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06
207.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4)
***
민준은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단, 여기 든 물건은 드래곤 하트라고 가정하고.’
100일이라는 단서를 단 것도 그만큼 시간이 지나면 드래곤 하트에 변화가 생기거나, 드래곤 하트를 둘러싼 환경에 변화가 생길 것을 예상한 조치이리라. 지금으로서는 모든 사고가 추측과 예단의 영역에 머문다
유언장 속 문장이 기억 속 로드의 목소리와 겹쳐 울리는 것 같았다. 약간의 심술과 익살을 담아서.
민준은 그 음성에 화답하듯 생각했다.
‘자기 심장에 무슨 짓을 해 둔 겁니까?’
계속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 양반에겐 원래 엉뚱한 구석이 많았지. 하지만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나서 돌이켜 보면 쓸데없이 저지른 짓은 없었어.
“······.”
생각에 잠긴 전남편의 얼굴을, 델은 이채를 담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찰나 변화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겔랑코 차원에서 들끓는 그림자에 덮여 있을 때의 민준은 대화가 불가능한 자연재해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나서 본 그는,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마모된 상태 같았다.
태초의 종족을 제외한 모두를 묶어 ‘너희들’로 칭할 수 있는 존재는 델이 기억하는 카인, 아시프-666이라기보다는 오래 전 옛날에 존재하던 누군가에 가까웠다. 델로서도 헤아리기가 두려운 긴 시간을 겪은 초월적 존재 말이다.
반면 드래곤 로드를 회상하는 그는.
‘조금이나마, 내가 아는 그로 돌아왔어.’
약간 가라앉은 눈빛은 기억 속 지인을 향한 존중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목소리가 델의 상념을 깨웠다. 민준은 이미 사고의 방향을 바꾼 뒤였다.
“로드와 거래를 했다고. 이걸 만들어 준 대가는?
이 큐브는 엔델리온조차 쉽게 만들 수 없는 정교한 물건이다. 거래라고 했으니 서로 오간 것이 있을 터.
델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는 걸 알았다.
“그 대가로, 나는 드래곤 로드의 피와 뇌척수액을 받았어.”
민준의 눈이 조금 커진다. 요구한 내용이 의외이기도 했지만, 그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확한 시기와 장면을 떠올리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델이 처음 지구에 와서 연락도 없이 민준의 사무실에 불쑥 나타난 그날 이런 말을 했었다.
-있지, 오해하지 말고 들어. 자기 피랑 뇌척수액을 조금씩만 받아갈 수 있을까?”
“설마 그것도 예전에 말한 ‘플랜B’ 어쩌구 하는 것과 관련 있는 거야?”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계획.
그리 묻는 민준에게, 인간 형태의 델은 단단한 시선을 보내며 답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어. 당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거야.”
그리 말한 순간 그녀 곁의 공간이 흔들렸다. 출렁임이 멈추자 허공이 갈라지며 어떤 형체가 튀어나온다. 그걸 본 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너···!”
민준은 시야가 붉게 물드는 착시를 보았다.
두개골 안 진득한 피비린내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태초의 종족 기준으로는 놀랄 것도 없는 기억이었으나 아시프-666에게는 떨칠 수 없는 악몽이었다.
민준은 아쉬탈이라는 차원에서 본 참상을 떠올린다.
허파가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공간 곳곳에 널려 있던 고기와 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해체된 채 나열된 광경. 투명 용기에 담기고 갈고리에 꿰여서, 펼치거나 쌓아 놓은 채, 이미 죽어 있거나 죽어 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순간 신기루처럼 스쳐 간 환영 속에서, 그 모든 사람들 얼굴에는 똑같은 이목구비가 새겨져 있었다.
다름 아닌, 민준 자신의 얼굴이었다.
“너, 설마 지금까지!”
델이 꺼낸 것은 민준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형태로 제조된, 영혼 없는 텅 빈 육신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걸 만들고 있었던 거야?”
그녀가 시인했다.
“그래, 호문쿨루스야.”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낸다.
