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60
161. 죄인이 꿈꾸는 사이 (4)
***
“후보님? 도착했습니다.”
“······.”
“후보님?”
“아, 미안합니다.”
정팔은 시선을 가까스로 핸드폰에서 떼어냈다.
그는 캐시와 메시지를 주고받던 중이었다. 둘이 믿고 따르던 민준이 갑작스럽게 실종되어 행방이 묘연한 상태. 회장 비서와 대면했다는 캐시에게 상황 설명을 들었지만 여전히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 드래곤과 싸워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던 민준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후보님, 이쪽입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대로 이러고 있어야 할 때이기도 했다.
정팔은 그를 기다릴 유권자들을 생각했다. 힘들지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갑시다.”
오크는 등에 기호 1번이 찍힌 형광색 바람막이를 걸치고 차에서 내렸다.
“힘찬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박정팔 후보입니다!”
문을 뚫고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심상치 않은 울림이었다. 인간이나 엘프 같은 종족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트롤 특유의 굉음과도 달랐다.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환영에 화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힘차고 진중했다.
‘이 짓도 하다 보니 느는데.’
새파랗게 질린 서장 얼굴에 사직서를 던졌던 게 언제 적 일이라고, 이리도 빨리 적응한 자신이 신기했다. 웃음을 잃지 않으며 한 명씩 눈을 맞춘다.
예상대로 모인 이들은 전원 오크였다. 그가 속한 집권당은 이 지역구 인간들을 ‘버린 표’로 간주한다. 야당이 내세운 인권변호사 출신 하프 오크가 인간 표를 싹 쓸어갈 것이다.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선거 운동을 진행할수록, 정팔은 이 모든 것이 정책과 비전보다는 오로지 ‘종족’으로 결판 나는 게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진정 모든 중요한 선택 근거를 종족에 두는··· 그리고 그것에 따라 남과 우리를 철저하게 구분 짓는 종(種)의 한계는 극복할 수 없는가?
‘개가 웃고 갈 소리군.’
자가당착이었다.
자신도 결국 오크라는 이유로 공천을 받지 않았는가?
연금 빨리 받는 것을 제외하고 여태껏 종족 덕을 본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싶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드릴 이야기는···.”
짧은 연설이 끝나고 유권자들과 질의응답이 시작되었다. 정책에 대한 질문도 드물게 있었지만 대부분은 오크로서 이 나라에 살기가 얼마나 ‘X 같은지’ 감정 토로에 집중했다. 정팔을 국회의원 후보보다는 동네 아저씨로 여기는 투였다. 오크 특유의 비격식적 연대 의식이 발휘된 결과다.
“인간들이랑 인터넷에서 키배 뜨다 보면 항상 밀리는 부분이 이건데요···.”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는 젊은 오크가 한탄했다.
“원래 지구가 인간들 거였긴 하죠. 그건 팩트잖아요? 그리고 엘프가 이민 올 때는 쇼부 잘 쳐서 손해 안 볼 딜을 걸었구요.”
대기 중 마나 농도가 지금처럼 높아지고, 마법에 의한 대대적인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엘프를 받아들인 1차 집단 이민 때다.
“근데 그 몽당좆··· 아, 죄송합니다. 인간들 이야기가··· 2차 때, 오크들이 이민 올 때는 그런 큰 딜이 없었다는 거죠. 인간이 사기당한 거라고 우기더라고요. 오크는 이 세상에 좆도 도움 안 되고 쓸모도 없다고. 힘쓰는 일 다 인간이 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다시 원래 세계로 쫓아내야 한다고.”
그는 분통을 참지 못하면서 씩씩거렸다. 이럴 때 어떤 논리로 받아쳐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정팔은 신중하게 답했다.
“옳지 않습니다. 이민은 당시 지구인들을 대표한 각국 정부에 의해 협의되고 결정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시대를 사는 인간들의 선조이며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운 후손은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국가라는 유산을 상속할 때 원하지 않는 것만 걷어내고 취사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제2차 집단 이민은 인간들이 선택한 결과입니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선택에 따른 의무이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이구요. 심지어 당시 인간들은 2차 이민에 매우 목말라 있었고 적극적으로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 종족이 오크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매우 당황하긴 했지만.
“우리는 페널티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인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권력을 위임한 대표들이 선택했습니다. 오크는 인간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한 수단도, 사기 계약의 구성 요소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웃입니다. 사람입니다.”
“···사기 계약이 아니면 인간들은 뭘 받았는데요?”
정팔은 잠시 주저했다. 여기부터는 교과서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영역이다.
그는 그냥 애매모호하게 답하기로 했다.
“많이들 간과하는데, 2차 때 인간들은 매우 다양한 형태의 원조를 받아 냈습니다. 그게 충분히 ‘큰 딜’이었는지의 가치 평가가 종종 곡해되는 것이 문제이지요.”
“네···.”
젊은 오크는 생각했다. 정팔의 대답은 정론이지만 냉혹한 인터넷 세계에서 써먹기는 힘들다. 그냥 지금까지 하던 대로 익명의 상대 부모를 해부학적으로 모욕하고, 직업에 대한 억측을 욕설로 풀어내는 편이 좋겠다고 결론 내리며 그는 일어났다.
정팔은 그런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인간들이 받은 것? 큰 딜이··· 있긴 했지.’
그는 수십 년 경찰로 일했고 공무원들 사이 도시 전설처럼 전해지던 공공연한 비밀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2차 이민이 진행된 당시, 그 결정을 내린 한국의 고위 정치인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단 한 명도, 아직까지 사망 신고가 접수된 바 없다.
