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80
181. Love yourself (7)
***
“정신이 드십니까?”
델은 눈을 떴으나 아직 고개를 가눌 힘도 없었다.
그녀는 윰투스에게 묻는다.
“여기는?”
“겔랑코 차원입니다. 차원 도약은 제대로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윰투스가 흥분한 투로 외쳤다.
“참으로 장하십니다. 잘하셨습니다. 엔델리온이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맨몸으로 차원을 넘는 시도를 하다니요. 이것이 바로 믿음의 힘이겠지요!”
인간으로 폴리모프 했지만, 델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민준이 데리고 다니던 세눈박이 외계인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지금 뭐라는 거야?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엔델리온이 종족의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기적이지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그분의 권능 덕에, 공주께서도 두려움을 극복하셨군요!”
몹시 감동한 건 알겠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델은 시선을 돌려서 아래를 본다. 폴리모프가 되다 만 하반신을 눈치채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크윽!’
그리고 신체 내부가 엉망이라는 걸 깨닫는다. 마력이 엉키고 뒤죽박죽이었다. 반향을 참으며 간신히 주문을 완성시켰다. 그러자 촉수 더미로 변했던 하반신이 인간의 형태로 조형되고 의복이 그 위를 덮었다.
“아, 무리하지 마십시오! 제가 신성력을 있는 대로 끌어다 퍼부었지만 아직 제대로 회복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계속 델 곁에서 매달린 탓에 지금 윰투스에게 신성력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델은 현기증을 참으며 물었다.
“···‘그’는요?”
“용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무사해요?”
“네?”
윰투스는 그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냐는 듯 대꾸했다.
“당연히 무사하시지요! 저희가 무사한 것처럼요.”
“그러면 됐어요. 그런데, 이 집은?”
감각 역시 정상이 아니라, 신경에서 뇌로 이어지는 통로가 꼬여 버린 기분이었다. 떠들어 대는 윰투스의 말도 기묘하게 뒤틀리며 울린다.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그녀에게 사제는 그간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녀를 간호하기 위해 슈탄들이 있는 이 저택으로 옮겼다는 것과, 적당한 거짓말로 둘러대며 당분간 여기 머물기로 했다는 부분까지 말했을 때였다.
“···역시, 그랬군.”
그 목소리는 방 안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하은성이 벌떡 일어났다. 윰투스 역시 낭패라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었지만.
‘이런!’
이미 신성력은 전부 소비한 뒤였다. 그 암담한 사실을 재확인한 순간.
쾅!
굉음과 함께, 그들이 있던 방문이 쪼개지며 튕겨 나갔다.
복도에 우뚝 선 그림자. 문을 부순 장본인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랬던 거였어.”
윰투스가 델을 보호하듯 가로막았다.
어둠을 뚫고 흉흉한 살기가 쏟아졌다. 그들을 여기 머무는 걸 허락한 웨폰 마스터. 솔라다가 부서진 문 너머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개의 달빛이 엮인 은은한 광선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음영에 반쯤 가려진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우웅!
그는 한 손에 대검을 들었다. 검날을 따라 푸른 오러가 일렁였다.
‘어떻게?!’
윰투스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신이 자리를 뜨기 전, 분명 저들이 깨지 못하게 저주를 걸었는데!
“혀를 자른 노예는 무슨. 젠장할. 말만 잘 하는군.”
쿵!
웨폰 마스터는 한 걸음을 내디디며 검을 앞으로 내민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미묘하게 둔하고 어설펐다. 귤레쉬가 준 약에 취한 데 더해 저주의 기운까지 남은 것이다.
그런 그가 잠에서 깬 건 여러 요인이 겹친 결과였다.
솔라다가 흑마법사를 향해 품은 증오는 이유 없이 생긴 게 아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용병 일을 한 덕에, 현시대 슈탄 중 흑마법 계열 저주에 그보다 많이 당해 본 자는 드물었다. 덕분에 일종의 내성이 생긴 상태.
