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23
224.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21)
***
하은성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곳에 자신이 진입한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것은, 어서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는 머릿속 외침이었다. 본능적인 충동이었다. 발작적 공포 속에서 의문을 떠올렸던 것 같다.
도망이라면, 어디로?
난간 위의 남자, 검을 든 교황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상대는 자신이 어디로 도망치든 따라올 능력을 지닌 것 같았다.
‘그때, 검은 구멍이 보였어.’
막 세례를 받은 남자의 영이 육에서 분리되어 그곳으로 향했다. 하은성은 저 안이라면 교황이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다고 직감했다.
그 뒤, 바로 몸을 버리고 도망쳤던 것 같다.
알렉스트를 따라 이 공간에 들어온 다음에도, 하은성의 영혼은 한동안 패닉상태였다. 공교롭게도 함께 온 전(前) 교황 대리, 알렉스트 역시 엘라후-프라가를 처음 보고 황홀경에 빠졌기 때문에 서로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한 명은 공황, 다른 한 명은 감격 속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놀란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알렉스트가 말했다.
‘당신은 살아있지 않군. 사령(死靈)··· 그러니까 유령이야.’
알렉스트는 살아있는 몸과 연결된 생령(生靈)이다. 반면 하은성의 혼에서는 죽은 자 특유의 단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목에 꽂힌 그 단검!’
손잡이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검.
‘세례를 받은 건가? 하지만 생긴 걸 보면 인간인데. 그러니 당연히 죽을 수 밖에. 사망할 당시의 형태 그대로 영체가 고착된 거군. 대체 누가? 그리고 당신을 왜?’
하은성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희가 섬기는 교황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대략 1년 전에 지구에서 자기를 죽였다고. 도축하듯 처참하게 살해했다고 말이다.
‘아무래도 내가 세례 받으면서 열린 문을 따라 들어온 것 같은데. 그렇다면···.’
상대의 대꾸가 없자 알렉스트가 추측 끝에 알아서 답을 찾았다.
그들 고향에 존재하던 인간 영혼이라면 한 위(位) 뿐이다.
‘신수(神獸)!’
알렉스트도 윰투스에게 들어 알았다. 화신이 기르는 그 용의 몸은 드래곤과 인간의 유령이 공유하고 있음을. 내용물이야 어쨌든 형태는 드래곤이므로 신의 상징으로 숭배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았건만.
‘설마 화신께서 당신을 직접 세례하신 거요? 그리고 죽은 당신의 영혼을 기르던 짐승 속에 가둔 거군. 맙소사!’
알렉스트의 표정에서 질투가 일렁였다.
‘···신에게 그런 식으로 간택되어 소유 당하다니, 정말 부럽군!’
하은성은 겁먹은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틀린 추측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더 급한 질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 죄송한데. 여기 설마 거기에요? 엘라후··· 뭐시기?=
사방에 흘러넘치는 신혈을 보면 당연히 유추할 수 있는 답이었다. 알렉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곳이 신들이 잠든 장소, 엘라후-프라가요. 그들이 흘린 피가 흘러내리는 강의 상류지. 문이 어디서 열리든 우리 영혼은 이곳으로 인도되오. 선지자께서 약속한 대로.’
하은성은 그 이름을 되뇐다.
=엘라후 프라가.=
그제서야 공포에서 벗어나 온전한 정신으로 집중할 수 있었다. 그는 집중력을 신혈을 관찰하는 데 사용했다.
한 방향으로 쏟아지는 달란트. 상류가 있으면 하류도 있을 터다. 어마어마한 양의 달란트가 격류를 만들며 저 먼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상대가 신수라는 것을 깨달은 알렉스트는 친절해졌다. 그는 침입자가 아닌 울타리 안의 존재이므로, 환영 받아 마땅했다.
‘그렇소. 엘라후-프라가. 우리가 인지하기로 이곳은 선형(線形)으로 좌표계를 확장시킨, 끈과 비슷한 형태의 차원이오. 상류는 바늘에 달린 실처럼 존재하는 모든 차원을 꿰고 있지.’
하은성은 상대의 영파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정신으로 그린 구조도는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그것은 입체적으로 배열된 구슬들을 차례로 관통하며 꿴 실, 혹은 끈의 묘사였다.
그 수많은 구슬이 각각의 차원이며 끈은 엘라후-프라가다. 신혈이 흐르는 강이므로 길쭉한 걸까? 하은성이 힘겹게 이해한 것 같자 알렉스트가 말했다.
‘그래, 대충 이런 형태라고 생각되오. 그러니 어떤 차원에서 출발해도 여기로 접근할 수 있지. 그리고 실의 끝은, 다시 말해 하류는 채굴장으로 이어지며 그친다오.’