“먼 옛날, 당신을 체포하고 나서 고대 종족은 당신의 피를 비롯한 각종 육체 샘플을 얻어 냈지. 하지만 유전자 해석에는 실패했어.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 복제를 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민준에게는 무한한 수명이 있었고 따로 의체도 필요하지 않았으므로 기억만 지운 채 노동교화형에 투입되었다. 물론 이면에 교묘한 의도를 숨긴 조치였다.
“결국 당신 유전자로 뭘 해 보려는 시도는 먼 옛날 중단되었지. 남은 시료(試料)를 내가 몰래 빼돌려 혼자 실험을 시작한 건 최근 일이야. 하지만 곧 벽에 부딪혔지. 이것도 겉모습만 흉내 냈을 뿐, 내부를 들여다보면 처참하기 짝이 없어. 로드에게 그런 걸 요구한 것도, 용의 피에 담긴 생명력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도해 보려 했지.”
민준은 여전히, 동기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당연히 당신을 위해서지. 퇴직금을 모으지 않고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애초에 위원회가 당신을 쫓을 필요가 없게 만드는 거야.”
델은 호문쿨루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난 당신의 죽음을 가짜로 연출하려고 했어.”
민준이 태초의 종족임을 알면서도 꾸민 계획이었다.
“당신이 늙지 않고 어지간한 부상은 순식간에 재생하는 건 알아. 하지만 태초의 종족이 절대 불멸의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예를 들어, 분자 단위로 분쇄되어도 재생할 수 있다면 당신에게는 애초부터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없을 것이고 그게 싸우는 방법에도 반영되었겠지. 하지만 내가 관찰한 바는 달랐어. 게다가···.”
델은 민준이 수형자 생활을 하며 사지 절단을 포함한 각종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단 한 번도 머리가 터진 적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격렬한 전투 중에도 머리만큼은 필사적으로 보호했다. 기억이 사라진 상태에서도 말이다.
또한 델은 둘의 관계를 정리한 싸움에서 민준이 한 말을 기억했다.
-잘라도, 찢어도, 저며도 재생하는 나를 완벽하게 죽일 방법?!
-궁금했던 것 같으니 알려 주지. 그렇게 애써서 실험할 필요도 없었어! 난 심장이 뚫려도 살아났지만 아직 누구도 내 목을 벤 적은 없어. 머리를 도려낸 자는 없다고! 그러니 그 방법밖에 없지 않겠어? 죽이려면 말이야. 자, 바로 여기야. 정확하게 노려. 내 목을 찌르라고! 그리고 길게 베어 내!
“······.”
델은 앉은 채 무릎을 끌어모은 뒤 팔을 둘러 감쌌다. 그 상태로 말을 잇는다.
“그 죽음의 연출은, 목격한 고대 종족조차 납득할 완벽한 것이어야 해. 남겨진 시신 역시 완벽해야 하고. 육신의 복제 부분이 해결된 뒤, 가능하다면 영혼의 소거까지 연출하려고 했어.”
그 뒤로 델이 주절주절 계획을 설명했지만, 민준은 대꾸 없이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녀의 계획이 망상에 가까울뿐더러, 해결 못 한 구멍(특히 영혼의 처리에 대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부분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다른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호문쿨루스.’
델은 완벽한 호문쿨루스를 만들려고 했다. 민준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을 선물하기 위해서.
그 화두는 전처와 함께했던 시절 목격한 끔찍한 광경을 다시금 연상시켰다.
호문쿨루스. 곳곳에 죽은 채 널려 있던, 수가 너무도 많았던 그 복제품들.
‘그래, 너무 많았다.’
정말 자신을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 그 많은 인공 생명체를 만든 것이 맞을까?
아니면···.
실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당시 델은 고대 종족으로서 기억을 잃은 상태였어.’
그렇게 부인해 보지만, 민준은 안다. 설사 기억이 없는 상태라도 한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을.
엔델리온 같은 종족이라면 더더욱.
‘만약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했지?’
사념이 깊어지고 미세한 추억까지 기억의 표면 가까이 떠오른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돌아와, 스무고개에 가까운 부부간의 심문이 이어진 그날 밤.
전처는 명확한 언어로 계획을 털어놓지는 않았으며, 그녀가 남긴 여백은 민준이 채워 넣었다.