또한 그는 민준의 예상보다도 뛰어난 웨폰 마스터였으며, 방금 지하에서 발생한 에너지 폭풍은 그의 생존 본능을 자극했다. 가까이 ‘자연재해급 강자’가 있는 걸 감지한 무의식이 이능력자를 깨운 것이다.
“귤레쉬.”
그의 시선이 의자에 묶인 하인에 멎었다. 시끄럽긴 했지만 술과 약을 구해 준 유용한 슈탄이었다.
그를 묶은 것이 뭔지 솔라다는 알 수 있었다. 형태는 좀 다르지만 이 섬뜩한 기운은 분명.
“그림자 괴물.”
즉, 흑마법이다.
눈동자를 돌린다. 이번에는 델을 보았다. 하반신이 촉수로 변하는 저주에 걸렸다던 그녀의 다리는 멀쩡하기만 했다.
“날 속인 거야.”
인간들을 쫓던 흑마법사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여인의 저주는 풀어 주고, 솔라다의 하인은 묶은 다음 모두 한 방에 넣어 뒀다고?
솔라다는 그보다는 다른 가설에 마음이 끌렸다.
애초에 저 일행 중 흑마법사가 섞여 있었다는 추측에 말이다.
지금 여기서 귤레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유로워 보이니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오해입니다!”
윰투스가 두 손을 뻗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델은 아직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고 자신도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다.
그럼 남은 희망은.
“······!”
하은성이 천천히 몸속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아직 폴리모프를 걸 실력은 안 되지만 마법을 해제하는 법은 배웠다. 그는 독일에서 뿜어낸 브레스를 기억했다. 이대로 기회를 봐서 용으로 돌아간 다음, 저 악어에게 불을 확 뿜어 버리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하은성은 갑자기 그 시도를 멈췄다. 그리고 복도를 등진 솔라다의 뒤를 바라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순간 하은성이 본 것을 윰투스 역시 본 것 같았다. 사제는 침착을 되찾은 목소리로 악어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합니다.”
비틀!
풀리는 무릎에 힘을 주며 솔라다는 그들을 향해 다가간다. 몸 상태를 알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럽게. 손에 들린 대검이 위협적인 빛을 내며 번뜩였다. 오러가 끓어오른다.
“하지만.”
윰투스의 눈동자가, 그제서야 솔라다의 등 뒤를 응시했다. 그리고 문장의 나머지를 완성한다.
“아무래도 이 오해를 풀 기회는 영영 없을 것 같군요.”
깽!
경쾌한 금속성 충돌음과 함께, 솔라다는 뒤통수에 가해지는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큽!”
의식을 잃기 직전, 그는 차오르는 어둠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뭐야, 이 녀석 대체 어떻게 깬 거야?”
털썩!
솔라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발치의 그를 내려다보며, 민준은 오른손의 은빛 후라이팬을 거두어들였다. 아니,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생각보다 더 튼튼한 놈인가? 그럼···.’
쾅!
민준은 기절한 악어의 머리를 후라이팬으로 한 번 더 후려 깠다. 솔라다의 몸이 움찔! 하고 경련했다가 다시 늘어졌다. 윰투스는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 주저앉았다.
“휴,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또 은혜를 받는군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민준은 침구 위를 조용히 응시했다.
델이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델.”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깐의 침묵 뒤.
전처가 힘없이 말했다.
“내 선물, 여태 잘 쓰고 다니는구나?”
민준은 손에 든 오리할콘 후라이팬을 보았다. 백청(白靑)과 연보라, 두 종류의 월광(月光)을 반사하는 그것의 모서리에는 찌그러진 비늘과 피부 조각,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내가 저번에 선물한 단검은··· 쓰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아깝다. 기억이 없을 때 만든 거라 성능은 못 미치지만, 정성은 더 많이 들였거든.”
델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면서,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깝다.”
