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55
156.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28) >
***
세상에 존중받지 못할 드래곤은 없다.
고룡, 젠킨슨의 오랜 신념이었다.
종족의 고귀함을 부르짖는 다른 드래곤들과 별다를 바 없다는 반문이 가능하겠지만, 젠킨슨의 경우 결이 조금 달랐다.
대다수 드래곤은 용족의 우월함을 설파한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모든 지성체가 존중을 받아 마땅하기에 드래곤 역시 그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쪽에 가까웠다.
다만 그가 하는 행동의 결과가 만인에게 평등한 방식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모든 종족을 위해 같은 크기의 노력을 기울여 옹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간 단체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일하듯, 그에게는 드래곤의 이익을 대변할 의무가 있었고 평소 그런 선택에 주저가 없었다.
따라서 알을 품은 드래곤이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는 그쪽을 먼저 돕는 것이 맞았다. 평소였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터.
민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말이다.
고뇌하던 젠킨슨은 최종 결정을 위해 평소와 같은 방법을 택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에 똘똘 뭉친 동족들과는 달리 그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만약, 내가 나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젠킨슨 역시 지원군을 불러야 한다.
먼저 그는 민준을 구하기 위해 다른 누가 나설지 자문해 보았다. 답은 빠르게 떠올랐다. ‘그럴 드래곤은 없다.’ 설사 그를 지지하는 용족이라고 해도 선거에 표를 던지는 것과 고룡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위험에 손을 대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럼, 이나이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번에도 답은 명백했다. ‘그럴 드래곤도 없다.’ 로드 자리가 빈 지금 그녀를 위해 나설 동족은 존재치 않는다. 드래곤은 그런 종자들이다. 오히려 몇몇은 반길 것이다. 부화도 못 한 알 속의 아이가 그대로 죽어 없어지는 편을.
‘하지만.’
젠킨슨은 되뇐다.
하지만, 드래곤 말고는?
‘이나이스를 도울 드래곤은 없다. 하지만 다른 종족 중에는 있다.’
후자의 경우, 그러니까 이나이스의 구조를 위해 젠킨슨이 부탁하면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내밀 친구를 그는 알았다.
이미 쌓인 빚을 다 갚지도 못했는데 또 부채를 늘릴 거냐면서 비아냥거리면서도 결국은 도와줄 이를.
‘지금 어떤 처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다면··· 아직 그 친구 전력이 남아 있다면 그쪽 상황이 정리된 뒤 이나이스 쪽을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알을 품은 드래곤과 달리, 민준은 가능한 상황이라면 적절한 대가를 빌미로 도와줄 것이다. 그녀를 아껴서가 아니라 젠킨슨의 부탁이기에. 에델리네스와 장태준 건, 레어 도난 사건, 창천 건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나서 준 것처럼 말이다.
그사이 이나이스 쪽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지만, 현 상황을 모르는 이상 도박을 걸어 볼 수밖에 없다.
‘민준 쪽을 먼저 확인한다.’
젠킨슨은 그와 수백 년의 신뢰를 쌓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팟!
섬광과 함께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목 타는 갈망 속에서 민준은 망령들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의 주변을 감싼 어둠은 여전히 출렁거렸다. 다만 목덜미의 상처는 아물고, 거기에서 그 이상의 내용물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죽은 토드족의 정신을 한참 뒤적거리던 그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휙, 고개를 돌린다. 공간 응결은 해제한 상태였다. 이 공간을 바깥과 격리시킨 것은 엔델리온의 마도구가 아니라 민준이 풀어 놓은 어둠이었다.
그 너머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본래 근처에 없던 것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걸 알아챈 민준을 엄습한 것은, 동토(凍土)를 온기로 적시는 감각이었다. 얼어붙었던 세포에 활기가 도는 듯했다. 그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뺨을 당기며 이빨을 드러낸다.
민준은 흥분 속에서 웃었다.
“···용 냄새!”
***
젠킨슨은 당황했다.
“···이게 대체 뭐지?”
다급했던 그는 고룡의 본체로 상태로 서울 도심에 나타났다. 민준의 상가가 있는 그곳이었다. 가뜩이나 기이한 현상 때문에 시민들을 긴급하게 대피시키던 경찰과 군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고룡 때문에 기겁했다. 그들은 저 드래곤 역시 자신들만큼이나 놀랐다는 걸 몰랐다.
“그림자 괴물?”
근원은 비슷해 보였지만 뭔가 달랐다.
훨씬 깊고도 농밀한 어둠.
민준의 상가를 둘러싼 검은 물질은 반구 형태를 만들며 사방을 덮고 있었다. 고룡인 젠킨슨도 그 안에 진입하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로.
그때였다.
“······?!”
화아앗!
급작스러운 밀물처럼 어둠이 부피를 늘렸다. 그리고 젠킨슨은.
“크윽!”
