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24
225.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22)
‘못 넘어갑니다! 당연하지요! 지금까지 여기 영혼을 보낸 사제 누구도 그 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계는 오로지 달란트만 통과시킵니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겁니다!’
하은성은 상대의 영파에 경의가 짙게 맺힌 걸 깨달았다. 음성언어로 치면 완벽한 존칭을 붙이는 것처럼 어투가 달라졌다.
알렉스트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어떻게 넘어간 겁니까? 당신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 질문은 하은성의 내면에 울림을 넘겼다.
그래··· 난 대체, 뭐지?
의구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아까 흘려들은 말도 의식 위로 떠오른다. 알렉스트는 분명 말했다.
=신혈을 지나치게 많이 흡수하면 정신이 붕괴해버린다고 했죠?=
하은성도 그렇게 된 사람을 본 적 있다.
지구에 파견되었던 총대주교. 잘린 머리 채로 양아들에게 납치당했던 남자.
그는 2백만에 달하는 달란트를 흡수한 결과 이지를 잃었다. 오로지 한 가지 욕망에 사로잡혀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게 된 채 신성력을 폭주시켰다.
하은성은 묻는다.
=한 사람의 영혼이 감당할 수 있는 달란트는 어느 정도예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 꼴이지만, 알렉스트는 순순히 대꾸했다.
‘경전 속 선지자께서는 자신에게 한계가 없다 하셨으나, 그와 달리 우리에겐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멋도 모르고 많이 흡수했다가 속속들이 미쳐버렸다고 합니다. 시행착오 끝에 겨우 우리는 적절한 수준을 찾았습니다. 교단의 경험상 보통 10만 달란트 정도를 한계로 여깁니다.’
하은성은 이번에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상하다.
너무도, 이상하다.
이 분야에 가장 많은 경험을 보유한 교단의 전 대표가 장담했다. 한계는 10만 달란트라고.
하지만 하은성은 한 때 100만 달란트를 흡수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장담하지만) 미치지도 않았다. 민준도 그 사실에 놀랐지만 하은성이 원체 이상한 영혼이기에 이유 규명을 포기했었다.
다들 감당 못하는데 왜 자신만···.
=아니, 나 혼자가 아니야. 나 말고도 또 있어.=
하은성은 자신보다 많은 달란트를 흡수하고도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을 한 명 더 안다.
=그래, 요원님도 그랬어.=
수백만의 달란트를 흡수한 뒤에도, 민준은 성격이 좀 바뀌었지만 미쳤다고는 볼 수 없다.
그와 자신 사이 이런 공통점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하은성의 특별함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복잡한 심정으로 손을 뻗어 선이 있는 곳을 더듬었다. 이번에도 아무런 저항 없이 쑥 통과했다.
=역시나, 뚫을 수 있어.=
그렇다. 하은성은 어떤 결계든 통과할 수 있다. 본인은 처음 능력을 자각했을 때 그게 목에 꽂힌 이상한 칼 때문이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자신이 죽은 방식은 엘라후-프라가 사제들이 받는 세례와 매우 흡사했다. 아니, 사실상 같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사제들에겐 하은성 같은 능력이 없다.
특별한 쪽은 하은성이었다.
=나한테는 왜 이런 힘이 있는 거지?=
이 힘은 몸과 영혼이 분리되었을 때만 발현된다. 심하게 말하면, 몸이 영혼을 방해하는 구속구로 느껴질 정도다.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능력.
선을 넘나들고 울타리의 의미를 붕괴시키는 힘.
=설마 요원님에게도 이런 능력이 있을까?=
민준의 영혼이 몸을 떠나는 걸 본 적 없으니 검증이 불가능하다.
하은성은 다시금 알렉스트 앞에 그어진 선을 본다. 그는 지금까지 꽤나 많은 결계를 통과해 본 경험이 있다. 그럴 때마다 예외 없이 저항감을 느꼈다. 막힌 벽을 뚫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
=방금은 그런 게 전혀 없었어.=
조금 전 하은성은 자기가 결계를 뚫은 것도 몰랐다.
관통하는 순간 발생하는 반향과 진동이 극도로 미세하고 짧아서 느끼지 못한 것이다. 결계의 입자가 균형을 잃었다가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했다. 이런 고차원적인 방어막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이 결계, 대체 누가 만든 거예요?=
‘저 안에 잠든 태초의 종족이 만든 것입니다.’