그날, 델은 고백했고.
-당신을 자유롭게 만들고 싶었던 거야. 당신이 본 그건··· 전부 그 방법을 찾기 위한 거였어.
민준은 추측했다.
-내가 죽어서 영혼 상태가 되어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미신을 믿었던 거야?
그 질문에 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
잠시의 침묵 후.
민준은 상념을 끊어 내고 다시 의식을 현실로 되돌린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뀐다.
그러고는 델에게 무미건조한 어조로 긴 좌표를 읊었다. 델은 그것이 다음에 도약해야 할 목적지라는 것을 알았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녀는 순응했다.
대화는 중단되었다. 델은 폴리모프를 풀고 본체로 돌아갔다. 그리고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 주문을 외웠다.
그사이 민준은 하은성과 윰투스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 둘은 이미 밤하늘을 가득 덮은 델의 위풍당당한 위용 덕분에 때가 왔음을 예감한 상태였다.
하은성이 물었다.
“지금 공주님이 저렇게 무방비하게 변신해도 돼요? 보니까 이번엔 결계 같은 것도 안 치셨던데요. 근처의 다른 드래곤이 저거 보고 날아오거나 신고하면 어떡해요?”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겨 있던 민준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한 박자 늦은 타이밍으로 답했다.
“괜찮아. 이 근방에 저걸 볼 수 있는 놈은 없어. ‘이제는’.”
“······?!”
하은성은 민준이 오늘 하루 종일 어딘가를 부지런히 오간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몸에 밴 지독한 혈향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도.
또한 돌이켜 보면, 이곳에서 용을 찾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채권자는 끝내 답해 주지 않았다.
하은성이 뭐라 말하기 전에 윰투스가 끼어들었다.
“화신이시여. 실은 저도 보고드릴 것이···.”
고향 차원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민준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침묵하는 그를 보며 윰투스는 약간 당황했다. 애초에 그가 동요할 거라 예상한 것은 아니다. 사제가 놀란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뭔가··· 달라지셨다.’
자리를 비운 짧은 시간 사이 화신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비유하자면, 요 근래의 화신은 그들 모두와 격을 달리하는, 저절로 우러러보며 숭배하게 되는 절대자의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저 얼굴은 아주 미미하지만 신적 존재의 발밑에 조아려야 할 자들, 그러니까··· ‘세속’의 영역에 속한 자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윰투스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준비가 끝났어!=
우우웅!
델이 그들을 감싼다. 그 직후, 그녀를 중심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불꽃이 튀고 푸른 광선이 무수히 몰려들며 춤을 추었다. 거대한 촉수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한다. 민준을 비롯한 일행은 몸이 붕 뜨는 고양감과, 그들을 구속하던 모든 제약에서 탈출하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하지만 몸의 감각과는 별개로, 그들 각각의 뇌리에는 무거운 생각이 남아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공주는 전남편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느꼈고, 사제는 화신의 미세한 변화 때문에 아쉬움을 느꼈으며, 채무자는 자신이 혐오하여 마지않는 종족과 채권자의 관계 때문에 혼란을 느꼈다.
일행이 각각의 고민에 빠진 사이.
팟!
섬광이 폭발하며, 그들 모두가 사라졌다.
***
차원 #77-102.
윰투스의 고향인 이곳에서 엘라후-프라가 교단 공의회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유체 이탈 상태로 그와 대변했던 사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급하게 요청한 결과였다.
100만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목에 걸고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는 윰투스. 그의 말에 따르면 도망자 일행이 여기 도달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윰투스는 본단이 모든 준비를 마쳤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들은 오늘도 급하게 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여태 결정적인 부분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뜸을 들일 여유는 없었다. 최고위 성직자들의 의사 결정체인 공의회의 수장이자, 교단의 ‘교황 대리’ 직무를 맡은 성직자가 선언했다. 목소리에 엄숙함을 담은 채, 이마의 것을 제외한 나머지 두 눈에 강렬한 빛을 담는다.
“···이 자리 모인 사제들이 다수결로 결정한바, 교단에서는 ‘화신’의 요구에 대한 결정을 유예하겠습니다.”
