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에서 내린 평가다. 외계인 때려잡기에는 부족한 수준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할 정도는 되었다.
“마, 마법사!”
“씨발! 찔러···!”
그 순간.
화르륵!
“으아악! 눈! 내 누우운!”
그녀는 민준에게 배운 대로 놈들 눈에 불부터 붙였다.
‘쪽수 많은 놈들이 귀찮게 굴면 일단 눈깔부터 태워. 그게 직빵이야.’ 고용주의 가르침은 언제나 옳았다. 깡패들은 비명을 지르고 호들갑을 떨면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다가 균형을 잃고 쓰러져서 바닥에 뒹굴고 몸부림을 쳤다.
그들은 안구를 덮은 것이 진짜 불같이 생겼지만 온도는 터무니없이 낮다는 걸 알지 못했다. 온수에 적신 수건 이상으로 뜨거운 물건과 닿아 본 적이 없는 부위이고, 몸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기 때문에 실제 온도 이상으로 뜨겁게 느끼는 것이다. 공포는 감각을 엉망으로 헝클어뜨렸다.
놈들을 그대로 둔 채 캐시는 여유롭게 걸어서 골목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곳곳에 숨어 자신을 관찰하고 있을 자들이 이 장면을 똑똑히 보았으리라 확신했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가로막으며 ‘검증’하려는 문지기는 보이지 않았다.
“꽤나 소란스럽게 등장하셨군.”
어두침침한 사무실에서 중년 남자가 그녀를 맞이했다. 캐시는 상대가 홍콩 뒷골목을 장악한 조직의 중간 간부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며칠 동안 상대와 같은 자들을 만나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를 위해.
“사고 싶은 게 있어.”
이런 밑바닥에서 훑어야지만 구할 수 있는 물건도 있다. 정재계를 지배하는 드래곤들이 미처 관심을 두지 못하는, 어두컴컴한 그늘에서.
본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적당히 변신한 캐시가, 요 며칠 의욕적으로 찾아 헤매던 쇼핑 아이템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잘 찾아왔군.”
캐시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드디어!’
하지만 얼굴에 표를 내지 않고 되묻는다.
“누가 주워 갔을까 궁금했는데 그쪽 조직이었네?”
“ICC 빌딩 잔해 수습에 고용된 컨트랙터가 우리 식구였거든.”
남자의 눈빛이 변한다.
“우리도 리스크를 각오하고 파는 거야. 드래곤들이 큰 관심 안 보이는 부스러기라서 빼낼 수가 있었지만 들키면 이야기가 달라져. 모르면 모를까, 알게 되면 그때부터 불덩이가 쏟아질 거야.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연관된 놈들을 전부 구워 버릴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상품의 가격을 언급하기 전에 밑밥을 깔고 있다.
“그래서, 물건은?”
남자는 태블릿 컴퓨터를 켜서 만지작거리더니 그녀에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조각난 콘크리트 잔해로 보이는 물건의 사진이 있었다.
캐시는 그 끝에 맺힌 붉은 얼룩에 주목했다.
“확실하지?”
“그래, 이미 마법으로 확인했다. 그건 인간의 피가 아니야.”
남자가 눈을 빛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의 핏자국이야!”
로드가 사망한 ICC 빌딩의 폐허를 정리할 때, 드래곤들은 마법 외적인 부분의 작업을 다른 종족에 일임했다. 쓰레기 청소를 비롯한 자질구레한 일까지 드래곤이 직접 손을 댈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들에게 넘기기 전 로드의 시신을 비롯한 일체의 ‘유산’은 철저하게 챙겼지만, 개중엔 용들의 시선을 피한 것도 있었다. 파편 따위에 흩뿌려진 아주 작은 핏자국 같은 것이 그랬다. 생기가 남아 있는 용혈이라면 한 방울이라도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지므로 악착같이 챙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말라 버린 혈흔은 마법 촉매로서 가치가 전무하다. 드래곤들은 그런 것까지 집요하게 관리하지 않았다.