미처 도망칠 틈도 없이 그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곧이어 감각이 혼란스럽게 명멸했다. 젠킨슨의 2천 년 생애를 통틀어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현상이었다. 긴장 속에서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건 그림자 괴물과 비슷하다. 그럼 적이 아니라 민준이 펼친 마법인가? 이런 주술은 처음 보는데.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거겠지? 그럼 적 또한 이 안에 있을까. 그런데 나까지 이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분명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 터!’
민준은 위험에 빠져 있고, 젠킨슨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둠을 조종하는 것이 민준이라면, 젠킨슨을 이 안으로 끌어들일 다른 이유를 고룡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는 조심스레 통신 마법을 읊었다.
=민준, 어디에 있나? 내가 도와주겠네!=
대답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돌아왔다.
“아, 민준!”
기이한 감각이었다. 여전히 어둠은 꿈틀거리며 사방을 메우고 있지만, 그 속에서 갑자기 민준이 나타났다. 그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민준?”
그는 조심스레 묻는다.
“괜찮은 건가?”
거하게 싸우기 위해서 자기 팔 하나 정도는 자르고 시작하는 것이 양반인 민준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별 상처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대규모 주술을 만든 것 치고는 의외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민준은 담담하게 답했다.
“있었지만, 다 치료했어.”
“아, 그랬군. 그렇게 빨리 재생되었으면 큰 부상은 없었던 게군.”
젠킨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친구 안위에 큰 이상은 없었던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었나? 누가 공격해 왔던 거야?”
민준의 눈에서 기묘한 빛이 번뜩였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것들이었어. 이미 모두 처리했어.”
젠킨슨은 의아해했다. 저 정도로 가치 절하될 자들이라면, 민준에게 원한을 품은 흑마법사 학파라도 왔던 건가?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모양이다. 신종 자살법이라고 치부해도 될 정도로.
주변을 감싼 거대한 흑마법은 어쩌면 다른 흑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한 조치였을지도 모른다.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흑마법사는 다른 마법사의 흑마력을 흡수하기도 한다는 것을 젠킨슨은 떠올렸다. 민준이 선호하지 않는 주술이긴 한데,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까지 확인하고 나니, 용의 머릿속에 다른 용건이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고룡은 마지막으로 다시 확인한다.
“정말로 괜찮은가?”
그 말을 들으며, 민준은 기묘한 표정으로 젠킨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집요한 시선이 거대한 화룡의 본체를 훑는다. 머리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눈이 마주쳤다. 속으로 되뇐다.
딱, 2천 살 정도 먹은··· 드래곤.
목이 따갑다.
“다행이군. 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르겠네.”
안도감 섞인 목소리.
용의 그릉거림이 민준의 귀를 즐겁게 했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처럼 들린다. 향수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운 시절.
평화롭게 용을 치고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이 주변의 그림자 괴물 비슷한 것도, 전부 자네가 소환한 게 맞지?”
평화롭게 용을 잡고 살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역시 그랬군. 다행이네, 정말 다행이야. 저··· 그런데 말이야.”
민준은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는 드래곤의 목울대를 바라보았다. 저 비늘 한 장을 뜯어내면 그 아래에 숨어 있는 촉촉한 살결이 그리웠다. 어디의 비늘을 뜯어내야 피를 뽑기 가장 적합한지 그는 알고 있었다.
한 걸음 걷는다. 젠킨슨을 향해 다가갔다. 허기가 내장 속에서 꿈틀댔다. 견디기 힘든 공허함이었다. 맥동하는 충동이 그의 목을 짓눌렀고, 떨칠 수 없는 갈망이 그의 머리를 흔들었다.
“이나이스는 자네도 알지? 그녀의 레어가 위치한 밀림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타고 있다네. 통신이 불가능한 상태라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어.”
꿈틀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을 응시한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다. 경동맥에 닿으려면 딱 이십오 센티미터면 충분하다. 그 정도의 깊이로만 찔러도 힘차게 박동하는 혈관에 닿을 수 있다. 쏟아져 나오는 따스한 선혈이 신기루처럼 혀끝에 맴돌았다.
민준은 원했다.
이 순간, 무엇보다 간절하게.
“자네도 알겠지만 다른 드래곤들에게는 도움을 청할 상황이 못 되네. 반려이자 아이 아버지인 로드가 살아 있었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만···. 더군다나 그 자리가 공석이라 강제력을 행사할 주체도 없어.”
민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색하고 이상했다. 드래곤이 저토록 유창하게 말을 하는 것이.
“그러니 자네가 좀···.”
드래곤에게 저런 언어 능력이 필요한가?
아니, 필요 없지.
그렇게 결정한 순간.
“······!”
젠킨슨이 여태 들이마신 어둠이 힘을 발휘했다. 고룡의 눈동자가 흐릿해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민준이 말한다.
“자, 이리로.”
슥!