민준은 다시 기절한 전처로부터 시선을 거둔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방금 전 지진과 후라이팬의 충격파 때문에 잠시 깼던 것 같다.
사고의 전환은 금방이다. 그는 솔라다를 보며 고민했다.
‘이제 와서 구구절절하게 사정 설명할 여유는 없단 말이지.’
결단은 더 빨랐다.
푹!
민준은 검은색 후라이팬 손잡이를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아시프-1에게 묻는다.
“가능하겠냐?”
이능력자 세뇌는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보다 훨씬 힘들다. 하지만 약에 취하고, 저주에 당하고, 후라이팬에 두들겨 까여 저항력이 낮아진 지금은 어떨까?
만약 여전히 세뇌가 불가능한 상태라면.
‘그럼 어쩔 수 없지. 여기 묻어 버리고 가는 수밖에.’
자신의 생사가 목구멍에 꽂힌 후라이팬의 대답에 걸린 걸 모르는 솔라다는 기절한 채 그륵!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때였다.
=아, 이건 가능하겠는데요?=
“그럼 먹이면 되겠군.”
챙겨 온 식재료는 이미 소진했는데, 지하 3층의 식량 창고는 지진 때문에 엉망이 된 상태다. 차라리 재료를 새로 수급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하은성에게 턱짓을 하며 부른다.
“야.”
“네?”
“숲에 가서 큼직한 짐승 한 마리만 잡아 와.”
“······.”
어째 어제도 그렇고 자꾸 사냥개 취급받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었지만, 유령은 반항하지 못하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곧, 피막 날개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울리다가 저택으로부터 멀어졌다.
하은성은 들짐승 사냥을 가고, 윰투스는 신성력을 회복해야겠다며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두 명의 슈탄은 여전히 기절한 상태다.
주변을 고요가 감싼다. 민준은 어두운 방 안에 남았다. 소란 끝의 평온이었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는 대신, 그는 그 자리에 선 채로 기절한 전처의 얼굴을 한동안 내려다보고 있었다.
***
솔라다는 숙취 속에 아침을 맞이했다.
전날 저급한 약을 술에 타 먹은 탓에 몸이 엉망이었다. 뒤통수가 깨질 듯이 아프고,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더부룩하다. 전형적인 숙취 증상.
술과 약을 탐닉한 다음 날 겪게 되는 흔한 아침이었다.
그런데.
‘어?’
오늘은 뭔가 다르다.
‘기분이 왜··· 좋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던 감정이 솔라다의 내면에 고여 있었다.
그 정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던 순간.
“솔라다 님?”
문밖에 인기척이 들렸다. 귤레쉬의 목소리가 아님에 의아해하며 대꾸한다.
“들어와.”
아직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쭈뼛거리며 무언가를 내민다.
밀봉된 편지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귤레쉬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방 안에는 솔라다 님께 올리는 편지가···.”
편지를 펼친 그는 놀랐다. 일단, 직업 만족도가 꽤 높아 보였던 귤레쉬가 갑작스레 퇴직 의사를 밝힌 게 의외였다. 말할 수 없는 일신상 사정으로 오밤중에 급히 귀향을 결심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또한 그런 내용을 적어 내려간 공용어 필체가 너무도 예스럽고, 하인치고는 구사하는 문장에 교양이 넘쳐 흘렀기에 한 번 더 놀랐다. 솔라다에게는 이걸 흉내 낼 능력은 없었지만 이런 게 범상치 않은 수준임을 알아볼 정도는 되었다.
‘생각보다 가방끈이 긴 하인이었군.’
웨폰 마스터는 귤레쉬가 떠나간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곧 그 감정에 의아해했다.
‘왜?’
왜 아쉬운가? 자문해 본다.
얼핏 떠오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겨우 하루를 함께했지만 그는 이런 시골에서 솔라다에게 약을 구해 준 유용한···.
아니, 그게 아니다.