채굴장.
위원회가 달란트를 채취한다는 그곳.
세상에 뿌려진 그 아름다운 빛이 이곳에서 나오는 것이었구나.
하은성은 긴장을 늦추며 신혈의 강을 응시했다. 마음을 죄던 고삐가 풀리자 반작용이 바로 나타난다.
=아!=
그의 눈이 아름다움에 홀렸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영체의 고도를 낮춰 천천히 다가간다.
거칠고 빠르게 흐르는 신혈의 강, 그 상류에 영혼이 닿을 기세였다.
알렉스트가 다시금 기겁하며 외쳤다.
‘안 돼! 멈추시오!’
=······헉!=
그 일갈이 하은성을 깨웠다. 그는 몸서리치며 다시 수면에서 멀어졌다. 여전히 달란트는 정신체에게 치명적이다.
‘그대로 닿았다면 큰일을 당했을 거요!’
=아, 죄송해요. 몸이 없는 영체 상태에서는 견디기가 힘들어서···.=
‘이해는 하오. 훈련받은 사제조차 잠깐씩 홀리곤 하니. 그래도 조심하시오. 경험이 전무한 당신이 저 강에 닿았다가는 견뎌 내지 못할 거요.’
알렉스트는 방금 전 그의 상태가 매우 위험했다며 설명했다.
‘밖에서 관찰하면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사실 저 격류는 빛에 속도에 한없이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흐른다오.’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니냐고 되묻는 표정으로, 알렉스트는 하은성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한 피드백이 없었다. 하은성은 ‘그래서, 그게 뭐?’라는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준비 없이 무방비하게 수면에 닿았다가는, 영혼이 신혈에 푹 적셔진 채 가라앉을 거요. 저 흐름에, 거대한 파동에 영혼 입자가 얽히는 거지. 정신은 당연히 붕괴되고 빛에 가까운 속도로 쓸려 내려갈 거요. 공간계의 속도가 증가하니 시간계의 속도는 감소하고 당신의 상대적 시간은 흐물거리며 느려질 터. 그 결말은 바깥 기준으로 한참의 시간이 지나 채굴장 밖으로 배출되는 거지. 미친 상태로.’
알렉스트는 한 마디 덧붙였다.
‘운이 좋으면 그 정도에 그칠 거라는 이야기요.’
하은성은 두려움 속에서 되물었다.
=그것보다 더 나쁘게 될 수도 있다구요?=
‘지금 당신이나 나나 질량이 없는 영체 상태임을 잊지 마시오. 신혈의 강에 빠져 휩쓸리는 와중에 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어도 정방향으로 헤엄치며 추진하는 건 가능하오. 미친 상태에서 몸부림치다가 그리 될 수 있지. 그럼 저 격류의 속도에 당신 자신의 속도가 더해지는 거요.’
하은성은 무빙 워크에 탄 채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빙 워크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빛의 속도에 닿으면 당신의 시간은 정지하겠지. 하지만 더 끔찍한 가정은···.’
알렉스트는 절대 시도도 하지 말라는 듯 경고했다.
‘이미 말했듯 지금 우리에겐 질량이 없으므로 광속마저 돌파하는 게 가능하오. 그러면 진정으로 돌이킬 수 없소. 당신의 상대적인 시간은 느려지다가, 마침내 정지한 것을 넘어서 음수(陰數), 혹은 허수(虛數)의 영역에 도달할 거요. 그 시간대는 태초에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 신들이 꿈을 꾸기 전의 시간적 영토지.’
하은성은 마지막 말만 이해했다.
=태초로··· 돌아간다고요?=
‘정확히는 태초보다 이전이오. 그 시간대에 닿는 현상이 시간을 역행하는 것인지, 기존 시간대에서 분리되는 것인지, 아니면 완벽한 소멸을 뜻하는지 명확히 아는 이는 없소. 확실한 건 그 상태가 된 뒤 돌아온 사제는 없다는 거요. 자신이 태초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 시간여행자라고 주장하는 영혼도 발견된 바 없고. 내 해석으로는 꿈에 속한 우리들이 꿈꾸기 전 시간대와 접촉한다면 그대로 소멸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 당신. 또 언제 거기까지 간 거요?!’
하은성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설명하던 알렉스트는 저 멀리 떨어져 희미해진 상태였다. 영파가 아니었으면 서로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거리.
교황 대리였던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날아와 하은성을 붙잡았다. 수면 위에 부유한 채 하류 쪽으로 날아가던 하은성이 그제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살아있는 영혼이 아니라 더 잘 휩쓸리는군. 수면에 닿지도 않았는데, 강이 만드는 잔향(殘鄕), 주변에 퍼뜨리는 미미한 파동에 영향을 받은 거요. 여기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소. 더 위쪽으로 올라갑시다. 상류로 갈수록 밀어내는 힘이 약해지니.’