이지를 잃은 채, 고룡은 몸을 바짝 낮춘다. 그의 거체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길쭉한 목을 민준 앞에 눕힌다. 두부(頭部)를 바닥에 댄 채, 편안하게 잘 준비를 하듯이, 두 눈을 스르르 감았다.
무방비한 목덜미.
민준은 손을 뻗는다.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내면에 서서히 균열을 만들어, 종국에는 산산조각을 낼 것 같은 갈증. 그것을 해소할 시간이었다. 바로 앞에 있었다. 용의 피와 고기를 갈망하며, 당장이라도 저 드래곤의 몸을 조각낼 태세로 민준은 손을 뻗었다.
그때, 그의 내면에서 속삭였다.
원래, 세상에 말하는 용은 없었지.
민준은 목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방금 전 토드족의 처분에 대해 협상을 했던 다른 반쪽이다. 그는 무뚝뚝한 투로 대꾸했다.
‘그래, 왜 없었겠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 말을 하잖아? 사고 능력을 방증하는 정교한 언어 능력을 갖추었다고.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초를 치는 격이었다. 민준은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대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강조하며 말한다.
용은 이미 지성을 얻었어.
‘그래, 너무도 손쉽게 빼앗을 수 있는 지성이지’
우리가 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성이고.
‘지성 역시 능력이라고 치면, 위태롭기 짝이 없는 능력이야. 우린 용에게서 지성을 빼앗고, 사육하고, 도축할 능력이 있어. 먹을 능력이 있으니 먹는다는데 뭐가 문제지?’
목소리는 반박한다.
그들은 이미 지성체야.
민준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지성의 기준을 대체 어디에 둘 거냐는 말이다. 생각할 능력이 있으니 먹으면 안 된다니. 우리와 대화가 가능한 정도의 엇비슷한 지성을 갖췄기 때문에? 그럼 물소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는 사자 역시 비난할 텐가? 그 두 생물의 지적 수준은 대동소이해. 비슷한 지성을 지닌 놈들끼리 잡아먹는 거라고. 실로 끔찍한 일 아니야?’
말장난이고, 궤변이야.
‘혹시 다른 이유 때문이야? 그럼 오크가 돼지를 먹는 일 또한 비난해야겠군.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두 종이 지능과 능력의 차이 때문에 포식자와 피포식자로 나뉘는 현상 역시 막을 텐가? 그리고 오크와 돼지의 지능 차는, 사실상 돼지와 바퀴벌레 사이 지능 차에 비할 만하지. 이런 식으로 계속 하향하다 보면 나중에는 아메바의 생존권까지 챙겨 줘야겠군.’
불쾌하다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튕겨 내지 마. 넌 지금 화를 내고 있어. 먹고 싶은데 먹지 못하게 말린다는 이유로.
‘네가 자꾸 타협하려고 들잖아.’
그럼 이건 어때? 하며 목소리가 다른 논증을 내세웠다.
‘뭘?’
넌 이미 스스로 맹세했어. 젠킨슨을 먹지 않겠다고. 그리고 앞으로 용을 먹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겠다고.
‘······.’
민준은 자신이 이토록 화를 내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미 다짐했기 때문이었다.
용의 피로 목을 축이고 싶은 욕구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스스로 족쇄를 채웠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설득했다.
고귀한 자의 말이 이리 가벼이 다뤄져서는 안 돼. 설사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라 할지라도.
‘지성에 우열을 가리지 말라고 설득하더니, 이제는 내 지위의 우월함을 내세워 먹지 말라고 종용하는군.’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떠올려 봐. 네가 마지막으로 맹세를 어겼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지? 넌 동족이 잠든 장소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어. 하지만 그걸 어겼지.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봐.
‘젠장!’
민준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가 읊은 헛소리를 무시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단단한 확신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더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이유는 이미 그 안에 있었다.
먹을 수 없다.
적어도 젠킨슨은, 먹을 수 없다.
미래에 드래곤이라는 종족을 어찌할지 명확한 계획은 아직 없다. 그들 모두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 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현재에 집중한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젠킨슨의 목을 물어뜯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이나이스를 구하기 위해서.”
젠킨슨은 의식의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
이지를 되찾고 그를 바라보는 고룡을 향해, 민준은 약간 뒤틀린 어조로 답했다.
“···그래, 도와줄게.”
고룡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정말 고맙네. 내가 이번 일의 대가로 달란트를···.”
“좌표는 알고 있어. 나 혼자 가겠다.”
고룡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용족의 문제인데 내가 당연히 함께···.”
“거기 있는 놈들이랑 엮이면 너라도 무사할 수 없어. 골치 아파져.”
“뭐? 그럼 자네··· 그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이야기인가?”
대답하는 대신 민준은 손에 쥐고 있던 마도구를 만지작거렸다.
달란트를 주겠다고?
“그리고 대가 같은 건 필요 없어.”
순간 젠킨슨이 노호했다.
“너, 누구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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