솔라다는 책상 위 나뒹구는 술병과 약봉지를 보았다. 지금은 전혀 끌리지 않았다. 꼭 숙취 때문만은 아니다. 어제 자신의 상태가 기이하게 여겨질 정도였고, 낯설기만 했다. 그걸 넘어서 지난 세월을 통째로 공감할 수 없었다.
‘저런 게 뭐가 좋다고 마셨지? 뭐가 좋다고 취했지? 찰나 행복했다가, 한참을 고생시키는 해로운 것을.’
그는 내면을 채우던 감정과 사고가 완전히 새로워졌음을 다시 깨달았다.
“음?”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끊겼다.
“이 냄새는?”
“그 인간들이 새벽부터 부엌을 쓰고 있습니다.”
솔라다는 하인을 거느리고 1층으로 향했다. 부엌 앞에는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고기 스튜인가? 양이 참 많수?”
자신을 고고학자라고 밝힌 인간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뭐, 상관없는 일이지. 그런 건 기억해도 좋고, 잊어버려도 좋고.
“일정이 바뀌어서 오늘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네, 이것만 완성하고 바로요.”
“하지만 당신 처는?”
간악한 흑마법사에게 해코지를 당한 여인을 떠올렸다.
눈에 띄는 상처도 없고 멀쩡해 보였음에도, 그녀는 신음 소리만 흘리며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근무력증과 옅은 혼수상태를 유발하는 저주라고 했지.
“어쩔 수 없지요. 여기서 계속 간호한다고 저주가 풀릴 것 같지도 않고요.”
말을 마친 인간은 후라이팬의 스튜를 큰 용기에 옮겨 담았다.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그 안에는 다섯 명의 슈탄 장정이 며칠 먹고도 남을 양이 채워져 있었다.
“부탁하신 대로 여기 머물며 요리를 해 드릴 수는 없기에, 이렇게 한꺼번에 대량으로 준비했습니다. 저희 사정을 살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뭐. 이 정도야.”
슈탄은 섭섭함을 떨치지 못하고 말했다.
“그럼, 조심히 가슈.”
정말 급한지 고고학자는 즉각 2층에 가서 짐을 챙겼다. 곧 일행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솔라다는 그들 면면을 살폈다.
제일 어려 보이는 남자 노예는 잠을 설쳤는지 연신 하품을 하는 중이었다. 그 곁에 선 근육질 노예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의 관 같은 상자를 몇 개나 짊어진 채다. 그 개수가 하나 늘었다는 걸 솔라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고학자가 아내를 업은 채 내려왔다. 그가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처의 가는 팔다리가 미루나무 가지처럼 흔들렸다.
솔라다는 부부의 애틋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들이 여기 머물도록 자신이 허락한 이유를 숙고했다.
‘부끄럽군.’
수상한 점이 없잖은 그들을 받아들인 건, 단순히 흑마법사에 대한 적개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저 둘은 솔라다가 그토록 애타게 갈구했지만 손에 넣지 못한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었다.
성공한 결혼.
하지만 그 관계는 흑마법사에 의해 깨지기 직전으로 보였다. 둘 중 하나가 죽거나 불구가 되는 방법으로.
솔라다는 아마 무의식중에 그 마지막을 관찰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가질 수 없었던 것이 망가지는 장면을.
‘한때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것 자체로도 불쾌하군.’
자신의 실패와 불행을 보상받기 위해, 타인의 실패와 불행을 즐기려고 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런 심정이었다. 그때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솔라다는 진심으로 바랐다. 저 아내가 저주를 극복하고, 부부가 행복을 되찾을 수 있기를. 이제는 평화로운 심정으로 기원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렇군. 나는 지금···.’
그런 악어의 표정을 보며, 민준은 손에 쥔 후라이팬에게 말을 걸었다.
‘야.’
=네?=
‘쟤한테 대체 무슨 암시를 건 거야? 내가 지시한 것 이상의 뭔가 정신에 스며든 것 같은데?’