회의장에 모인 사제들 일부는 당연한 결과라는 듯 끄덕였고, 또 일부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에 목소리를 높이거나 항의하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개중 한 명, 유난히 허탈한 한숨을 쉬는 자가 있었다. 윰투스와 함께 지구에 파견되었던 이단재판관이었다.
‘내가 신앙을 걸고 맹세한 내용에 회의를 품는 자들이 이토록 많다니!’
예견된 문제이기는 했다.
지금 상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세계에서 조우한 외계인이 그간 교단에서 계시의 날을 대비해 준비한 신혈을 전부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고 사제들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신앙을 건 증언이 거짓일 리 없으니 그는 화신이 맞으며, 요구하는 대로 달란트를 공납해야 한다는 쪽. 다른 하나는, 그 화신의 요구가 경전 속 선지자의 계시와 대치되니 검증이 필요하다는 쪽이었다.
이런 와중에 화신을 의심하는 쪽도, 열렬히 숭배하는 쪽도··· 신성력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래서 상황이 더 복잡해진 것이다.
교황 대리가 이어서 말했다.
“이계에 파견되었던 이들 증언에 따라, 교단은 과거 교령을 일부 수정하여 화신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화신과 신을 동일한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헌데 지금까지 관찰한바 화신은 신의 세계가 아니라 이곳 우리가 사는 세계에 묶여 있으며, 그의 요구는 선지자의 예언에 정면으로 어긋나기도 합니다.”
얼마 후 다가올 계시의 날, 신들을 깨우기 위해 준비한 달란트를 몽땅 가져가겠다니?
‘아시프의 서’에 묘사된 선지자는 그런 예언을 한 적 없다.
“이에, 오늘 합의된 대로 교령을 좀 더 구체화합니다. 화신에 대해서는 몇몇 사제들이 요청한 대로 교단 차원에서 검증을 진행할 것입니다.”
이단재판관은 적잖은 분노를 느꼈다.
사제들이 화신을 검증하다니, 이 얼마나 발칙한 행위인가?
심지어 그 검증의 결과에 따라 화신의 지위가 영구적으로 철회될 가능성까지 열린 것이다.
그때 누군가 교황 대리에게 물었다. 교단의 의전을 총괄하는 고위 사제였다.
“그럼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예를 표하는 의식은 어떤 기준에 맞춰야 합니까?”
이건 아주 예민한 문제였다. 교단이 인지한 민준의 위치가 애매해진 것이다. 화신이라고 완전히 인정한 것도, 부인한 것도 아니었다.
교황 대리가 답했다.
“검증이 완료될 때까지는 그를 세속에 속한 존재로, 우리 교단을 방문한 손님으로 취급하기로 합시다.”
“그럼 어떤 이름으로 모시는 것이 옳으리까?”
화신이 아닐 수 있으므로 화신으로 칭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면전에서 화신 후보자로 불렀다가는 분노를 살 수 있는 노릇이었다.
교황 대리는 간단하게 답을 냈다.
“듣자 하니, 그는 이미 스스로에게 세속의 이름을 붙이고 그대로 호칭하는 것을 허락했다지요? 우리도 그에 맞추어 부르면 될 일입니다. 검증이 끝날 때까지.”
그리고는 지구로 파견되었던 이단재판관에게 묻는다.
“그의 세속명(世俗名)이 무엇이었지요?”
재판관은 지금까지 항상 ‘화신’으로 칭했기에, 한 번도 발음해 본 적 없는 이름을 읊었다. 지독한 신성 모독이라는 회한을 느끼면서.
화신의 이름은 그들, 레파탐족의 구강 구조에 맞춰 다소 이질적인 소리로 재현되었다. 끝음절의 파찰음은 무기음화(無氣音化)되었고, 끝 음절 비음(鼻音)은 한국어 화자보다 혀뿌리에 가까운 곳에서 발음되었다.
교황 대리는 낯선 세계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린다.
“Ye··· min··· choong···.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군.”
그는 복잡한 상념에 사로잡힌 채 창밖을 응시한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화신 후보가 진짜든 가짜든 간에, 그가 교단에 폭풍 같은 변화를 가져올 것은 확실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