하은성이 기대한 답이 아니었다.
=···위원회의 그 고대 종족인가 뭔가 하는 외계인들이 아니라요?=
‘경전에 그리 적혀 있습니다. 신의 말씀이 틀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비록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적혔으나, 신을 대리하는 자의 말은 곧 신의 말이나 마찬가지.
신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경전은 진리의 말씀이니까.
=하지만.=
하은성은 모순을 발견한다.
=고대 종족이 저 안에 잠든 사람들, 아니, 신들 목에 구멍을 뚫었다면서요.=
알렉스트가 즉시 경전 구절을 읊었다.
‘태초의 종족이 깨기 힘든 복락된 꿈에 묶임을 알고 교활한 짐승들이 그들 목덜미를 물었노라. 가장 무방비하고도 나약한 곳의 살결이 찢기고 피가 흘러내리니, 그것은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며 어떤 한계도 허하지 않는 힘이라’
=아, 알았어요. 경전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건 알았는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 결계를 태초의 종족이 만든 게 맞다면 위원회는 이걸 어떻게 뚫고 들어가서 목에 구멍을 낸 거예요? 어떻게 그 와중에도 그들은 깨지 않은 거에요?=
성직자들도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추측을 이미 정설로 확정시켜 놓은 상태였다. 경전이 잘못될 리는 없으므로 알맞은 이유를 생각해 내야 했다.
‘엔델리온의 마도구 중에는 결계에 구멍을 낸 뒤, 그것을 감쪽같이 복원시켜 놓을 수 있는 종류가 있습니다.’
하은성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한 번 무너뜨린 결계를 왜 다시 복구해야 하는가?
위원회는 과거에 여기까지 와서 목에 칼집을 내 놓고, 왜 오늘날에는 상류까지 올라오는 대신 하류에만 머무는가?
의구심은 자연스레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그들이 정말로, 이 결계를 뚫은 적 있는 게 맞는가? 사실 그들이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저 먼 아랫쪽 하류에 그치는 게 아닐까?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의혹 제기에, 알렉스트는 신성한 짐승 앞인 것도 잊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그만하십시오. 신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경전에는 한 글자도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그 말에 대한 하은성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저··· 여기보다 더 위쪽을 좀 봐야겠어요.=
‘네? 뭐라고요?’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요. 누군가 계속 말을 걸고 있어요. 조각나고 분쇄되어서 알아차리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들려요. 내게 애타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요.=
‘잠깐만. 멈추십시오! 제 곁에 붙어있어야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은성은 정신을 집중한다.
지금 들리는 목소리들은 부활의 성당 위에 쏟아져 내리던 영혼 파편들의 영파와 비슷했다. 단지 이쪽이 훨씬 작고 미세하며 파편화되어 있다. 성당에서 본 아시프-1의 조각들이 각자 바위나 자갈 정도의 크기라면, 지금 이것들은 모래? 먼지? 어쩌면 그보다 더 잘게 조각난 채 말을 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생물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듯이 하은성은 자세한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심지어 목소리의 상당수는 겹쳐서 명확한 구분이 쉽지 않았다. 그것들은 하나인 동시에 여럿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한가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나를 알아요. 지금, 나를 부르고 있어요.=
***
첨탑에서 교황 대리의 제례가 막 시작된 그때.
민준은 군중 앞에 나서지 않은 채 성당 안에 머물고 있었다. 신이 익숙한 존재, 언제든 알현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므로. 공포와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델 역시 그 옆에 남았다.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다시금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
두 사람 사이 침묵이 감돈다. 민준은 어서 말을 해 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저 무심하고 지쳐 보이는 시선마저 그가 알던 전남편과 똑같았다. 엔델리온의 기억력이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민준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이지 않는다.
종족의 경계를 무너뜨리던 찬란한 빛.
인간을 혐오하는 엔델리온의 한계, 그 울타리를 넘도록 유도했던 신비한 요소가.
델은 용기를 끌어모아 말했다.
“약속을 지켜줘.”
그때, 바깥에서 군중의 환호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델은 교황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으리라 짐작했다. 아시프-1이 부활을 천명할 수 있도록 델이 새 몸을 제공했다.