수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공식적으로 죽음이 확인된 자가 없는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것이 위원회가 준비한 선물 중 하나일 터다. 오크를 지구에 보내기 위해서.
하지만 정팔은 이 사실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저, 후보님.”
핸드폰을 가지고 보좌관이 다가왔다. 정팔이 의아한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정말 급한 용건이라고 합니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캐시다. 정팔은 양해를 구하고 사람 없는 곳으로 갔다.
“무슨 일이야?”
-아저씨, 혹시 은성이한테 연락받은 거 있어요?
“아니? 갑자기 왜?”
같이 밥 먹을 일이 많아서 나름 친해지긴 했지만, 그 유령의 깊은 사연까지는 알지 못한다. 민준에게 빚이 좀 있다는 정도만 들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죽은 사람한테까지 빚을 지우고 그걸 또 착실하게 추심까지 할 수 있는지, 민준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찼을 뿐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하은성이 지금까지 민준 곁에 붙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빚을 갚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민준이 사라진 지금은.
‘그 녀석이 설마?’
수화기 너머로 캐시가 말했다.
-젠킨슨 회장 쪽에서 거처를 옮겨 주려고 했는데, 오늘 하루 종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해요.
***
밤이 내린 숲속에 누워, 그는 과거를 떠올린다.
회상은 주로 스승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이 행성에 사는 사람은 그 혼자이지만 한때는 둘이었다. 그녀가 타계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단둘이 용 목장을 꾸려 나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얼굴을 마주 보고, 같이 밥을 먹고, 간단한 이야기라도 나눌 사람은 서로에게 서로뿐이었다.
애초에 스승이 그를 간택한 순간부터 그녀는 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녀보다 위대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해질 수 없을 것 같던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내면 속에서 질량과 무게를 불려 나가더니, 마침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스승을 떠올리며 그는 오랜만에 깊은 애도와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의 죽음은 믿기지 않는 비극이었다. 스승이 좀 더 늦게 태어났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진짜 영생이 현실화될 것이라 믿었다. 그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크르릉!”
배를 채운 아드키엘이 기쁨의 콧김을 길게 불더니, 주인 곁으로 다가와 웅크렸다. 녀석이 날개 끝을 살짝 그의 손등 위에 올리기에, 호응하여 날개 죽지를 쓰다듬어 주었다. 화로 온기와 주인의 손길을 느긋하게 즐기던 드래곤은 들릴 듯 말 듯 코를 골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녀석은 먼 선조를 쏙 빼닮았다. 그가 처음으로 본 특별한 골드 드래곤, 다시 말해 길잡이 용은 스승이 키우던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는다. 아마, 엘류시드라는 이름이었지.
스승은 전통에 따라, 곁을 지키는 벗에게 숫자로 구성된 인식 번호 대신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게 전통이야. 목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친구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엘류시드라는 이름의 본래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어떤 질문에도 느긋하고도 신중하게, 열의를 담아 답변해 주던 그녀는 그때만큼은 침묵했다.
대신에 그녀의 드래곤, 엘류시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시 시선에서 그는 자신에겐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는 깊은 감정을 느꼈다. 그걸 보니 정체 모를 무언가가 배 속에서 뭉클거렸다.
엘류시드가 죽었을 때 그녀가 어찌나 슬퍼했던지.
당시의 용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긴 했지만, 그래도 수십 년은 더 살 수 있었던 드래곤이 피거품을 물고 싸늘하게 식은 채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얼음 동상처럼 굳었다.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지는 않았다. 스승은 스승답게 사고를 반석으로 삼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긴 세월 연구 끝에 개량된 드래곤들은 독을 품은 양서류 따위를 통째로 삼켜도 중독되지 않는 육신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의 아드키엘처럼 말이다.
“그르릉! 갸릉!”
드래곤의 코골이를 반주 삼아 숲이 노래한다. 한밤중에도 이곳은 절대 고요할 틈이 없다. 이 시간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짐승들의 흔적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간간이 울음이 멎으며 생기는 공백은 바람과 나뭇가지와 이파리의 합주가 채웠다. 그 음률은 골드 드래곤을 위한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했고 근처에 묻힌 스승을 위한 추모곡처럼 들리기도 했다.
생각은 돌고 돌아 다시 그녀를 떠올린다.
유예된 노화는 죽음 직전 몰아닥쳤다. 그때부터 둘은 각종 지식과 금언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지금 와서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릴 때 노인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오는 것은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었다.
당부는 꼭 용에 대한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손에 쥔 것을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해. 넌 한번 움켜쥔 걸 절대 포기하려 들지 않지. 때로는 주먹을 풀고 흘려보낼 줄도 알아야··· 모든 게 자연스레 풀리는 법이야.
선뜻 동의하기 힘든 조언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 그에겐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모든 것은 공용으로 주어졌고,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스승을 따라나선 후에야 자신만의 것이 생겼다.
독점과 소유의 개념을 알고 나니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너, 지금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지? 복잡한 계획을 짜고 있을 테고. 그게 무엇인지 상상할 수는 없지만 부탁할게. 하지 마.
죽음을 앞둔 그녀는 기력이 쇠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그녀의 수명을 ‘억지로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생명력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를 진행 중이던 그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다. 거기까지는 유지에 따랐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죄를 저지르고 만다.
그는 스승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그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
순간, 회상이 끊겼다.
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잠에 빠져 있던 드래곤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자세를 잡고 발톱과 비늘을 세운다. 그러고 나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숲이 침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