알렉스트과 하은성은 나란히 날아갔다. 사제의 영혼이 인도하는 대로 상류보다 더 상류쪽으로 움직이던 하은성은, 그제서야 제일 묻고 싶었던 질문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엘라후-프라가로 진입하는 건 하은성도 꿈 꿔본적 있다. 지구로 돌아가는 지름길로 쓰기 위해 말이다.
그러나 알렉스트의 경고 섞인 설명을 듣다보니 그런 걸 시도하고픈 생각이 싹 사라졌다. 원리를 완벽하게 깨우치지는 못했으나, 아무튼 여기서 영혼 잘못 놀리면 아주 더러운 꼴이 된다는 것만큼은 이해한 것이다.
지금 하은성은 그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교황이 무섭긴 했지만, 일단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될 것이다. 설사 그가 살인범이 맞다고 해도 하은성은 이미 죽었다. 죽은 사람을 또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면 내 영혼이 있는 위치에 검은 문이 다시 열릴 것이오. 이 규칙은 지금까지 어긋난 적이 없소. 우리는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되오.’
하은성 때문에 알렉스트는 차분하고 고요하게 이곳을 감상할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고 신수의 영혼을 데리고 움직였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가장 위쪽도 견학한 뒤 돌아갈 셈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여정은 성지 순례에 가까웠다.
그렇게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던 알렉스트가 무언가를 보았다.
‘오오! 바로 저거야!’
그도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저 앞에는 선명한 선(線)이 그어져 있었다.
점차 경계와 가까워진다. 알렉스트는 계속 나아가며 설명했다. 하은성도 멈추지 않고 나란히 날았다. 과연, 그를 밀어내던 파동이 점차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 너머가 근원이오.‘
=···근원?=
‘강에도 하류가 있고, 상류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강물이 뿜어져 나오는 수원(水原)이 존재하잖소? 신혈의 강도 마찬가지요. 저 선 너머에 신혈의 원천이 존재하오. 우린 그곳을 근원이라고 부르지.’
하은성이 듣기로, 달란트는 태초의 종족이 흘리는 피다.
=저기에 그들이 잠들어 있다고요? 여기서는 안 보이는데요. 더 가까이 가면 보이려나?=
‘그렇게 근접한 곳까지는 갈 수 없소. 저 선이 우리를 통과시키지 않거든. 단단한 벽처럼 말이오.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만족한다오. 자, 여기서 기다립시다. 문이 다시 열릴 때까지 이대로 시간을 보내면···.’
알렉스트의 설명이 끊겼다.
‘······?!’
갑작스러운 침묵.
중단된 것은 영파만이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 역시 함께 멎었다. 그 사실을 하은성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좀처럼 안 보이는데요? 혹시 더 올라가 보면··· 어? 이 아저씨 어디 갔어.=
하은성은 의아해하며 영체를 반전시켰다. 그가 지나온 방향에 알렉스트의 영혼이 떠 있었다. 정신이 산산이 부서져 내릴 것 같은, 경악한 표정으로. 그가 멈춘 사이 하은성은 계속 상류를 향해 움직였기 때문에 거리가 좀 벌어져 있었다.
=왜 오다가 마세요?=
‘다, 다, 다, 당신!’
영혼 상태로 입을 뻥긋거리던 알렉스트는 손가락을 펴서 하은성을 가리킨다. 그러다가 곧, 그 행위의 불경함을 깨달은 듯 다시 내렸다. 그리고는 경외감과 두려움이 섞인 영파로 말했다. 울림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당신은 대체··· ‘무엇’입니까?’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세요.=
‘거기를 어떻게 건너간 겁니까!’
그렇게 외치는 알렉스트는 여전히 하은성을 따라오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사제는 그 이상으로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는 것 같다.
=어?=
하은성은 그제서야 자신이 지나온 자리를 보았다. 집중하자 아까는 인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알렉스트가 멈춰 선 지점. 그 앞에 그어진 희미한 경계가.
추측을 영파에 실었다.
=아저씨 설마 그거, 못 넘어오는 거에요?=
당연히 그렇다는 대꾸도 못 한 채 알렉스트는 영체를 부들부들 떤다.
하은성은 그제서야 자기가 한 일을 깨달았다. 처음 자각한 지 이미 몇 개월이 지나 익숙해진 능력이었다.
그는 사제로부터 시선을 떼고 다시금 응시했다.
방금 자신이 넘어온, 그 결계를.