“아시프-1은 완벽하게 능력을 되찾았잖아. 이제는 먹일 필요도 찌를 필요도 없던데?”
돌아온 교황은 한마디의 말로 강력한 이능력자들의 정신을 조작했다.
과연, 위원회에서 우주 최악의 범죄자로 낙인을 찍을 만한 힘.
또한 과거 아시프-666의 죄목은 그런 존재를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 부활에 일조했어.”
돌아온 아시프-1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민준과 델에게 공동 저작권이 있다고 단정지었다. 얼핏 농담처럼 들렸지만, 델은 그 문장을 좀 더 차갑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다.
민준과 델은, 우주 최악의 범죄자를 부활시킨 공범이다.
“나와 위원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혹여 민준은 이것까지 감안하고 그녀에게 호문쿨루스를, 공물을 요구한 걸까?
여하튼 그 몸을 제공하며 델은 조건을 걸었다.
민준이 대꾸한다. 다소 피곤한 어조였다.
“이 모든 건 내 동포, 나의 동족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야.”
“알아.”
“그리고 델, 너 역시 고향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겠지. 동족들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해해. 그들을 모두 영구히 잃어버린다는 생각만 해도 생살이 도려지는 듯 괴롭겠지. 나는 그 심정에 ‘공감’할 수 있어.”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로, 태초의 종족은 선언하듯 말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벌 받을 자들은 벌을 받을 거야. 하지만 그 과정이 엔델리온의 멸종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약속해. 그리고 젊은이들의 몸을 희생시켜서 몸을 갈아타는 악습은 금지될 거야. 거기에 네가 부탁하지는 않았지만 덤으로··· 델, 너는 네가 원하는 형태의 행복을 얻을 거야.”
이 약속은 델에게 일종의 보험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신론자인 그녀가, 놀랍게도 종교인들이 설파하는 신을 믿어야 하는 논리에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믿는 행위 자체로 손해 볼 일은 없다. 반면 신이 존재한다면? 믿었으니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경우의 수에 따른 손익을 헤아리면 당연히 신을 믿는 편이 이득이다.
델의 고민도 비슷했다. 정말로 민준에게 위원회를 굴복시킬 신과 같은 능력이 있는가? 이미 한 번 패배한 아시프-1이 이번에는 성공할 것인가?
근거는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난 그걸 바라고 있는 걸지도 몰라.’
골이 깊은 딜레마. 델은 민준의 승리를 바라지만 동족의 멸종은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약속은 민준이 징벌을 시작하는 그날을 위한 보험이다.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고 한들 민준이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리 없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델은 신을 믿지 않지만 민준은 믿었다.
“와아아아아!”
바깥에서 다시 크나큰 환호 소리가 울린다. 아마도 교황이 대리자의 목을 찌른 것 같다. 어찌나 큰 난리가 났는지 땅이 울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음?”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동시에 밖의 환호도 그친다.
민준의 머릿속에 아시프-1의 정신파가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안 나서신다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나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보좌 반환식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말을 걸어오기에 민준은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표정이 순식간에 바뀐다.
“놈들이 왔군.”
“뭐?”
민준은 순식간에 공간을 접어서 뛰어 넘었다.
다음 순간, 그와 델은 성당의 첨탑 꼭대기에 서 있었다. 발코니에는 칼을 든 교황과 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교황 대리가 보인다. 저 아래 모인 군중들 사이 열광은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다. 그들 모두 신이 모습을 드러낸 것조차 모른 채 다른 쪽의 하늘을 보고 있었다. 좀전과는 다른 이유로 경악한 얼굴.
태초의 종족 역시 날카로운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델의 눈빛도 같은 곳에 닿았다. 그녀는 그대로 굳는다.
“벌써?!”
스모그로 가득한 하늘에, 오래전 사라졌던 별의 군무가 펼쳐졌다. 공기를 태우는 빛 덩어리가 성좌를 만들며 사방을 빼곡하게 덮었다. 대기권에 펼쳐진 은하수 같았다.
기묘한 색채로 이글거리는 섬광. 델은 저 광원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녀가 이곳으로 넘어올 때도 저런 빛에 휩싸여 있었다.
“차원 도약 마법!”
그런데, 발현되는 마법의 개수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델은 저 현상의 의미를 깨닫는다.
위원회의 전투 함대가 이곳으로 도약해 오고 있었다. 그전까지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