=역시 예리하십니다. 한 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당연하지.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잖아.’
아시프-1에게 지시한 암시는, 솔라다의 기억을 적당히 조작하고 민준을 향한 의심을 거두게 만들며, 그들이 떠난 뒤에는 잊어버리게 유인하라는 것이었다.
=어제 손잡이를 목구멍에 꽂으셨을 때 저 슈탄의 정신세계를 보았단 말씀입죠.=
‘그런데?’
=그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게 생각났습니다. 제가 창조된 목적이요. 저 자신을 위한 정언명령(定言命令)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거짓 없는 행복을 선사하고, 고통에서 구원하는 거지요!=
아시프-1은 자신이 본 걸 설명한다.
=저 슈탄의 마음에는 너무도 크고 짙은 얼룩이 있었어요. 먹어서는 채울 수 없는 결핍이, 공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뇌하는 김에 선물을 하나 주기로 했지요.=
민준은 혀를 찼다.
‘인위적인 행복감을 준 거냐? ‘사료’를 안 먹을 때도 느끼도록?’
=행복을 못 느끼게 막던 근본적인 장애물을 해결해 줬습니다!=
그 말을 들은 민준은 자연스레, 최근 꿈속에서 본 누군가를 떠올렸다.
아주 먼 옛날 통신용 인공위성을 통해 ‘실험체’ 행성의 사고를 보고하던 여인.
– ···훌쩍, 죄송합니다. 고귀하신 분 앞에서 흉한 꼴을 보였습니다. 외딴 행성에 격리해 둔 옛 실험체들에게 문제가 발생하여···.
그를 보자마자 감격하여, 홀로그램 너머에서 연신 눈물을 흘리던 그녀.
당시 민준의 동족들은 대부분 그 아이를 닮아 있었다. 부정적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감정이 생기더라도 금방 행복감이 그것을 대체했다.
그들을 볼 때마다 과거의 민준은 이질감을 느꼈다.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고귀한 존재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해서 울어 버리는 감성에도 그는 도저히 동조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시절 스승이나 자신 같은 고귀한 자들 머릿속에는 없던 그것이, 평범한 동족들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마르지 않는 행복의 분비샘이.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영생이란, 영원토록 이어지는 지옥일 수밖에 없기에.
“······.”
먼 기억을 떨치며, 그는 후라이팬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민준은 일행과 함께 저택을 떠났다,
그들이 출발한 뒤 솔라다는 하인들과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어제 먹은 죽만큼이나, 고기 스튜 역시 기가 막힌 맛이었다.
행복감 속에서 식사를 마친 다음 솔라다는 하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사람으로서, 사람에게 내비치는 관심이었다. 하인들은 당황하면서도 더듬거리면서 대화에 참여했다.
그들이 각자 일을 하러 흩어진 뒤, 솔라다는 테라스에 앉아 내리쬐는 햇볕을 즐겼다. 여유롭고도 만족스러웠다. 비었던 가슴의 언저리가 다시 채워진 느낌이었다.
‘왜 달라진 거지? 무엇이 달라진 거지?’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솔라다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혐오했다. 내면에 가득 찬 무기력과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몸을 마취시키듯 감정을 술과 약으로 마비시키려 했다. 그리고 왕실을 험담하고, 난동을 부리고, 애꿎은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힘과 성취감, 자신이 통제력을 쥔 것 같은 즐거움 덕분에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의 효과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던지는 혐오는 결국 주변의 다른 사람, 주변의 환경을 향해 반사되어 쏟아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솔라다는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는 더 이상 공허하지 않았다. 평생 성취한 적 없는 관계를 통해서만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강박은 사라졌다. 그는 온전히 그로서 완벽했다.
슈탄은 테라스의 창문을 보았다. 유리는 거울처럼 그의 얼굴을 비췄다. 예전과 같은 혐오감은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솔라다는 자신을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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