민준은 그 틈을 파고든 하이에나 같은 존재들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예상이 맞았음을 캐시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홍콩 부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걸 찾고 있지. 이만한 부적도 없단 말이야.”
현실과 환상 사이 벽이 무너진 1945년 이후 미신의 경계는 항상 불확실했다. 용의 지혜와 힘, 수명을 닮고 싶은 부유한 노인들은 고룡의 피가 묻은 돌덩이를 천만금을 주고서라도 구입하고 싶어 했다. 마법사들이 그 효용을 부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의사나 과학자 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법사 말이라고 믿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항상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캐시는 그런 부자들에 의해 고용된 이처럼 연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지?”
남자는 말도 안 되는 거액을 불렀다.
캐시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마법적 가치가 전무한 저런 핏자국에 아파트 몇 채 값을 부르다니··· 이 도둑놈들.’
애초에 저런 쓸모없는 물건을 민준은 왜 원하는 것일까?
그 의문은 일단 머릿속에 잘 묻어 두었다. 어쨌든 지금은 시킨 일을 할 뿐이다.
“좋아.”
거래는 성사되었다.
***
“그렇소. 고맙게도 둘 다 제 발로 기어들어 왔지. 이미 저택 안에 와 있으니 오늘 안에 결과를 알려주겠소. 이 대화를 끝내는 즉시 그들에게 거래를 제안할 거요.”
=······.=
“아니, 그 말에는 따를 수 없소. 그중 하나는 드래곤이며 모두의 시선이 몰린 고인의 아들이기도 하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원회의 사유 재산이야. 죽였다간 그 여파를 어찌 감당하라고? 최대한 좋은 말로 구슬려야지. 통하지 않으면 좀 더 강경한 방안으로 넘어가면 그만이오. 그러나, 어떤 조건하에서도 그들을 해치는 걸 불가한 일이야!”
=······.=
“아직도 나를 못 믿나? 없었소. 대체 몇 번을 더 말해야 하오? 나 또한 고룡이며, 로드의 유산 목록 작성에 증인으로 참석했지.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어! 로드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을, 수백의 드래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오. 그리고 그가 죽은 자리, 그 잔해를 수색하는 주문 역시 수백의 드래곤이 동시에 펼쳤지. 혹시라도 분실되는 유산이 생길까, 탐욕에 불타오르는 상속자들과 보호자들이 몇 번이고 재확인했어. 그런데, 그것만환영처럼 증발해 버렸단 말이오!”
=······.=
“이미 교차 검증을 마쳤소. 레어도 정밀 수색을 마쳤고. 아직 우리가 확인 못 한 곳은 단 한 군데밖에 없어.”
=······.=
“그래야 하오. 그는 그날 내게 말했소. 그 아티팩트를 새로 태어날 자신의 자식을 위해 선물할 것이라고. 그리고 내 앞에서 그것에 마법을 걸었지. 복잡한 수식이었지만 내 감각을 피하지는 못해. 그건 용혈(龍血)에 반응하는 마법이었어. 그것도 특정한 혈통에.”
=······.=
“엔델리온의 아티팩트는 사용자에게 한번 각인되면 영구 귀속되지. 혹시라도 부화할 자식이 그걸 손에 넣기 전에 다른 엉뚱한 용에게 각인되는 걸 피하기 위해 마법을 건 거야. 그 물건을 탐탁지 않게 여긴 어미가 다른 경로로 처분할 수도 있으니 말이지. 오직 그 아이만이 아티팩트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손을 쓴 거요.”
=······.=
“맞소. 아직 부화하지도 않은 드래곤 피에 반응하는 주문을 걸 수는 없으니 조건을 조금 바꾼 거지. 자기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만이 그 주문에 반응하고, 아티팩트의 영구 각인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주변에 그런 아이가 있는지 탐색하는 기능까지 넣은 부분이오. 이제 내 말이 이해되오?”
=······.=
“그래, 그러니 그것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해.”
=······.=
“기다리시오. 오늘 안에 좋은 소식을 듣게 될 테니.”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